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적막함 때문이었을까. 2025년 을사년 새해가 밝았음에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해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달력의 숫자 변화는 일상의 무거움 속에서 의미가 희미해지는 듯하다. 연말의 흔적과 고민들만이 머릿속을 채운다. 현재의 침울함은 훗날 탄성적으로 튀어 올라 회복되고 반등하리라고 어느 때보다 간절히 희망해보는 2025년 1월. 이번 ‘월간 영감’은 VISLA 프리랜스 에디터 박태민과 VISLA 편집부원 3인이 글을 보탰다.
박태민 – 글쓰기
나는 꽤 오랜 기간 시나리오, 유사 논문, 비평문 등 이런저런 글을 썼다. 어딘가에 기고하거나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영화과를 준비했기에 대입을 위한 목적도 어느 정도 있었고, 개인적인 탐구를 위해 그리고 작품을 준비하며 완벽한 무언가만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에 혼자 계속해서 썼던 것 같다. 나는 글쓰기를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를 푸는 자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목표는 있지만 도달점이 없는 행위여서 그런 것이었을까.
비즐라에서 글을 쓴 지 2달이 좀 넘은 것 같다. 작년, 재수 중이었던 나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다 대학을 포기했다. 더 이상 재수생이 아니니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 비즐라에 지원하게 되었다. 포트폴리오라 할 것이 없어, 자료 정리 목적으로 만들고 있던 데이터베이스의 일부와 그간 들어왔던 음악을 캡쳐해서 보냈다. 그리고 재혁님 앞에서 주절주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좋게 봐주신 덕분에 비즐라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상적 행위가 생산성을 지니게 되었다.
비즐라에서 글을 기고하며, 글쓰기란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일상적 행위에 생산성과 함께 책임감이 따르게 됐으며, 글쓰기란 행위가 지닌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행위에 기반한 작업에 대한 생각도 점점 커져간다. 더 나아가, 과거 자위로 여겼던 행위로 돈을 버는 나는 매춘부인가 하는 정신 나간 생각도 했다. 무튼, 최근 나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글을 쓰는 행위에서 비롯된 여러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최근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나, 적어 본다.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의 “수동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수동타자기를 고집하는 요나스 메카스가 수동타자기에 컴퓨터 용지 한 롤을 넣고, 용지가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본능적으로 적은 에세이이다(요나스 메카스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글에 담아내는 것이 아닌 글을 쓰는 행위에만 집중한 에세이/소설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 많은 도움이 됐다.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 준 요나스 메카스에게 감사.
스스로 엄청난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의 일상에는 그다지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전과 같이 밥 먹기, 글쓰기, 흡연, 잠자기. 매우 단순한 행위 구성으로 이루어진 하루를 매일 반복한다. 하지만, 당분간 지속될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이 나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오늘도 즐거운 반복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장재혁 – 나카가와 히로시
최애 만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의 극장판 애니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만화를 다시금 꺼내 읽는 요즘이다. 만화는 ‘침략자’를 태운 거대한 모선이 도쿄 한복판에 등장한 뒤의 모습을 그린다. 도쿄 시민을 비롯한 전 인류는 전례 없던 생명체의 등장에 공포에 떨었지만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선과의 삶에 적응해 살아간다. 누군가는 침략자를 인류의 적으로 간주하며 침략자 학살에 적극 동의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기꺼이 인류를 침공한 침략자의 편에 선다. 개중에는 침략자에 대항하는 무기 개발이 돈이 되기 때문에 침략자를 적당히만 죽여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SNS에서는 편이 갈리고 길거리에는 시위가 매일 같이 벌어진다. 아사리판이다. 마치 며칠 전 한남동을 지나다 본 싸움꾼 아줌마, 아저씨들처럼. 