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을 떠올릴 때면 항상 함께 연상되는 낱말이 있다. 크리스마스, 귤, 재즈, 내복, 코타츠, 편의점 호빵 등등. 이 단어들만 봐도 알 수 있듯, 겨울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집순이와 집돌이의 계절이다.
집에만 박혀있는 이들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을 하나 꼽아보자면, 바로 유튜브(Youtube)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겨울을 유튜브의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억지스럽다고? 정확하다. 당신이 매년 겨울을 떠올릴 때마다 “MY YOUTUBE LIBRARY”를 떠올렸으면 하는 마음에 억지를 부렸다.
지난달, 이철빈(Visbin) 에디터가 추천한 12월의 타자는 영상 제작자 멜트미러(Meltmirror)다. 그는 최근 밴드 새소년(SE SO NEON)의 “고백(go back)”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으며, 이외에도 isvn이라는 팀을 꾸려 게임을 만들며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하단은 그가 직접 보내온 소개 글이다. 장황한 설명보다 이 글이 멜트미러를 더욱 자세히 그려낼 수 있을 것:
“생각과 작업의 속도가 달라 오랜 시간 끌어오던 회화 작업을 그만두었다. 생각대로 편집하고 빠르게 확인 가능한 영상이 효율적이라 생각해 2014년부터 영상을 만들었고, 이후 2019년으로 넘어와서는 빠른 시일안에 영상을 그만두기 위해 게임을 제작하고 있다.
도가 지나친 사람들이 서울 이곳저곳에 휘갈겨놓은 문장에 관심이 있고, 수집한다.
2020년에는 못 지킬 약속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목표다”.
Meltmirror의 “가장 먼저 떠오른 5개의 영상”
멜트미러는 12월의 “MY YOUTUBE LIBRARY”를 부탁한다는 필자의 의뢰를 받은 후 가장 먼저 떠오른 5편의 영상을 보내왔다. 공통된 테마나 특정한 맥락에 기대는 영상은 아니지만, 마치 습관이나 버릇처럼 떠올렸다는 점에서 2019년 12월의 그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설명.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멜트미러는 과연 무엇을 감상하고, 상상하는지 그의 유튜브 라이브러리를 확인해보도록 하자.
1) “Lanark Artefax – Voices Near the Hypocentre (Hayden Martin 감독)”
영상 길이: 6분 2초
채널: LANARK ARTEFAX
비디오 디렉터 헤이든 마틴(Hayden Martin)이 만든 뮤직비디오. “Voices Near the Hypocentre”는 내가 애정하는 그래픽의 무덤이다.
“Voices Near the Hypocentre”는 마치 현실의 상위호환적 반영이야말로 올바른 길인 듯 여겨지는 3D 그래픽스(3D Graphics)의 암묵적인 합의 속에서 이것은 결국 계산된 시뮬레이션이자 폴리곤 덩어리의 차가운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고, 작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무수한 x, y, z 좌표계를 나타내고야 마는 종류의 작업이다.
AI로 구축된 정확한 데이터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듯 등장하는 이곳의 거대한 생태계는 사실 철저히 인간적인 의도 속에서 나열된 페이크 AI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몇 번을 돌려봐도 즐겁다. 내게 큰 기쁨을 준다.
2) “Eulers Disc”
영상 길이: 2분 11초
채널: Grand Illusions
“Grand Illusions”는 유명한 장난감 수집가 팀 로웻(Tim Rowett)이 2008년부터 이어온 유튜브 채널이다. 그는 50년 동안 수집해온 약 25,000점의 특이한 메커니즘을 지닌 장난감을 리뷰하며 감상자에게 말 그대로 놀라운 환상을 전해준다.
그가 하는 일은 마술이 아니다. 절묘한 트릭을 고안해 마술을 마법으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영상에는 매끄럽게 구성된 컷 편집도, 현란한 VFX도 없다. 팀 로웻은 그저 2분에서 10분 사이, 롱 테이크로 촬영된 화면 속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장난감 메커니즘의 시작과 끝을 관조적인 태도로 담아낸다. 자신의 손으로 심어낸 운동감이 시간을 통해 끝없이 잦아들며 완벽히 정지하고 종료되는 순간까지 그는 여유 있게 바라본다.
그저 시작과 끝을 관조할 뿐인데, 현실을 잠시 떠난 듯 집중하게 되고 순간을 음미하게 된다. 마치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Edward Yang)이 말했던 바로 그 ‘일상의 음미’처럼 말이다.
특히 위 영상, “오일러의 디스크(Eulers Disc)”는 2분 11초라는 짧은 시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험 중 하나라고 단언하고 싶다.
