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통한 애도는 어떻게 가능한가?

애도는 종종 침묵으로 표현된다. 묵념의 시간은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형태의 애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애도는 종종 음악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애도는 소리의 부재에도, 소리의 존재에도 있다. 행위의 실천이 정반대의 양상으로 발생하는 현상, 이 무한한 간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간격을 눈치채기 시작함과 동시에, 음악을 통한 애도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음악을 통한 애도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불가능해 보였으며, 오직 하나의 이유로만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음악을 통한 애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하기 위해서는 두 이유를 무력화시키는 음악, 혹은 소리를 찾거나, 음악을 통한 애도를 가능케 하는 이유를 긍정해야 했다. 

그리고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가 무향실[1]에 들어갔던 일화에서, 긍정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에 들어간 나는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은 소리,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담당 엔지니어에게 설명하자 그는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내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알려 주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존 케이지는 소리는 죽을 때까지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쓴다. 더 정확히는, 그는 소리의 최솟값이 둘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지만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그 최솟값은 내가 있을 때만 성립한다. 아무도 없는 무향실에 소리는 없다. 반대로, 누군가 그 안에 있다면, 무향실에도 소리는 있다. 혹자는 음악이 세계와 독립적이라 주장하지만, 세계 안에 사람은 곧 음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음악은 사람이다.

이어,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서 존 케이지는 소리는 죽을 때까지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쓰고,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라고 쓴다. 앞선 논리에 따라 음악이 사람이라면, 죽음은 곧 음악의 죽음을 뜻하는가? 

존 케이지는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라고 쓸 때, 주어의 자리를 비워둔다. 누구도 주어의 자리를 피하지 못한다.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을 때, 애도가 시작된다. 죽음으로 사라진 소리를, 애도는 살아있는 이들의 소리로 채운다. 묵념은 바깥의 소리를 죽이고, 심장 소리를 살린다. 고로, 묵념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생의 소리를, 피의 소리를 듣는 행위이다. 

묵념은 완전한 진공을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애도는, 소리의 부재에도, 소리의 존재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리의 존재에만 있다. 이것이 통상 레퀴엠[2], 또는 진혼곡으로 불리는 애도의 음악이 묵념과 함께 연주되는 이유일까. 애도는 몸속에 흐르는 음악과 연주되는 음악이 화음을 이루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로써 무한한 간격이 좁혀지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음악을 통한 애도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가 남아 있다.


죽은 사람은 들을 수 없다. 이는 음악을 통한 애도가 마주하는 첫 번째 모순점, 불가능성이다. 포화 속에서, 음악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음 앞에서 음악은 무기력하다. 혹은, 우리는 죽음 앞에 무기력하다. 그렇기에 애도의 음악은 죽음을 목도한 사람을 다독여야 한다. 위로를 건네야 한다. 애도의 행위는 생과 엇갈린 망자의 넋을 기리고, 애도의 음악은 죽음과 엇갈려 살아있는 이에게 위로를 준다. 이렇게 애도는 필연적으로 위로를 포함한다. 소리와 묵념은 동시에 있다.

묵념과 동시에 울리는 애도의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 초기 레퀴엠은 반주 없는 단선율 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로 불렸다고 기록된다. 이 전통을 받아 현대의 많은 진혼곡은 단선율, 단음조의 소리로 애도를 표한다. 미군 장례식에 사용되는 진혼곡 텝스(Taps)는 24개의 음표를 연주하는 하나의 나팔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현충일 오전 10시에 1분간 울리는 단음 사이렌을 ‘묵념 사이렌’이라 부른다. 전국에 일시적으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일상을 중지시키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예를 표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단선율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죽음을 예고하는 공습 경보로 사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그의 저작 ‘음악 혐오’(La haine de la musique)를 통해 사이렌 소리, 더 넓게는 음악이 죽음을 불러옴을 지적한다.