그들은 서로를 빨갱이, 미친놈이라 부르며 새해부터 덕담을 주고받았다. 문득 “데데디디”의 히로시의 말이 떠올랐다. ”우파나 좌파 같은 것과 상관없이, 사회란 둘이 하나인 불알이란 걸…” 나카가와 히로시는 작품의 주인공 나카가와 오우란의 오빠로 오우란 못지않게 사회를 비관적으로, 그러나 실은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유쾌하고도 다면적인 인물이다. 나는 그의 당당함이 좋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식량을 축내는 돼지 백수이지만 우울한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SNS에서 비대하게 자아를 부풀린 이들을 향해 고양이 불알 사진을 투척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이다.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인터넷 세상을 지배한 그는 나름의 광고 수익을 얻어 동생에서 베푸는 자상함까지 보인다. 그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판 코딱지 같다는 생각이… 왜 더럽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은… 그런 느낌… 다른 시간선에 등장하는 히로시는 갸름한 얼굴로 여고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반전 매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는 사실 엄청난 능력자다. 본인도 그걸 인지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를 더욱더 낭비한다. 그 모습이 히로시의 참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주말 히로시를 보러 극장으로 향한다. 세상의 가짜들에게 엿을 먹일 그의 모습을 큰 스크린으로 마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어 온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의 얼굴이 새겨진 굿즈를 찾아볼지도 모르겠다. 세상엔 더 많은 히로시가 필요하다. 히로시 포에버.
박진우 – 카마이타치의 밤
오랜 시간 동안 게임을 주된 여가 활동으로 삼다 보니, 어지간한 게임들은 큰 자극을 주지 못하고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PC방 점유율 상위권의 대중적인 게임들 위주로 해왔기 때문일까. 강렬한 취향이나 매니악한 성향도 없이, 그저 유명하고 적당히 잘 감기는 게임을 무기력하게 소비하며 여러모로 지루하고 수동적인 내가 된 것은 아닐까.
한때 “아 요새 게임할 거 졸라 없네.”라고 생각하다가도, “이젠 늙어서 더 이상 못 느끼게 돼버린 건가.”라는 슬퍼짐을 반복하다가. 뒤늦게 젤다의 전설을 해보고 “아~제작자가 잘못 했네”라며 외부적인 이슈였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어려서부터 콘솔파가 아닌 PC(Personal Computer)파였기 때문에, 다채로운 게임성 경험 부족이라고도 생각이 들었다. 이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게임 시도 및 콘솔 출신의 게임도 폭넓게 즐겨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던 차에, 며칠 전 나에게 큰 울림을 준 게임을 만나서 소개해 본다. 그것은 무려 1994년 발매된 “카마이타치의 밤(かまいたちの夜)”이다. 1994년 게임인 만큼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굉장히 투박한 그래픽과 사운드지만 막상 시작해 보면 그 몰입도만큼은 근래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게임은 장르로 따지면 사운드 노벨(왠지는 모름)이라고 한다. 특정 상황이 발생하고 그 상황을 묘사하는 이미지가 뜨고 몇 가지 텍스트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게임을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 선택에 따라 다양한 진행, 엔딩이 발생한다. 게임의 내용은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으스스함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유명 추리소설 작가가 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적은 수의 픽셀과 단순한 사운드만으로 놀라울 정도의 공포감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심지어 이미지 속 등장인물마저 실루엣으로만 처리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플레이타임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2-3시간 정도면 이 게임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고 몇 가지 엔딩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게임의 멋진 점은 ‘장르를 개척했다’라는 거다. 시간이 만들어 놓은 장르라는 틀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장르를 상상하기도 전에 내가 원하는 어떤 지점을 향하기 위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만을 생각할 때 역으로 장르는 새롭게 생겨버리는 것은 아닐까.