3) “인조곤충 버그파이터”
영상 길이: 24분 10초
채널: 지키즈TV- G Kids TV
견고한 산업과 시스템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상식 밖의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좋아한다. “인조곤충 버그파이터”는 감독과 작화는 한국에서, 시나리오는 일본에서 맡아 2006년 12월부터 방영되었던 듀얼 파이트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일본의 완구스폰서 타카라 토미(Takara Tomy)가 일찌감치 자국 내 판촉을 향한 기대를 저버린 덕분에 제작진은 가냘픈 예산과, 최고의 자유도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고 “매회가 최종회! 승부는 말싸움! 시리즈 도중에 지구 멸망!”이라는 놀라운 컨셉 아래에서 오로지 초 전개로 일관하는 컬트적인 작품이 탄생한다(무사시 건도와는 다르다 무사시 건도와는…).
대망의 버그파이터 결승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암흑보스 다크맨. 그런데 가면 뒤에 숨겨진 다크맨의 진짜 정체는 사실 주인공의 자상한 아버지였다. 선/악의 정점에 선 부자의 엇갈린 운명. 둘은 지구를 폭발시킬 기세로 대결을 벌이는데…(정말 지구가 폭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승리의 여신은 주인공의 손을 들어주고 다크맨은 “엄마에겐 비밀로 하라”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듯 경기장을 퇴장한다. 스타디움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주인공과 동료들. 그들의 앞길엔 오직 햇살만이 가득하다.
미칠듯이 뻔한 전개와 구질구질한 엔딩 아니냐고?
놀랍게도 이것은 최종화가 아닌, 난데없이 달려드는 1화의 내러티브다(총52부작). 최종화로 시작하는 초 전개 애니메이션 버그파이터. 2화는 더 재미있습니다(급 영업으로 마무리).
4) “Picnic(Paul Vester 단편)”
영상 길이: 3분 33초
채널: CdotWizzle
직업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영상을 감상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기록하고, 수집한다. 수집할 당시엔 최대치의 감각으로 녹슬지 않을 명작 리스트를 만들었다는 기쁨에 안도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대다수의 작업을 가뿐히 앞서나가며 이들을 기술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진부하고 서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종종 시대의 흐름 따위는 무시한 듯 언제 어디서나 고유한 독창성을 유지하는 작업도 존재하는데, 지금 소개하는 “피크닉(PICNIC)” 역시 그런 작업 중 하나다.
고전적 내러티브는 물론,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마저 완벽히 소거해버린 듯 감상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이 1988년의 단편은 특유의 어두운 무드를 중심으로 파편적인 사건과 사고를 도형과 함께 짓눌러 버리거나 흩뿌리며 반복적으로 달아난다. 느슨한 컷의 논리 속에서 교차하는 비극 ─ 폭력 그 자체인 ─ 과 유머의 이미지는 각자의 경계를 선명하게 유지하며 “피크닉”만의 고유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 정서는 마치 해답 없이 설계된 수수께끼처럼 감상자를 끝없는 실패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비극이지만, 동시에 영상의 미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폴 베스터(Paul Vester)의 다른 작업들이 궁금하다면 그의 공식 비메오 채널을 추천한다.
5) “‘라스트 오브 어스’ 이렇게 제작됐다 – 라스트 오브 어스 2 필구다[PS4]”
영상 길이: 1시간 2분 38초
채널: 캡틴라미[captain ramy]
메이킹을 감상하는 것이 좋다. 전문성을 가진 수많은 인원들이 1~2년, 길게는 4~5년씩 갖은 고생을 해가며 시시때때로 위기를 맞이하고, 새로운 기술을 고안하고 적용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그런 서사가 좋다. 배우들이 모션 캡처를 위해 우스꽝스러운 타이즈를 입고 연기에 몰입하는 모습은 단연 최고다. 현장 멀티앵글 카메라의 입체감, 그리고 실제 게임과 동일한 동선을 사용하는 메인 카메라의 기묘한 운동감까지…
결정적으로 무례하지 않지만 꽤나 굳건한 총괄 디렉터가 등장해서 현장을 유연하게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는 거의 황홀한 기분까지 느낀다. 너티 독(Naughty Dog)은 게임도 잘 만들지만 이런 메이킹 역시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 아마 라오어2(Last of Us 2)가 발매되면 그 영상이 최고의 메이킹 영상이 되겠지만 아직은 라오어1 메이킹이 최고다. 완성된 음악을 모니터링하며, 눈물이 날 것 같으니 괜히 쑥스러운 척 구스타보 산타올라야(Gustavo Santaolalla)를 툭 밀치는 닐 드럭만(Neil Druckmann)의 모습을 또 어디서 보겠는가.
마지막으로, 멜트미러가 “MY YOUTUBE LIBRARY”의 다음 타자로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음악가 HWI의 리스트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