음악은 인간의 몸을 끌어당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세이렌 역시 그렇다. 배의 돛대에 묶인 오디세우스는 그를 끌어당기는 멜로디에 공격받는다. 음악은 영혼을 붙잡아 죽음으로 이끄는 고리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들썩이는 추방자들의 고통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설의 새 세이렌은 듣는 이를 홀린다. 복종시킨다. 신체 기관 중 귀는 소리를 듣기 위한 기관이지만, 소리를 막을 수 있는 자체적인 시스템을 지니고 있지 않다. 키냐르는 쓴다. 영혼은 음악에 저항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영혼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는다. 키냐르는 다시 쓴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후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참극을 증언한 책을 집필한 이탈리아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수감자들의 영혼은 죽어 있다. 마치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고, 그들의 의지를 대신한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고 쓰며 음악이 어떻게 영혼을 탈취하는지 기록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리듬을 이용했다. 심장 소리. 생명 감각. 이를 거부할 수 없다. 리듬은 살아있는 생명의 신호다. 리듬을 이용하는 자에게서 매스꺼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이렌은 종종 몸을 굳게 하고, 사고를 마비시킨다. 키냐르는 이어 ‘세이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소방차와 경찰차와 앰뷸런스를 재난의 현장으로 불러들이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질문한다. 어떻게 죽음을 애도하는 음악이, 죽음을 부르는 음악이 되었는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번째 불가능성, 즉 형식적 모순을 맞닥뜨린다.

같은 형식의 소리(사이렌)은 어떻게 완전히 다른 목적을 지닐 수 있는가? 죽음을 애도하는 사이렌의 목적은 슬픔과 추모를 전달하는 데 있다. 반면, 공습 경보 사이렌의 목적은 경고와 대비를 요구한다. 그 둘은 같은 음색의 형식을 공유할지언정, 전혀 다른 맥락과 기능으로 쓰인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이렌의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특정한 목적과 함께 작동하는 방식이다.

키냐르는 다시 질문한다. 어떻게 하면 어떤 음악이든 복종할 필요 없이 들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음악의 목적을 환기한다. 애도 사이렌의 목적은 애도이고, 공습 경보 사이렌은 경고가 목적이다. 그리고 수용소의 음악은 인간 박멸을 위해서 쓰였다. 음악은 어떤 목적을 지니고 쓰일 수 있다. 다만, 음악에 복종하지 않기 위해 우리 몸속에 흐르는 음악 역시, 목적성을 지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앞서 존 케이지를 통해 애도는 묵념, 혹은 음악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닌 묵념을 통한 신체의 음과 애도의 음악을 혼합하는 것, 화음을 만드는 행위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의 몸 역시, 음악의 주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몇 달 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의 공습 경보에 맞춰 화음을 넣고 있는 여성의 영상은 이것의 가장 좋은 예시 중 하나이다. 죽음을 경고하는 공습 경보의 단선율 사이렌에 자신의 목소리로 화음을 쌓으며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강렬한 감정적 동요를 느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다. 사이렌이 요구하는 복종적 태도에 저항하며, 자신의 몸속에서 흐르는 음악의 요구를 듣고, 증폭해 뱉어내는 행위다. 단선율의 사이렌 소리와 그녀의 목소리가 섞이며 다성 음악으로 변모하는 순간, 복종적 음악은 애도의 음악이 된다.

이 짧은 영상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뉴스를 통해 키이우의 공습 경보를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공포와 수동성이 아닌, 생동감과 주체성을 불러일으키는 감각. 그는 스스로를 보호했고, 우리를 위로했다.

«середи лиха співати пісні» – “불행 속에서도 노래를 불러라”

이처럼 애도는 즉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복종적 음악인 공습 경보 사이렌에 화음을 쌓는 것은 우리 몸속에 흐르는 음악을 긍정하며, 그것으로 저항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공습 경보 사이렌이 애도 사이렌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복종적 음악을 변형하며 애도의 가능성을 재확인한다. 이는 즉각적인 애도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애도는 시차를 두고 발생한다. 

미국의 작곡가 윌리엄 바신스키(William Basinski)는 애도는 시차를 두고 발생함에, 슬픈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과거의 사건이 불러온 참극을 우리는 애도를 통해 다시 아픈 기억에서 꺼낸다. 애도는 비극적인 시차를 짚으며 과거를 현재의 순간으로 길어 올리고, 과거의 기억이 애도의 순간과 공존하게 한다. 애도 행위는 또한 반복되어 일어난다. 매년, 매월 혹은 매일 일어나는 애도는, 과거와 현재를 엮으며 각각의 루프를 형성한다. 

바신스키는 2001년 9월 11일 자신이 거주하던 브루클린 아파트의 옥상에 올라가 두 빌딩이 서 있던 자리에서 쉼 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촬영했다. 동시에, 바신스키는 밤이 될 때까지 옥상에 앉아 뉴욕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이 오래전 제작한 카세트테이프를 들었다.

