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정유년을 맞아 VISLA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월간 영감’ 그 첫 번째 여행에 당신을 초대한다.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의 반복, 꽉 막힌 머릿속 어딘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생각의 단초를 기억해보자. 그것은 엄청나게 매운 불닭볶음면일 수도 있고, 당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는 ‘종의 기원’ 같은 서적일 수도 있다. 예상치도 못한 것에서 엉뚱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면 이 또한 기쁜 경험이 아닐는지. ‘월간 영감’은 VISLA 필진을 중심으로, 각자 어디선가 불러낸 영감의 조각을 모아 매달 마지막 주에 발행한다. 물론, 여러분도 참여할 수 있다. 이 페이지의 일부를 차지할 의향이 있다면 주저 말고 연락 바란다. 지난 1월, 당신의 영감은?
eBay ㅣ 쇼핑 웹사이트
세상에 ADSL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웹은 내 영감의 7할 정도를 꾸준히 차지하며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리게 했다. 지금도 흥미를 끌 만한 웹사이트를 무작위로 찾아다니지만, 아직 이베이(eBay)를 능가하는 웹사이트를 본 적은 없다. 이베이는 그냥 존나 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이미 이베이에 등록되어 있고, 당장에 찾을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온다. 몇 년간의 이베이질은 소비 패턴을 아주 효율적으로 바꿔놓았다. 이베이는 과거에 그 순간 사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떼기가 결국, 내 눈에 다시 보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살 수 없는 것이란 없다. 헌 물건에 비싼 값을 치를 가능성이 짙다 해도 소비의 불안함을 소거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워 미칠 지경이다. 지구상 어느 스니커 스토어도 슈프림 덩크를 수십 족이나 갖고 있지는 않다.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이 방대한 아카이빙을 보라. 심지어 어떤 물건은 정식 발매도 되기 전에 이베이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심지어 출시 직전 드롭된 샘플이 올라오기도 한다. 디깅에 할애할 시간조차 아깝다면 갖고 싶은 물건의 키워드를 등록해 놓으면 된다. 소비의 시대, 이베이는 소비에 관한 모든 시스템을 씹어 먹고 있다. 이베이의 본질인 경매 또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자리한다. 근소한 차이로 경쟁자를 물리쳤을 때의 쾌감이란……. 겨우 한 합의 차이로 적을 무찌른 무사의 기분이 이러할까. 이베이는 하입(Hype)의 어떤 척도 같은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 제품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베이를 켜고 검색해보자. 이쯤 되면 과연 이베이에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게 빠를지도. 모든 하입비스트의 우상 후지와라 히로시(Hiroshi Fujiwara) 역시 일찍이 인터넷 쇼핑의 우수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베이가 있다.
君はあっちがわ 僕はこっちがわ II – 너는 저쪽, 나는 이쪽 – ㅣ 사진작가 양승우의 사진집
사진작가 양승우와 그의 아내 마오의 사진전 ‘꽃은 봄에만 피지 않는다’가 문전성시에 힘입어 오는 2월 1일까지 연장 전시에 들어갔다. 전시에 다녀온 이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전시장 입구 한쪽에는 그동안 양승우 작가가 발표한 사진집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그중 하나인 ‘君はあっちがわ 僕はこっちがわ II’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숙한 일본어 솜씨에 뭐라고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君はあっちがわ 僕はこっちがわ II는 가부키초의 노숙자 ‘곤타’를 주제로 한 사진집이며, 그 두 번째 이야기다.
사진 속 곤타는 어딘가 더러울 것만 같고, 불편한 느낌의 노숙자라기보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유인에 가깝게 느껴진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의 자유분방함, 넘치는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옆에서 곤타를 면밀히 관찰한 양승우 작가의 시선이 빛을 발한 덕분이다. ‘君はあっちがわ 僕はこっちがわ II’는 내가 본 어떠한 사진집보다 따뜻했다. 특정 인물과 어떻게 교감해야 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카메라를 사용해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보길 바란다. 흔히 ‘조폭 사진’으로 양승우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이들이라면, 새삼 색다른 기분을 느낄 것이다.
