월간 영감 │ 2024년 12월호

VISLA의 에세이 시리즈 ‘월간 영감’이 시즌 3로 돌아왔다. 2020년에 시즌 2를 마무리하며 2022년 즈음에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무려 2년이나 늦어졌다.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많은 게 변한 것 같다. 우리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코로나의 종식으로 일상이 자유를 되찾았고, 간밤에는 나라를 뒤흔든 해프닝 등 많은 사건과 사고도 있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 VISLA는 꾸준히 멋진 아티스트와 그들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 왔다. 또한 독자적인 음악 채널 ‘VISLA FM’과 오프라인 공간 ‘QUEST’를 마련하며 우리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이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변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VISLA 주변인들은 어떤 영감으로 삶을 채워 가고 있는지에 관해 증폭되는 궁금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번 ‘월간 영감’도 지난 시즌과 지지난 시즌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 같다. VISLA 내부 에디터와 외부 필진 및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에 관하여 글 작성을 부탁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회차는 시즌 3의 첫 회이므로 우선 VISLA 편집부원 다섯 명의 최근 영감에 관하여 풀어보려고 한다. 우리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지만,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눌 정도로 결속된 사이는 아니기에 오히려 궁금해졌다. 이에 꽤나 흥미로운 콘텐츠와 생각이 모였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확인하자.


장재혁 – K를 생각한다(임명묵)

SPNS TV의 앤젤 투자자가 됐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유튜브 채널에 난생 처음으로 유료 구독을 신청했다는 말이다. 평소에도 이들의 팟캐스트를 꽤나 즐기고 있던 와중, 트럼프 당선 이후의 세계 정세에 대한 시의적절하고도 심도 깊은 토론을 청취하다 그만, 나머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져 나도 모르게 4900원을 건네고야 만 것. 그 중심에는 밴드 양반들의 리더 전범선과 작가 임명묵이 있었다. 여기에는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다각도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한 두 사람에게 공이 분명 상당했다(이번 영감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그것은 아니니 자세한 에피소드는 SPNS TV를 참고하자). 허나 제아무리 뛰어난 달변가가 떠든다 할지라도 세계 정세니 뭐니 따위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살았던 본인인데 어째서일까.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보니 근 몇 년간 급격하게 혼란해진 세상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듣기만 해도 급격히 우울해지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문제들(정말 우울해지는 단어들이라 또 언급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정녕 점점 암울한 미래를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걸까? 근데 세계는 왜 계속 이 모양, 이 꼴이 돼 가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어쩌다 ㅈ된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여기다 곧 초강력 IMF가 온다는 뉴스와 화룡점정 계엄령까지. 이 혼돈의 혼돈의 혼돈은 정말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인지. 뭐 어쩌라는 건가 싶다가도 순응하면서 살아야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요새 뜨문뜨문 떠오르는 잡생각들.

좌우간 팟캐스트를 시청하던 중 임명묵 작가의 저서 ‘K를 생각한다’를 인상 깊게 읽었다는 영상 댓글을 발견했다. 팟캐스트에서도 현 대한민국의 상황과 세계 정세 그리고 특히나 한국의 90년대생들이 처한 현실에 통찰력 있는 모습을 보인 그이기에(그가 나와 같은 94년생이라는 사실에 아주 조금 놀라기도 했다), 집 앞 도서관을 찾아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책 표지에 적힌 문구다. 사실 현재 책을 반절 정도 지나는 시점에서 어떠한 결론에 다다르진 못했지만, 대한민국을 바라볼 정도의 통찰력은 작가 수준의 소수 지식인들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머지는 점점 숨을 옥죄는 현실을 그저 느끼고 있을 뿐…

‘K를 생각한다’는 90년대생의 성장 배경부터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극심한 갈등의 배경과 90년대생 전반에 드러나는 특성을 조리 있게 설명한다. 더불어 386세대와 교육 등 그들을 둘러싼 환경까지. 요약하자면 왜 한국이 살기 ㅈ같은지 매일같이 불평만 하던 본인에게 그 이유를 낱낱이 밝혀주었다는 말씀. 책의 내용을 담기에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니 접어 두었던 페이지의 사진으로 대체한다.

