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을 보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다. 미세먼지의 공포가 약 두 배 더 증가한 2017년의 봄. 나라는 어지럽고, 공기마저 탁한 지금, 잠시 눈을 돌려 육체와 정신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일상의 자극을 따라가 보자. 지난 한 달간 당신에게 영감을 선사한 건 무엇인가? 이번 월간 영감 3월호는 컨트리뷰터 최태순, 주가은, 심은보 그리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글을 건네준 오문택, 이윤정과 함께했다.
写ルンです1600 Hi·Speedㅣ일회용 카메라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가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특별한 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마치 한국에서 지내는 듯 돌아다니는 여행을 선호한다. 그래야 다른 문화 속에 녹아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창하게 말했지만, 마음 한쪽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다른 관광객과 다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다녀온 일본은 시작부터 카메라가 함께했다. 여행을 함께한 애인이 건네준 코닥 일회용 카메라. 20여 장의 필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닳았다. 일회용 카메라를 새로 하나 샀는데, 바로 이 ‘写ルンです1600 Hi·Speed’가 내 돈 주고 산 첫 번째 카메라다. 굳이 일본어로 적은 이유 역시 일본 편의점에서 샀기 때문. 새로운 카메라를 쥔 이후부터는 천천히 사진을 찍었다. 그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귀국하기 전 2개를 더 샀고, 한국에 도착해서 친구에게 충무로 사진관을 추천받아 두 개의 카메라를 현상했다. 현상한 사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내가 찍은 사진을 살펴봤다. 사진은 애인, 교통수단, 거리의 간판,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전시회 순서로 많았다. 내가 거리를 걸으며 집중하는 것들. 그중에서도 ‘일하는 사람’에게 시선이 꽂혔다. 전신주 꼭대기에서 전선을 만지는 인부부터 점심시간에 식사하러 나온 회사원, 나에게 음식을 만들어준 요리사와 가져다준 종업원까지 다양한 직종의 사람을 찍었다. ‘노동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상하게 ‘3D 업종’처럼 부정적인 단어에만 대입되는 노동자. ‘노동자’를 사진으로 쭉 나열해보니 이게 어딘지 갇혀있는 듯한 노동자라는 단어를 풀어낼 하나의 대안처럼 보였다.
현재 나머지 두 개의 일회용 카메라에는 나의 일상과 함께 또 다른 노동자의 사진이 담겨있다. 맨홀 뚜껑 앞의 누군가부터 클럽의 디제이까지, 돈을 벌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모든 이들을 담았다. 평생 생각해온 노동자라는 단어를 기록할 방법을 떠올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写ルンです1600 Hi·Speed. 영감보다는 영향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듯하지만, 단어가 뭐 그리 중요한가.
IKEA ㅣ 가구 브랜드
출구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장 같은 이케아 안 정확히 계산된 모델 룸에 들어가 있으면 어떤 불안을 느낀다. 누군가의 방에 허락 없이 침입한 기분이 들면서도 단지 전시된, 주인 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어딘지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전해진다.
조심스럽게 큐레이팅된 모델 룸은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까칠한 그래픽 디자이너의 방부터 막 자라나는 어린이의 방까지, 모든 사람을 위한 아늑한 공간이 꾸며져 있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너무 완벽하다는 것. 분명히 화목한 가정이 살고 있을 법한 방이지만, 너무나도 이상적인 탓에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난생처음으로 이케아를 방문한 날, 나는 모델 룸을 거닐면서 이 결벽증적인 허구의 인물들이 영위하는 생활을 엿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워낙 깔끔하지 못한 성격 탓일까. 사물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내 방과 겹쳐 보이며, ‘나도 이렇게 꾸며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익숙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년, 대학교에서 단편 소설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압도적인 경험을 토대로 짧은 이야기를 썼다. 이야기를 쓰기 전, 이케아를 조사하다가 2014년에 개장한 광명 이케아가 세계 최대 규모의 이케아라는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는 광명 이케아의 크기를 루브르 박물관에 비교했는데, 이 글을 보고 왠지 모르겠지만 ‘이케아’라는 곳을 이해했다. 이케아와 루브르 박물관은 들뜬 커플, 친구들, 가족으로 채워져 있고, 아름다운 물건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과거의 사물을 보며 감탄하는 박물관 관람객과 새로운 보금자리를 설계하며 미래를 그리는 이케아 손님은 묘하게 닮은 것이다.
박찬일 ㅣ 요리사
도통 멋진 어른을 찾기 힘든 요즘이다. 2017년 3월의 뉴스. 부조리함의 반복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고야 말았다. 시민의 힘으로 일궈낸 탄핵, 그 이후 정의와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로의 전환을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그 역할을 위임받을 차기 권력에 대한 불안한 기대감이 자리한다. 깊은 뿌리 속까지 병든 사회구조가 민주적 절차로 쟁취한 탄핵 인용을 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남는다.