Jayass ㅣ 前 휴먼트리 대표
2016년은 워낙 큰 사건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한 해였다. 무거운 사회, 정치 이슈가 매일같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터져 나왔고, 자연스레 국민의 관심사는 한 곳에 쏠린 채 정유년을 맞았다. 여기서 잠시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본다면 아무래도 휴먼트리(Humantree)의 영업종료가 마음에 걸린다. 휴먼트리는 도메스틱 브랜드를 관심 있게 지켜본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 제이에스(Jayass)가 일군 작은 의류 회사다. 그는 11년간 숍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나는 제이에스와 깊은 사이도 아닐뿐더러 특별히 휴먼트리에서 취급하는 브랜드를 사 입지도 않았다. 그러나 학창시절부터 ‘아프로킹 파티’, ‘360 Sounds’ 그리고 휴먼트리와 같은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길거리 문화의 움직임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일종의 동경을 느꼈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외국의 쿨한 문화가 한국에서도 꿈틀거린다는 사실에 가슴이 들떴다.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우리도 재밌는 거 하나 만들자, 씨발”이라고 버릇처럼 말하던 스물세 살 무렵, 그때 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한 미래를 그렸던 것 같다.
VISLA를 올해로 약 5년째 만들어오면서 독립 회사를 향한 갈망,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사소한 밥값 같은 고민이 때로는 가슴 어딘가를 깊숙이 찔렀다. 누군가는 예전부터 꽤 많은 야바위꾼이 한국의 길거리 문화, 언더그라운드 신(Scnene)이라는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톡톡한 이득을 봤다고 했다. 순수하면 이용당하기에 십상이라는 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어느새 진정성, 순수함과 같은 단어야말로 가장 독이 되는 말임을 감지했다. 제이에스 역시 휴먼트리에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며 어디에 함부로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딱히 그를 기형적인 시장의 희생자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수많은 사람과 브랜드가 다른 길로 발 돌린 적 어디 한두 번인가. 이미 과거가 된 휴먼트리의 성과를 놓고 가타부타 따지지도 않겠다. 다만 그는 적어도 내가 이전부터 지겹게 들어온 그 독이 되는 말을 진심으로 지켜온 몇 안 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일에 온전히 발을 담근 지금에서야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었는지 새삼 체감한다. 단지 재미있으니까.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위험한 말이다.
가끔 들르곤 했던 제이에스의 블로그, ‘Jayass.com’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찬찬히 살펴봤다. 그는 분명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휴먼트리에서 보냈으리라. 슈프림과 루이비통이 뒤섞인 컬렉션이 런웨이를 걸어 다니는 요즘, 왠지 순수한 스트리트 컬처, 그 안에서 지고지순한 정신을 이야기하는 일도 한참은 뒤떨어진 구닥다리 옷처럼 느껴진다. 돈, 중요하다. 그것만큼 절실한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이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또래 친구들이 모여서 뭔가 더 멋진 일이 없을까 고민하고, 만들고 싶은 옷을 마음껏 찍어내는 따위의 것들이 여전히 재밌는 거다. 이 놀이에서 더는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확신이 나에게도 있을까. 막연한 동경을 밥벌이로 만들려고 애쓰는 나를 비롯해 주변 친구들이 조금이나마 그다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소박한 꿈에 당장 더 바랄 건 없겠다. 마지막으로,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걸 들고 다시 모습을 비출 제이에스의 가까운 미래를 먼발치에서 응원하겠다.
GMTV ㅣ 성인가요 케이블 채널
늦은 밤, 아무런 생각 없이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릴 때가 있다. 본인의 집은 올레 티비를 이용 중인데, 공중파 채널과 50번대 스포츠 채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일상적인 채널의 이동 경로였다. 하루는 날 잡고 수백 번대의 채널까지 한 칸씩 이동해봤다. 리모컨 버튼을 멈추게 된 채널이 하나 있으니 바로 88번 GMTV였다. 이 채널에서는 저녁, 새벽 시간에 90% 이상의 확률로 현시대인지 2002년 월드컵 시즌인지 착각할 법한 소위 ‘뽕짝’이라고 불리는 성인가요를 주구장창 틀어준다. 이미 한국에 펼쳐지는 인구절벽현상에서 예감하듯, 이 채널의 타깃은 도시에서 힙하다는 곳만 왔다 갔다 하는 20, 30대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인구가 쌓여가는 한반도의 중장년 혹은 노년층일 것이다.
