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귀에 꼽고 다니던 이어폰을 잠시 벗어버리니 그간 보고 듣지 못했던 풍경이 찾아온다. 이어폰은 내가 살아가는 도시, 거리의 진실과 나를 유리하는 도구라는 생각까지 든다.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찾아오는 불청객. 그걸 영감이라 부르자. 하루에도 당신의 삶을 방문하는 숱한 영감을 저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을 고민하게 하는 새로운 영감은 무엇인지 떠올려보자. 이번 5월 영감은 ’96wave’를 운영하는 영상 디렉터 임동섭, 의류 브랜드 루스리스(Ruthless) 디렉터 이의연 그리고 회사원 서은해가 함께한다.
서적ㅣ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 해리 G. 프랭크퍼트 저
지금 나는 미래를 준비하고 쉴 새 없이 열심히 달려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 그 미래를 현재로 만들 수 있는 사람? 모르겠다. 그냥 겸손하게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나 보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 농담으로 “겸손해야 한다”, “지금에 만족하고, 절대 취하지 말자”라고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리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는 단계에 다다랐다.
평소 책을 자주 읽진 않는데. 어쩌다 보니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라는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저자는 개소리라는 게 왜 주목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정작 사태의 진상에 무관심한 우리의 현실이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들여다볼수록 신기한 것 투성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그 개소리가 우리의 아주 가까운 삶에도 녹아있다는 걸 알았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이미지 관리가 아닐까 싶다. 물론 살아가는 데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저 터치 두 번, 위아래로 넘기는 것에 불과한 행동에 집착하다 보니 더 근원적인 인스타그램 이전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문제는 그런 의문은 제쳐놓고 결국,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나도 그 세계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걸 주제로 이야기한 적 있다. 굳이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소셜 미디어에 토해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아군을 구축하는 것 마냥 의견이 다르면 ‘다른 쪽’의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다. 싸이월드 시절, 전국민이 중2병에 걸렸다며 우스갯소리로 떠들어댔는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연 나는 만족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쓸데없이 인터넷 감정에 시간 쏟지 말고 진실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을 쏟아야겠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이 소셜 미디어를 경험한 내 감상이다. 이 모든 개소리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영화ㅣ델마와 루이스(Thelma and Louise)
남편에게 억눌려 살던 ‘델마’와 반복된 웨이트리스 일로 삶에 염증을 느낀 ‘루이스’가 여행을 떠난다. 델마는 처음 느끼는 일탈의 감정에 홀려 다른 남자의 관심을 즐기게 된다. 여기서 이들의 여행이 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 남자가 델마를 성폭행하는데, 그가 따귀를 여러 번 날리며 델마를 무력화시킬 때쯤, 루이스가 총으로 남자를 위협한다. 델마를 구출해냈지만, 그 남자는 계속해서 더러운 말들을 내뱉고, 참지 못한 루이스는 우발적으로 총알을 날린다.
그렇게 그들에게 삶의 첫 변화가 온다. 자기방어에서 비롯된 사고였지만, 그 일을 계기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사건과 떨어지기 위해 멀리 갈수록 더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진짜’ 수배자가 되고 만다. 처음엔 화이트 셔츠를 비롯해 단정한 착장을 착용한 그들이지만, 점점 슬리브리스에 진, 매시 트럭 캡을 쓴 러프하고 자유분방한 외향으로 변한다. 또한, 총을 지니기만 했지 사용할 줄도 모르던 델마와 루이스는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에게 기죽지 않고 오히려 먼저 총을 들이대며 스스로를 지켜내는 여성으로 변한다.
도주가 절정을 이를 때쯤, 델마는 루이스에게 말한다.
“I guess I went a little crazy, huh?” / “나 좀 미쳤었지?”
“No. You’ve always been crazy. This is just the first chance you’ve had to really express yourself”.
/ “아니야. 넌 원래부터 미쳐있었어. 이번이 진정한 너 자신을 찾는 첫 번째 기회인 거야”.
이 영화는 우리가 그간 인식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감춰둔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경험으로 진짜 자신을 찾는다.
가끔 나도 모르는 내 행동에 놀랄 때가 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실수라 여기지만, 그 모습 또한 스스로 억누르던 자아인 것이다. 나는 걸 갱(Girl Gang)이란 타이틀을 앞세운 루스리스(Ruthless)라는 브랜드를 운영한다. 이 영화는 내 브랜드 시작과 닮았다. ‘루스리스’라는 단어를 브랜드 이름으로 지은 이유는 내게 ‘루스리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만 다짐하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보여주고 표현하면서 그 정체성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우리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또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 다른 한 가지 관전 포인트는 브래드 피트의 20대 때 모습이다. 상의를 벗은 그의 몸매는 정말이지 한껏 미소 짓게 한다니까?
