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아비렉스, 팻팜, 엑코 등 다양한 힙합 브랜드가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열풍 이후 ‘복고’라는 이름하에 힙합패션의 유행이 시들해지고 ‘니뽄삘’, ‘유로삘’의 ‘느낌적인 느낌’을 가진 의복문화가 창궐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다변하는 유행에 빠르게 적응하길 원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국 스트릿 패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 시절 스마트, 쿨트랜스, 멘즈논노와 같은 잡지를 뒤적거리며 거리의 유행을 쫓았다면 지금은 맵스, 크래커 등 다양한 국내 잡지가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문화의 흐름에 파동을 더한 주역들이 있다면 바로 국내 브랜드들이다. 많은 풍파를 거쳐 현재까지 살아남은 브랜드가 있는가하면 지금은 기억 어느 한 구석 숨어 있다가 이 글을 읽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브랜드가 있을 것이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후자의 이야기다.
1. BHXXL
부르마블(Burumarbul), 혹은 부르마블 하우스(Burumarbul House)라고 불렸던 이 브랜드는 동명 크루의 팀기어로 시작되었다. 캐주얼보다는 조금 더 어센틱한 이미지에 가까웠던 브랜드로서 200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 초반까지 티셔츠 위주의 제품군을 발매했다. 오비베어스와 랄프로렌의 곰을 패러디한 재치 넘치는 디자인은 물론, 오리지널한 디자인까지 함께 아우르는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브랜드로 기억한다. 후반기에는 360sounds의 멤버인 Make-1에 의해 디렉팅되어 왔다. 이후 샵 휴먼트리와의 협업을 통해 ‘Original Cut’이라는 이름으로 발매가 된 후 현재는 그 소식이 끊겨있는 상태이다.
2. Giant Bastard
2000년대 초 가장 신선했던 서울의 움직임 중 하나를 꼽자면 아무래도 Afroking 파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아프로킹의 웹사이트를 드나들며 파티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갈망했고, 자이언트 바스타드(Giant Bastard)라는 웹사이트에서 구매를 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자이언트 바스타드는 단순히 아프로킹 티셔츠만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었다. 흡사 Imaginary Foundation, 혹은 Granif처럼 다양하고 특색있는 디자인이 새겨진 티셔츠가 무궁무진했으며 그 질 또한 유수의 티셔츠 브랜드와 견줄만했다. 어느 순간부터 웹사이트의 문이 닫혔으며 당시 자이언트 바스타드를 이끌던 사장님은 현재 Mick Jones’s Pizza의 사장님이 되어있다.
3. Zzubo
거리를 지나면 바지 밖으로 빼낸 신발의 혀 길이를 서로 경쟁하던 때가 있었다. Nike SB 슈즈 특유의 통통한 혀와 함께 작은 사이즈의 신발을 발을 무리하게 구겨 넣어 신던 그 시절의 한 가운데 쯔보(Zzubo)가 탄생했다. 당시 쯔보의 이니셜 Z를 형상화 시킨 로고 디자인과 함께 모자와 후드티셔츠, 스타디움 재킷까지 다양한 제품군을 필두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는 신발에까지 손을 뻗쳐 여러 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스트릿 패션이 살짝 시들해질 때 쯤 디자인을 좀 더 캐주얼한 방향으로 옮겼지만 타 브랜드들과 큰 차별점을 가지지 못해 인기를 지속하지 못했고 지금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브랜드가 되었다.
4. Bastard-XXX
바스타드-XXX(Bastard-XXX)는 50년대 핫 로드와 올드스쿨 타투를 중심으로 멋진 그래픽을 다양하게 보여준 도메스틱 브랜드다. 당시 그 어떤 브랜드들에 비해 남자 냄새가 물씬 나는 의류군을 발매했었다. 지금 의류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아메리칸 캐주얼, 속칭 ‘아메카지’를 충실하게 재현하여 당시로서 약간은 생소했던 핫로드 문화를 다방면으로 알렸다. 올드스쿨 그래픽의 티셔츠와 좋은 질의 단단한 데님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는데 특히 데님 뒷 포켓의 두꺼운 스티치가 바스타드가 얼마나 선이 굵은 브랜드였는지는 잘 설명해주는 예다. 비슷한 뜻을 가진 선랫 타투, 도프닉과 같은 브랜드와도 협업을 진행시켰고 휴먼트리의 자브랜드 B.A와도 함께 코치자켓을 발매하는 등 여러 가지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개인적으로 너무 이른 시기에 시작되어 빛을 보지 못한 브랜드라고 생각이 된다. 외려 지금 나왔다면 더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아쉬운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Bastard-XXX다.
5. Wyfluence.
국내 유일무이의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Wyfluence’를 기억하는가. 현 Daily Grind의 디렉터인 이원석(1slugg)과 보더 김용민에 의해 시작된 위플루언스(이하 위플)은 2000년대 초반 국내의 느낌 있는 보더들이 모두 모인 스케이트보드 팀이자 스케이트보드 브랜드였다. 의류제품들과 보드 데크 제품들을 만나 볼 수 있었는데 데크 각각 다른 디자이너들의 고유한 그래픽을 삽입해 신선한 느낌이 충만한 브랜드였다. 무엇보다 위플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가격이 아니었나 싶다. 열심히 스케이트보딩을 하다보면 제아무리 단단한 데크라도 상하거나 부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위플은 6만원을 넘지 않는 합리적인 가격의 데크를 발매해 스케이터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제품을 제작,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영상을 제작하며 스케이트보드 씬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던 브랜드였지만 어느 순간 소식이 들리지 않은 채 명맥이 끊겨버렸다.
이상으로 그저 추억으로만 기억되기엔 아까운, 지금은 자취를 감춘 도메스틱 브랜드들을 알아봤다. 이번 기사를 쓰며 느낀 것은 위처럼 아쉽게 사라져버린 브랜드들도 많지만 반대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한 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더욱 큰 발걸음을 하고 있는 브랜드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 유럽 브랜드들로 자신을 꾸몄던 사람들이 지금은 국내의 브랜드에 대해 관심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에게 하나의 선택안이 더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예전의 거리 감성이 충만했던 브랜드들보다 현재의 유행에 맞춘 캐주얼한 브랜드들이 많이 생겨나고 득세하고 있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의 발전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해외 어느 매장 쇼윈도에서 국내 브랜드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