그런데 문제가 이렇게 많다면 해답은 과연 존재하기라도 할까? 글을 작성하며 다 읽지 못한 책의 끝머리로 서둘러 가본다. 아쉽게도 명쾌한 답은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바보 같은 짓을 한 듯하다. 하지만 문제의 배경을 알고 충분히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K를 생각한다’를 읽는 시간은 분명 값진 시간이 된 것 같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해외 도피의 꿈이 생기기도 하지만 사실 거기라고 다르겠는가? 얼마 전 우연히 알고리즘에 등장한 비프리가 개 같은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또 도망칠래?” 그렇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문장이 괜히 클리셰가 되진 않았겠지. 앞으로도 어젯밤 같은 사태를 연거푸 마주하겠지만 어쩌겠나, 각자의 본분을 다해야지…


권혁인 –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발목을 다치고 나서 수술한 뒤 두어 달 정도 집과 사무실만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내게 근 10년 만에 찾아온 제법 긴 휴식은 아닐까 스스로 위로해 보기도 하지만, 급한 성질은 어디 가지 못하는지 하루하루가 어떤 벽에 막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괜히 조급한 마음이 커진다. 닥치고 휴식과 재활이 답이라는데, 한 번씩 성미를 못 이기고 무리하게 몸을 쓰다가 다시 부어오르기 일쑤.

근래 나의 일상은 이전의 것과는 제법 달라진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출근을 제외한 외출이 전혀 없다든가, 3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들. 누군가에게는 익숙하지만 나에게는 다소 지루한 일상이 지속되는 요즘, 딱히 일할 때가 아니라면 대부분 시간을 영화나 넷플릭스를 시청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부동산 매물이나 좀 더 내 일에 자극을 줄 아이디어, 영감이 될 만한 것들을 뒤지는 데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일상이라 부를 만큼 반복적으로 시청하는 시트콤이 하나 있는데, 바로 김병욱 PD의 2001년 작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다. 새로 산 TV에서 알고리즘으로 추천한 이 시트콤의 랜덤한 에피소드를 켠 이후로는 여기에 빠져 매일 3~4개의 에피소드를 시청하다 벌써 210회를 넘기고 있다. 평소 드라마나 시트콤을 보지 않아서 그런지 “웬그막”은 내게 꽤 흥미로운 관심거리가 되었다.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유머가 극 전반에 흐르는 이 시트콤은 작금의 시대상과는 제법 상반된 감성과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십여 년 전의 대한민국이 드러나는 시대상 속에서 신대방동에 거주하는 한국형 가족이 다들 각자의 콤플렉스와 사연을 지닌 채 살아가고(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이 있겠냐만), 매일 평범한 일상 속 작은 에피소드가 이 가족의 희로애락을 만들어 낸다.

저녁 밥상머리에 앉아서 나누는 대화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관계 속 시기와 다툼, 그러면서도 서로를 안아주는 가족애,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기 직전 2000년대의 풍요롭고 역설적으로 반가운 가부장제 가족 정서. 이러한 것들이 밤마다 내 소파 앞에 놓이고 나는 일종의 푸근한 일상을 대리 만족한다. 그 시간이면, 크고 작은 고민이나 스트레스 그리고 스마트폰은 한쪽에 치워 버리고 마치 명상하듯, 웬그막 가족들의 시간을 통해 내 깊은 곳에 잠긴 단란한 시절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홀로서기를 한 이후로 나는 그 시절의 일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무언가 움켜쥐고 싶은 나머지 시간에 쫓기듯 살아가는 듯하다. 내가 사랑했던 세상, 내게 무척이나 익숙했던 세계는 무너지고 어느덧 11년째 도시의 이방인이 된 나는 단지 살아남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주변에 예쁘게 자리 잡고 있던 화원을 스스로 망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과 나 자신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유독 어렵게 느껴졌던 내게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인물들은 사소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라는 듯 일련의 에피소드를 통해 일러준다. 한 명 한 명은 비록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부대끼며 완성되는 노주현 씨네 가족이기에 마치 극 제목처럼 내게는 그 어떤 집단보다도 강인한 공동체로서 다가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욱석 – 우리 형, 신해철