폭력배ㅣ갱스터
근래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자연스레 영화 ‘대부(Godfather)’ 이야기가 나왔다. 입에서 대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기가 무섭게 남자 셋이 일일이 셀 수도 없는 대부의 명대사를 읊고 명장면을 묘사하는데, ‘허허, 역시 남자는 남자구나’라는 생각이 들던 걸. 평론가의 극찬이라던가, 20세기 최고의 영화라던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대부는 그 자체로 재미있다. 사실, 웬만한 갱스터 영화는 국적을 불문하고 전부 재미있다고 봐도 좋다. 어쨌든, 우리의 우상 갱스터가 등장하니까.
갱스터, 도대체 이 갱스터가 뭐길래 이토록 남자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지. 영화에서 묘사하는 갱스터는 그야말로 남자의 ‘멋’을 가득 모아낸 캐릭터다. 무쇠 힘줄 같은 뚝심, 동시에 거친 맹수처럼 터프하고 면도날만큼 날카로운 판단력, 여기에 뭇 여성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외모까지 겸비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반대로 생각하면, 다수의 남자가 그렇게 되지 못하기에 갱스터를 동경하는 게 아닌가.
아무튼,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까지 이 ‘갱스터’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는데, 지구 상 남자 대부분은 결국 갱스터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생각마저 들었다. 갱스터라는 말은 남자, 터프 따위의 단어를 단숨에 뭉개버리는 칭찬이다. 이 호칭이 남자가 지닐 수 있는 호칭 가운데 꽤 높은 티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갱스터가 되고 싶다.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 칼리토(Carlito’s Way)의 주인공 칼리토는 “갱생이 아니야, 지치는 거지.”라며 범죄로 얼룩진 자신의 인생사를 정리한다. 칼리토의 말처럼 갱스터가 되기란 역시나 녹록지 않은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갱스터가 되고 싶다.
교통수단ㅣ택시
힙스터 코스프레가 막을 내리는 주말 새벽, 쿨한 마인드는 미적지근해진 지 오래. 자신감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흐리멍덩한 육체는 빈 택시에 집중한다. 그렇게 남은 에너지를 택시를 잡는 데 쏟고 나서 뒷자리에 타고나면 자는 듯 마는 듯, 꺼지지도 켜지지도 않는 정신은 한산한 도로 위로 빠르게 달리는 택시와 반대로 점점 느려진다. 문득 전 날 밤에 나누던 재미있는 이야기에 히죽 웃기도 하고, 한심한 모습에 한숨을 크게 쉬기도 하고, 갑자기 누군가가 보고 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 택시 아저씨가 선곡한 카바레풍 음악이라도 흘러나온다면 이 병신 같은 순간은 완벽해진다. 새벽에 집으로 가는 택시는 막연하고 멍청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더없이 적절한 공간이다. 낯선 누군가와 텐션을 교류하면서 온다면 택시 안 찌든 담배 냄새와 퀴퀴한 무드까지도 반갑겠지만.
미용 제품ㅣ염색약
우리 동네에만 3군데의 드럭 스토어가 있다. 약국 화장품, 색조 메이크업 등 뷰티 아이템뿐만 아니라 생활용품, 주전부리까지 모두 구비한 드럭 스토어는 최근 몇 년간 거리에서 카페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곳이 되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뭐에 홀린 듯이 들어가 화장품이든 뭐든 잔뜩 사서 집에 도착하면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시발 비용’인가 싶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번 5월, 내 지갑을 탈탈 털어간 아이템은 셀프 염색약이다.
봄이라는 계절 특성상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심리도 있는 데다가 최근 머리를 짧게 잘라서 혼자 염색하기 편해진 이유가 컸다. 이번 달만 벌써 두 번이나 머리 색깔을 바꿨다. 재미있는 점은 같은 색이라도 제조사마다 그 색을 칭하는 이름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사실. 또한, 상품에 언급된 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 샘플이 앞에 달려있다거나, 염색 후 사진이 상자에 인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그 샘플이나 사진대로 염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느샌가 포장박스에 적힌 알 수 없는 색상명과 포토샵의 기운이 감도는 형형색색의 헤어 모델 사진을 보다 보면, 내 머리도 저렇게 될까 하는 기대치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내 경우에는 모발이 얇아 염색이 잘 되는 편이어서 이번 달에 시도한 에어리 애쉬, 메이플 브라운 모두 저렴한 가격에 집에서 손쉽게 꽤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다시 밝은 색의 머리카락을 짙은 갈색(통상 자연 갈색)으로 덮어버렸다. 한동안 머릿결을 위해 잠시 이 즐거움을 잊어야 한다.
글ㅣVISLA Magazine, 서은해, 이의연, 임동섭
커버 이미지ㅣ박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