오욱석 – 공연
작년 이런저런 공연이 많았다. 공연이야 매년 개최되지만, 나도 한 번쯤 가볼 만한, 혹은 갔으면 좋았을 공연이 다수 있었다는 얘기. DMZ 피스트레인이나 제이미 xx(Jamie xx), 원더리벳 2024를 통해 내한한 엠플로(m-flo),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회자하는 예(Ye)의 리스닝 파티 등등. 이처럼 여러 가지 공연이 많았으나 그중 단 한 곳도 가지 않았다… 특히, 예 리스닝 파티는 그 현장에 있던 주변인들에게 ‘말도 안 되는 공연이었어’, 너도 갔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었다. 공연장이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으며, 티켓이 없었어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결국 가지 않았다. 2024년의 후회 중 손에 꼽을 만한 일이다. 내가 가지 않은 걸 누굴 탓하겠나.
이밖에도 여러 이벤트가 있었음에도 내 발은 쉬지 떨어지지 않았다. 근데 또, 작년에 도대체 무얼 했나 사진첩을 술술 넘기니 공연이나 콘서트에 아예 참석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스테이지를 찍은 사진이 군데군데 있었고, 어떤 연유로 갔는고 하니 전부 일 때문에 방문했더라. 명색이 문화를 다루는 매체의 에디터인데, 해도 해도 너무 했지.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공연을 볼 기회가 종종 생긴다. 꼭 취재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공연 기획사 측에서 한번 구경 오시라 티켓을 보내주는 감사한 경우도 있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친구가 같이 놀자며 초대를 해줄 때도 있다. 지난해에도 이렇게 몇 자리에 초청받았으나 ‘도무지, 겨를이 없다’, ‘사람이 많은 곳은 힘들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매번 신경 써주시는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항상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사실, 팬심과 열정이 부족했던 거겠지. 그럴 것도 없이 귀찮음이 가장 컸을 테다.
그렇게, 극악의 참석률을 계속해 갱신해 나가던 중. 공연을 가까이서 볼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물론, 업무의 일환으로… 매 연말 돌아오는 VISLA 매거진 연말 파티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중 여러 밴드를 라인업으로 세운 라이브 스테이지의 비디오 콘텐츠 제작을 맡았다. 대다수가 이미 귀에 익은 팀이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 콘텐츠 기획 중 뮤지션의 간단한 인터뷰와 코멘트가 필요했기에 부랴부랴 그들의 음악을 찾아 공부하듯 들었다. 밴드 모두 훌륭한 뮤지션이었고, 음악 또한 그 명성에 뒤지지 않았음에도 노골적인 목적성을 띤 청취라 그런지 계속 찾아 듣게 되지는 않더라.
아무튼, 공연(촬영) 당일, 본 공연 전 각 밴드가 미리 스테이지에 방문해 리허설을 진행했다. 촬영 또한 리허설부터 담기 시작해 내내 그들의 라이브를 감상할 수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어폰을 통해 듣던 소리과 차이가 확연했다. 볼륨이 빵빵하다거나, 실제 느껴지는 공감각과는 별개로 어떤 힘이 있달까. 두 시간 후 본 공연이 열리고 나서는 더욱 대단했다. 연극의 3요소를 희곡, 배우, 관객이라고 하는데, 공연 역시 그와 궤를 같이하니 다를 바 없다. 관객이 전달하는 에너지야말로 굉장해서 외려 뮤지션이 이들에게 동력을 얻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다섯 팀의 다섯 라이브를 쉬지 않고 봤다. 맡은 바 일을 차치하더라도 그날의 공연은 내게 또 새로운 경험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공연 관람 경험이 많이 없어 이를 감동이라 칭하는 게 맞을까 싶지만, 내게 새로운 자극이자 영감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요즘은 그 무대에 선 밴드들의 음악을 즐겨 들으며, ‘이렇게 라이브에 입문하는 건가’하는 퍽 가소로운 생각까지 한다. 올해는 마다하지 않고 여러 공연에 가보는 걸 신년 목표 중 하나로 슬쩍 끼워 넣어보도록 한다.
Editor│황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