그 카세트테이프는 죽어 가고 있는 음악을 재생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나머지 테이프가 반복 재생되는 동안, 철산화 입자가 서서히 먼지로 변해 테이프 기계 안으로 떨어지고, 테이프의 빈 플라스틱 부분이 드러나며 새로 녹음된 구간에 침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테이프 루프는 소멸하고 있었고, 음악은 실로 죽어가고 있었다.

한두 해가 지나고, 바신스키는 [The Disintegration Loops]의 이름으로 테이프의 마지막 순간들을 녹음한 시리즈 음반을 공개한다. 테러 당일의 뉴욕을 촬영한 그의 영상과 [The Disintegration Loops]의 반복되는 루프를 듣고 있으면, 음악의 죽음과 생명의 죽음이 하나의 전체로 녹음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바신스키의 음악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진행된 10주기 추모 공연에서 시현되었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뉴욕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바신스키는 그날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쇼, 아마겟돈. 우리는 모두 공포에 휩싸여 미쳐가고 있었고, 각자는 자신을 붙잡아줄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로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The Disintegration Loops]의 음악은 듣는 이를 복종시키지 않는다. 단순히 그럴 힘이 부재하다. 음악은 죽어가고 있었고, 그것이 죽어가는 영혼을 위로했다. 애도의 음악은 스스로를 소진하며 죽음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쉼 없이 반복 재생되는 테이프는 죽음을 반복하며, 과거와 현재의 시차를 좁힌다. 

그의 음악은 포화 속, 우는 아이를 달리기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자장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과 같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고 있다.


2024년 5월 9일, 가자지구 남부 라파.
팔레스타인 여성 부타이나 아부 자르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아들 하즈마의 손을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런 무기력함에 분노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죽음 앞 무기력함을 만든 이들을 향한다. 캐나다 소재의 밴드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는 지난 10월 4일 [NO TITLE AS OF 13 FEBRUARY 2024 28,340 DEAD]의 제목으로 앨범을 발표한다. 

숫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 가자지구에서 사망한 이의 수를 나타내고 있다. 앨범은 제목을 명시하기를 거부하며 하나의 사실, 2024년 2월 13일부로 28,340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남긴다. 앨범 재킷의 비어 있는 공간은 무언가의 부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힘차게 채운다. 그들은 음악의 복종 가능성을 감수하며, 그들의 음악이 죽음을 불러온 이들에게 닿기를 희망한다.

[NO TITLE AS OF 13 FEBRUARY 2024 28,340 DEAD]

물리적인 정보 중 가장 전파성이 강하고 가장 넓게 퍼지는 것은 음성 정보다.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는 연주한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28,340명의 심장 소리와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를 채우기 위해 연주한다. 그들의 애도 방식은 한때 삶을 채웠던 소리의 부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들으라 고발한다. [NO TITLE AS OF 13 FEBRUARY 2024 28,340 DEAD]는 더 이상 전쟁으로 삶을, 소리를 앗아가지 말라 시위하는 저항의 음악이다. 

지난 10월 18일, 하마스 수장의 죽음이 확인된 후에도,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 말했다. 다시, 포화 속에서 음악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의 음악은 포탄을 향해서가 아닌, 사람을 향해 포화 속 죽음을 맞은 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소리친다. 그리고 죽음을 불러오는 이들 위에 음악이 군림하기를 희망한다. 

Godspeed You! Black Emperor의 공연. ‘Hope’라 쓰인 글자가 음악과 함께 상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 애도 역시 사후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10월 발매된 앨범은 2월의 사망자 수를 명시하고 있다. 2024년 12월 10일 가자 보건부의 사망 통계는 44,786명을 가리킨다.


그럼,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애도에서 시차의 문제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괴리만을 뜻하는가? 그렇지 않다. 애도로 미래를 가리키는 음악이 한국에 있다. 시차를 미래에 두는 것은 미완결을 뜻한다. 나는 애도에서 발생하는 시차의 문제를,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이 쓴 미완결의 음악을 통해 하나의 해결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Exemplum in Memoriam Gwangju”는 작곡가 윤이상이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된 이들을 위해 1981년에 만든 교향시다. 라틴어로 쓰인 제목은 직역하면 “표본 : 광주를 기억하며”이지만 국내에 소개될 때는 “광주여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의역되었다. 이러한 제목의 의역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음악은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22분 중 8분 초반까지는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나타낸다. 계엄군과 시민들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소리는 얽히고 풀어지다 모든 걸 멈추는 여러 발의 총성 소리를 비유한 박 소리로 마무리된다. 15분까지는 학살 후 광주의 상황을 묘사한다. 무거운 저음이 가슴을 누른다. 곡의 마지막 파트에서는 분위기가 반전된다. 트럼펫의 팡파르는 미래에 도래할 정의를, 승리를 기도한다. 이 마지막 주제는 윤이상이 1945년 8월 15일 마산에서 직접 목격한 해방의 감격을 연상하며 구현한 것이다.