올가을 유독 미디어에 신해철이 많이 등장했다. 왜 그런고 했더니 올해가 신해철의 10주기란다. 아니,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다. TV를 틀었는데, 마침 MBC에서 신해철을 다룬 특집 다큐를 방영하고 있었다. “우리 형, 신해철”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총 2부작으로 진행되었고, 1부작을 놓쳐 OTT 서비스를 이용해 다시 봤다. 그렇게 두 번을 내리 봤다. 울림이 있는 영상이었다.

솔직히 말해 난 그의 음악을 즐기는 뮤직 팬은 아니었다. 이미 너무 유명한 음악가이기에 대표적인 히트곡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딱히 찾아 듣지는 않았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리는 걸. 외려, 나는 그의 말에 감화했다. 학창 시절 새벽잠을 줄이며 듣던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이 있었고, 예능에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짙은 카리스마 속 장난기가 있었고, 이를 닮고 싶었다. 게임하느라 앨범 작업을 못 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게임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그에게 논객이라는 또 다른 별명을 붙여준 100분 토론에서의 모습 또한 기억한다. 내가 아직 어려 그 논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브라운관 앞에서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시원해 듣는 맛이 있었다. 내 의식과 무의식 속 멋진 어른에 관한 레퍼런스 가이드가 있었다면, 그 일각에는 분명 신해철이 있었을 거다. 이런 사람이 나 말고도 수만 명은 있었으리라.

그런 그가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그새 좀 컸다고 어른처럼 보이던 그가 친근한 형처럼 느껴지던 찰나였다. 이제야 뭔가 한마디라도 붙여 보고 대꾸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던 때다. 살면서 일면식 없는 유명인의 죽음을 수도 없이 맞이한다. 유쾌한 죽음은 어디에도 없으나 신해철의 죽음은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그가 죽고 나서 오히려 신해철의 음악을 더 많이 들었다. 그가 쓴 책이나 신문 사설, 별 뜻 없이 남긴 웃긴 글 같은 것도 찾아 읽었는데, 본업이 본업인지라 음악 정말 좋더라. 왜 진작 찾아 듣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도 한참 신해철 앨범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또 자주 듣는 곡으로 플레이리스트도 만들었다.

이 기회로 그에 관해 글을 써보니 오랜 시간 나에게 옅은 영감을 쉴 새 없이 전달한 사람이었다. 그걸 또 이제야 알았네. 멋진 어른은 고사하고,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할진대, 그게 참 어렵다. 그때마다 그 노래 한 번 듣고, 신해철 어록이라도 한 번 뒤져본다. 멋진 어른의 길을 고대로 걷지는 못해도, 벗어나지는 않게. 그리고 “우리 형, 신해철”에서 보인 신해철은 멋진 어른보다는 좋은 어른에 가까운 사람이더라.