어지러운 시국에 VISLA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어른이 한 명 있다. 뜻밖의 영역에서 이 복잡한 시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위로와 안심을 주는 어른, 요리사 박찬일이다. 7년의 기자 생활을 바탕으로 한국의 노포를 취재한 ‘백 년 식당’, 자유롭고 편한 일상의 술로 와인을 다룬 ‘보통 날의 와인’, 최근 출간한 에세이집 ‘미식가의 허기’ 등 10여 권에 가까운 책을 출판한 글 쓰는 요리사. 그는 이탈리아에서 직접 요리를 배우고 돌아온 뒤,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이탈리아 음식을 내는 요리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실 그가 내어준 음식보다는 글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예민한 주제를 주저하지 않는다. 미디어에 의해 신격화되는 ‘쉐프’의 그릇된 환상에 일침을 놓고, 한국 외식문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미슐랭 가이드 한국판을 비판한다. 농익은 경험과 판단력에서 잘 비려져 나온 글은 독자의 가치관 형성에 일조한다. 그뿐 아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보통의 삶 속 음식 문화, 계절의 흐름과 땅의 변화를 반영하는 재료에 관한 이야기 또한 전해 들을 수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자연을 기억하고 음식에 노동을 담아내는 이 땅의 요리사에게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박찬일 쉐프의 글에 영향받아 어느새 제철재료를 좇아 안줏거리를 찾아다니고, 서울 곳곳에 존재하는 노포의 정취를 안주 삼는, 미식가 같은 취미를 삶의 중요한 낙으로 여기게 되었다. 내가 막연하게 떠올렸던 어른의 삶이다. 일과 놀이의 균형, 올바른 정치의식,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세월의 흔적을 기억하고 보통의 삶을 존중하는 가치관. 그의 글에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 그동안 이탈리아 음식을 기반으로 한 요리를 선보였던 그가 얼마 전, 광화문에 돼지국밥을 주메뉴로 한 음식점 ‘광화문 국밥’을 열었다. 본인이 즐겨먹는 음식을 사람들과 맛있게 나눠 먹자는 취지로 준비한 평범한 식당이라고 하니 애주가들은 한번 들러봄직하다.
Ace 33 Hi Skateboard Trucks ㅣ 스케이트보드 트럭
얼마 전 스케이트보드 트럭 – 데크와 휠을 연결하는 파트 – 을 큰맘 먹고 교체했다. 스케이트보드 파트 중 가장 많은 무게를 차지하는 부분인 만큼 30대에 접어들면서 기존에 쓰던 인디 트럭(Indendent Trucks: 현재 가장 대중적인 트럭으로 묵직한 무게감이 특징)의 무게가 다소 버겁다는 걸 느꼈다. 20대 시절에는 그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노는 게 즐거웠던 터라 크게 체감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내 몸이 늙는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따라서 가벼운 트럭으로 알려진 에이스(Ace)사의 33 사이즈로 교체하고 나서 긴 겨울 탓에 한동안 떨어져 지내던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에이스 특유의 가벼운 무게는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내고, 스케이트보드를 탄다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내 감각을 되짚어 주었다. 또한, 부드러운 부싱(Bushing)을 기반으로 한 빠른 터닝감은 트릭이나 랜딩 시 몸이 보드에서 튕겨 나가지 않고, 더 유연하게 반응하도록 도와주었다.
어느 유명 스케이터는 스케이트보드 트럭이 인간의 척추와 같다고 했다. 척추는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에이스 트럭의 가벼운 무게와 유연함에 관한 이야기는 스케이트보드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한나가 엘리에게 아들 사무엘을 받들다’ㅣ헤르브란트 반 덴 데크하우트 1665년작 유화
구약 성경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한나, 그녀는 교역자 엘가나의 첫 부인이지만 아이를 가지지 못해 둘째 부인 브닌나에게 핍박받는다. 사무엘상 1장 5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말씀에 의하면 한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한 신체적 문제가 아니라 신께서 굳이 개입해 임신을 막은 것이다. 하지만 한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불임이 아닌 브닌나의 괴롭힘이다. 당시에 불임인 여자는 쓸모없었고, 또 저주받은 자로 찍혔다. 7절은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한나가 아이를 원해서라기보다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일종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결핍이 존재하며 무엇을 채우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한 달이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 혹시 나는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내가 먹어야 하는 건 정작 먹지 않고, 인스타그램처럼 쓸데없는 것만 섭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특정한 성격의 매체를 운영하면서 비판과 기대를 동시에 받는다. 나는 에디터라서 이렇게 생겨야 하고, 패션 업계인으로서 저렇게 입어야 하고, 소셜미디어 활동을 얼마만큼 해야 하고, 행사를 몇 번 정도 가야하는, 또 여자로서 이미 알게 모르게 한정된 활동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그런 일들. 신이 일부러 주지 않는 것 중에서 내가 정말 구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타인의 만족을 사려다 자신이 먼저 함몰할 수도 있다고 깨닫게 해준 한나. 일단은 그녀가 이번 달, 내 영감이다.
글 ㅣ VISLA Magazine, 오문택, 이윤정
커버 이미지 ㅣ 박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