윤이상은 추상음악가이지만, “Exemplum in Memoriam Gwangju”의 작곡을 두고 한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추상음악이라 해서 청각적 형이상학의 세계를 그려 내는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의 뿌리는 사실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분명 “Exemplum in Memoriam Gwangju”는 윤이상의 음악 세계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윤이상은 곡의 1부와 2부에서 르포르타주[3] 기자가 되어 작곡한다. 르포르타주는 드러내야 하는 문제가 현장에 있을 때 그 형식을 필요로 한다. 윤이상은 곡의 3부에서 다시 추상음악가로 돌아가 승리의 희망을 기도한다. 노래한다. 

그러나 윤이상은 “Exemplum in Memoriam Gwangju”의 작곡을 마치고 뜻대로 작곡된 것 같지 않다고 하며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 아쉬움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이 단순 작곡가의 능력 부재였다면, 1부의 생생한 공포와 혼란, 그리고 밀려오는 2부의 참혹한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3부가 그려내고자 했던 승리의 도래, 그것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어떤 명확한 끝마침 없이 마무리된다. “Exemplum in Memoriam Gwangju”는 미완성 음악으로, 완결의 가능성을 미래에 두는 방식으로 미래와 연결된다. 1부의 현장감은 2부에서 애도로 넘어가고, 애도는 3부에서 회복의 희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희망의 발로는 미래 세대의 애도로 시작된다. 

통영현대음악제 2000 : 윤이상을 기리며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애도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 몸속의 흐르는 음악을 듣는 행위에서 온다. 이는 우리의 몸 역시 음악의 주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애도의 음악은 어떻게 망자의 넋을 기리고 음악의 복종적 성격을 전복하는가? 그것은 특정 형식, 가령 죽어가는 음악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가능하고, 청취의 대상을 죽음을 불러온 이들에게 겨냥함으로써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음악을 통한 애도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공통적 경험이자 가장 개인적 경험인 죽음을 목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애도는 공통적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죽음. 사이렌은 죽음을 불러온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가 사이렌에 화음을 넣는 행위를 죽음을 이겨내는 용기로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선원들과 함께 세이렌의 노래에 화음을 맞춰 부르는 상상을 해본다.

음악의 복종적 힘에 맞서기 위해선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내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현장의 복종적 음악과 맞서는 목소리, 현실을 담으려는 음악, 현실에 저항하는 음악, 시차를 두고 반응하는 음악이 모두 우리 몸에 흐르고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음악을 통한 애도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지난 12월 3일, 사람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렸고, 분노했다. 비상계엄 사태는 윤이상의 곡이 완결하고자 했던 3부의 내용을 다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과거로부터 길러져 온 죽음의 기억, 그 역사적 트라우마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완결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 미완결의 음악이 우리 몸속의 흐르는 음악과 조응할 때 비소로 끝맺음의 소리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윤이상이 “Exemplum in Memoriam Gwangju”를 작곡한 후 느꼈던 미완성의 감각을 보완하는 일은, 미래 세대인 나의 피와 뇌의 소리가 그의 음악과 공명하고 있음을 듣고 통감하는 일로 완결된다.

무엇이 완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중요하다. 음악 공동체, 즉 생의 공동체는 기억해야 한다. 피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오직 그 소리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의 소리에 의해 복종 당하는 것. 오늘날은 그런 애도가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Reuters, NPR, Bandcamp, Insounder, 조선일보, 5.18 기념재단

[1] 소리나 전자기파의 반사를 막기 위해 흡음재로 만드는 방. 외부 소음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2]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위령미사)’때에 하느님께 죽은 이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 주시기를 청하며 연주하는 전례 음악.
[3] 영화·신문·방송·잡지 등에서 현지로부터의 보고 기사·사회적인 현실에 대하여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형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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