박진우 – 카페타의 의지

얼마 전에 친구들과 카트를 타러 갔다. 그중 두 친구가 모터스포츠 만화 “카페타”를 추천했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두 친구의 추천이었기에 바로 번장과 중나를 뒤져 32권 전권을 무려 32,000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에 샀고 23권까지 읽었다. 최근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는데, 이 만화는 1권에서 무려 4번이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미친 만화. 등장인물들의 눈물 나는 승부욕은 주말 대낮에 소파에 누워서 만화책을 보던 나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나의 개똥철학으로 승부욕이란 건 어린 시절의 신체 성장, 운동신경과 적지 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맞닥뜨린 이 세상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가 최초로 축적되는 어린 시절. 그 시절엔 대체로 나가서 뛰어노는데, 덩치와 운동신경에 따라 어떤 서열이 형성된다. 또래보다 운동신경이 좋거나 몸집이 크다면 운동이나 싸움을 했을 때 질 확률이 낮아지고 지지 않음이 반복되면 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고로 승부욕이 올라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운동을 썩 잘하진 못했고, 현재 스스로 승부욕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간은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 있지만, 주변을 보면 대체로 그렇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승부욕이 없다는 게 의지를 불태울 트리거가 약하다는 점에서 스스로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기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없던 승리를 위한 아이디어와 실행력도 쥐어짜져서 나온다. 이것을 나이 먹고 생업에 적용하면, 그냥저냥 넘어갈 업무도 대단한 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더 큰 욕망과 더 큰 승부욕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 그냥저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조금 피곤하게 만들지만, 결과물은 조금이라도 더 뛰어날 가능성이 높더라. 무한 경쟁 적자 생존 차가운 자본주의 게임의 측면에서 보면, 잘하고자 하는 것과 이기고자 하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과 경제적 성공에 초점이 더 맞춰진 것, 멋진 것을 하고자 하는 것과 많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으로 비치고자 하는 것.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하게 된다.

승부욕이 없다, 욕망이 적다는 문장으로 자신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고 싶지 않은 순간, 무조건 해내고 싶은 순간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잘 되살려서 남은 날들의 방향성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이다.


황선웅 – Nihilist Penguin

우리가 월간 영감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 그리고 이 시리즈의 총괄을 내가 맡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 같다. 먼저 VISLA의 향후 방향성에 관한 논의가 혁인 편집장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그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HQ 인원들에게 서울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일들을 최대한 현장에 나가 다루라고 했다(근데 이거 말해도 되나?). 그래서 지난 약 반년 동안 우리는 서울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내가 아쉬웠던 점은 우리가 어딘가 ‘귀여운 맛’을 잃은 것만 같아서다. ‘귀여운 맛’, 바로 내부 필진의 귀여운 생각이 드러난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 글이 그동안 없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회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피력한 게 나라서 월간 영감도 내가 맡게 된 게 아닌가 싶은데… 사실 난 영감이랄 게 딱히 없다. 10시 출근, 7시 퇴근, 8시 운동 이후 마트 장보기로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패턴적인 삶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패턴적인 삶 와중에도 남들 다 하는 유튜브 시청은 하니까, 시청 중 최근 머리를 띵하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영상을 하나 소개하자면 “Nihilist Penguin”이다.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가 남극 대륙을 탐사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상 끝과의 조우(2007)” 중 일부인데, 한 펭귄이 무리를 떠나 먹이 활동이나 번식지로 가지 않고 내륙의 산악 지대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펭귄은 약 70km 떨어진 산을 향해 걸어가며, 잡아서 되돌려 놓아도 다시 그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은 썸네일 이미지가 너무 귀여워서 우연히 눌러 봤다가 이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펭귄이 방향 감각을 잃어서 혼란에 빠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 내막은 중요하지 않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야생적인 본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삶을 택한 그의 두툼한 뒷모습에 소년 만화 주인공을 연상하며 울컥했으니까. 그가 이 영상 이후 어떤 길을 선택했을지, 어떻게 생을 마감했을지도 알 수 없다. 그의 의미 깊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일군 생에 그저 존경을 표할 뿐…

내레이션의 ‘But why?’라는 질문은 돌아서 내 삶의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내 인생은 어쩌면 펭귄이 산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은 패턴적인 삶, 타인의 시선에서는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이기에 “무슨 낙으로 사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지만 나는 나름 즐겁고 또 성실히 살아간다고 자부한다. 근데 어쩌면 나도 방향 감각을 잃은 혼란에서의 패턴일지도 모른다. 도착한 산 그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미래가 어떨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발을 떼어 가야 하니까… 나도,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한 걸음씩 저마다의 산을 향해 걸어가며, 그 길 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일 테니, 그것만으로도 괜찮으리라 믿으련다.


Editor│황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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