종종 뮤직비디오를 틀어주기도 하는데, 그 퀄리티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처참하리만치 조악한 수준의 뮤직비디오를 무려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VISLA에서 소개하는 대다수의 뮤직비디오를 TV에서 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성인가요의 시장 규모가 꽤나 거대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채널에 등장하는 가수들은 오래된 기성 가수 혹은 사업 성공 후 꿈을 이루려는 중년으로 보인다. 종종 어린 나이에 귀염둥이 역할을 맡은 20, 30대도 있다. 그중 홍진영 같은 케이스는 두루두루 사용될 수 있는 카드일 것이다.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얼굴을 비치던 쌍둥이 자매가 트로트 가수 ‘윙크’로 무대를 옮긴 이유도 시장규모와 비전을 내다본 영리한 계산이 배경에 자리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의 주된 테마는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사랑, 둘째는 긍정적 마인드다. 사랑은 그리움, 이별, 고백 등의 테마가 아닌 ‘내 나이가 어때서’, ‘아직 청춘이니 열정적으로 사랑하자’, ‘다 잊고 놀아보자’라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사랑예찬 혹은 섹스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테마가 주를 이룬다. 그다음은 거의 주술에 가까운 긍정적인 마인드다. 세상만사는 이렇게 우릴 힘들게 하지만 우리는 힘내서 잘살아 보자는 식이다. 현실적인 가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평소에 이런 노래만 듣는 어른들이라면, 청년세대가 내는 목소리를 두고 징징대지 말라며 훈계할 법도 하다. 재밌는 포인트는 젊은 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유행어를 종종 가사에 넣는다는 점인데, 가족 단톡방에서 자식들에게 배웠을 법한 ‘불금’, ‘지못미’ 같은 슬랭을 쓰면 그 세대에서는 제법 힙해보이는 것 같기도.
결론적으로 성인가요 채널을 본 감상은 굉장히 촌스럽다는 거다. 아까도 말했듯, 이 분야의 방송본은 현재 기점으로 약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화질을 제외하고는 크게 변하지 않을 듯하고, 딱히 구분하기도 힘들 듯하다. 바로 채널을 돌려야 할 정도로 촌스러운 방송이지만, 트렌드, 힙, 차별화의 전쟁 속에서 잠시나마 뇌를 식힐 수 있지 않을까.
빛과 소금 3 ㅣ 밴드 ‘빛과 소금’의 세 번째 정규 앨범
90년대 초, 지금도 생소한 ‘퓨전 재즈’를 탐닉한 밴드, 빛과 소금의 세 번째 정규작 [빛과 소금 3]을 소개하고 싶다. 몇 년 전 MBC 예능 ‘나는 가수다’에서 적절한 평론으로 프로그램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빛과 소금의 한 축인 장기호(Kio), 그때만 해도 한물간 노년 가수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몰라봐도 한참을 몰라봤다. 음악 취향이란 게 생기면서 손발이 간지럽거나 눈물을 짜내는 음악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빈지노(Beenzino)의 말처럼 “발라드는 맨날 울고 앉아 있고”, 내 생각도 이와 일맥상통했다. 그 내용은 무시한 채 말랑하다 싶은 음악은 반사적으로 외면했다.
어쨌든 이런 안일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 건, 최근 바이닐을 소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막연하지만 국내에 명반이라고 부를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 호기심은 자연스레 장기호의 과거 행적을 좇게 했고, “샴푸의 요정”이나, “오래된 친구”와 같이 잘 알려진 곡 위주로 들었던 빛과 소금의 업적을 앨범 단위로 훑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늦게 발견한 거지. 1, 2, 4집에 비해 기억에 남는 히트곡이 적긴 하지만, [빛과 소금 3]은 분명 시대를 가르는 클래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바이닐을 구하기까지 총력을 기울였고, 운 좋게 달성했다. 특히 보사노바풍의 ‘조바심’은 기가 막힌다. 어찌나 재즈를 완벽하게 결합해놨는지. “아리랑”, “미안해, 용서해, 사랑해”, “진한 커피의 야상곡”, “슬픈 영화를 보고 나면” 등 아름다운 곡들이 수록된 [빛과 소금 3]을 들을 때면, 그동안 내가 음악에 관련된 글 서너 개 적으면서 생긴 자신감, 그 오만함을 반성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멍청한 내 모습을 거울로 비춘 거지.
큐레이션: 과감히 덜어내는 힘 ㅣ 경영/마케팅 관련 서적
큐레이션(Curation)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다소 힘이 들어간 단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은 주변에 널린, 실생활에서 접하기 쉬운 개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VISLA에 올라오는 기사, 애플뮤직에서 나오는 음악, 동네 야채가게에 진열된 야채까지. 본 책에는 21세기에서 통용되는 ‘큐레이션’의 개념과 비즈니스와의 연계를 다양한 주변 사례를 들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한다.
저자는 큐레이션은 ‘덜어내는 힘’이라고 표현한다. 애플뮤직의 뮤직 플레이리스트, 넷플릭스의 영화 추천 등 큐레이션의 사업화 과정을 보며 큐레이션과 미래의 인류는 더욱 가까이 맞닿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더욱이 VISLA 역시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 혹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중에서 괜찮은 걸 골라 ‘큐레이팅’하는 곳이기에 큐레이션이라는 말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콘텐츠를 다루는 직업을 택한 내 현재 모습과 전망에 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 책이다.
글 ㅣ VISLA MAGAZINE
커버 디자인 ㅣ 박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