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희망과 다짐으로 가득 찬 새해 분위기도 잠시, 2020년은 연초부터 녹록지 않은 분위기다. 호주 산불과 필리핀 화산 폭발 소식이 우리 기억에서 서서히 잊힐 무렵,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메가톤급 재앙이 지구촌을 덮친 것이다. 이웃과의 따뜻한 인사는 헬조선식 ‘팔꿈치 비비기’로 대체되었고, 번개장터에는 ‘우한 폐렴 기도’가 검색어 순위 1위를 장식했다.
이렇게 세상이 점점 더 미쳐 돌아갈 수록, 우리는 자연스레 온라인 세상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번 달 우리에게 새로운 유튜브 세상을 소개할 주인공은 PIC 그룹 소속 3D 애니메이션 디렉터 ‘Copic’이다. 다소 낯선 예명이지만, 그는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아티스트다. 본명은 노상호. 2D 작업을 진행할 때는 ‘nemonannet’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지난 7년간 ‘Copic’은 가상 환경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를 수집한 뒤, 그것을 ‘먹지’에 덧대어 그리며 가상환경과 쏟아지는 이미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가 3D 모델링 작업을 시작한 것은 불과 1년 전. 3D 아트워크에 관심이 생긴 그는 3D 모델링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완전히 새로운 영상을 만드는 실험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는 최근 ‘과거에 상상했던 미래’라는 뜻의 ‘Paleo future’를 주제로 음악가들과 함께 ’70, 80년대에 상상했지만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제작했다.
Copic의 “작업을 해야 한다고 느낄 때 억지로 보는 영상들”
2D와 3D를 오가며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Copic에게 유튜브는 애증의 대상이다.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Copic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AI인지 뭔지에 의해 추천되는 나의 유튜브 첫 화면은 솔직히 매우 더럽다. 흘러간 유행가, 잘 부르지도 못 부르지도 않는 라이브 영상, 어떻게 시작해도 딘의 “인스타그램”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음악 자동추천목록, 유시민과 홍준표, 주식투자 호갱 이야기, 부동산값 폭등 이야기… 너무 자극적이고 너무 싫지만, 자꾸 보게 되는 길티플레져 모음집이기도 한 나의 유튜브 목록을 공개할까 하다가, 그 누구도 궁금해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한다.
쓸모 없는 것들이 넘쳐나는 유튜브에서 그나마 영양가 있게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검색을 시도할 때뿐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유튜브 시청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함에도 ‘멋지고 좋은 것’ 은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으면 단 한 개도 보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즐기고 있다고는 못하겠고, 억지로라도 ‘멋진 것’을 내 눈에 주입해야 한다고 느낄 때 보는 영상들의 목록을 작성해보면 어떨까 한다”.
1) “HAPPY99 SPRING/SUMMER 2020 RUNWAY PRESENTATION”
영상 길이: 5분 51초
채널: happy99
몇 년 전부터 가상 신발을 만들어왔던 가상 패션 브랜드 ‘HAPPY99’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프리젠테이션 영상이다.
HAPPY99는 모델/3D모델러/VFX 엔지니어 등이 모여 만든 그룹이다. 가상신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실재하지 않는 ‘가상’ 신발인데,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신발을 3D로 제작하고 이를 실제 모델과 합성하여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브랜드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포스팅은 인스타그램에서 뜨거운 반응 얻었고, 2019년에는 가상 의류까지 제작하게 되었다. 영상에 나오는 옷 중 간단한 건 실제 제작하여 웹사이트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가상으로 물건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현실로 오는 흐름 자체가 흥미로워서 늘 체크하고 있는 그룹이다.
2) “BBB_ Look At Me / Official Video”
영상 길이 : 4분 6초
채널: BBB_
이것저것 하는 프로젝트 그룹 BBB의 음악을 알렉산더 라단(Alexandar Radan)이 디렉팅한 영상. BBB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알렉산더 라단의 영상을 좋아하는데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그렇지만 “BBB_” 채널의 BBB 활동 영상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으니 추천…). 게임에서 가지고 온 소스를 저화질로 활용하여 묘하게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화면을 잘 만들어내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고 하염없이 바라보기 좋은 영상.
3) “Gaika’s gothic future reality “Cathedrals””
영상 길이: 8분 7초
채널: NOWNESS
릭 파린(Rick Farin)을 처음 접한 건 브랜드 샌더주(Xander Zhou)의 브랜드 필름 때문이었는데, 3D 아트워크만이 낼 수 있는 미감과 물성을 매우 잘 활용하는 디렉터라고 생각한다. 해당 작품은 릭 파린의 초기작을 디벨롭한 작업으로 알고 있다. 예상하건데 초기 작업 시기에는 자기 증명 의지가 강한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최근작보다 더 좋은 밀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내용보다는 화면을 장악하는 무드를 매우 효과적으로 짜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주 보는 영상이다.
4) “MAC DEMARCO – HERE COMES THE COWBOY”
영상 길이: 3분
채널: Mac Demarco
이상하고 괴팍하지만(그리고 어떤 이들에겐 불쾌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특정 무드에 취해 버리는 것을 요즘 고민하는 중인데, 이 영상이 나에게 딱 그렇다. 맥 드마르코(Mac Demarco)라는 아티스트 자체도 그런 편이라서 좋은 시너지가 나는 것 같기도하고… 사실 맥 드마르코 보다 이 영상의 디렉터인 콜 쿠쉬(Cole Kush)를 디깅하다가 보게 된 영상인데, 콜 쿠쉬의 작업 중에서도 가장 무드가 좋은 작업물인 것 같다. 콜 쿠쉬는 아주 예전부터 3D 소스들을 모아 작업해온 아티스트로, 유튜브 채널 ‘Cole Kush’에서 그의 영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5) “AKIRA, Only Bike Scenes”
영상 길이: 13분 42초
채널: Akira Club
버블경제 시대의 재팬 애니메이션 클립을 찾아보는 것을 즐기는데, 그중에서도 공각기동대와 더불어 최고의 클립이다. 이미 너무 레전더리한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놀랍고, 좋은 연출과 작화라고 생각해 애니메이션 작업할 때마다 보는 영상. 보통 작업 시작할 때는 잘 보지 않고, 작업을 끝내놓고 내 작업과 완성도 비교를 위해 보는 편이다. 물론 늘 절망하고 만다.
이 채널의 이름은 ‘Akira club’ 이지만, 실상은 “이니셜 D(Initial D)”나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 등 채널 주인의 덕질 콘텐츠 모음집 채널이다. GTA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아이템을 만들어놓고 플레이하는 영상이라든지… 매우 루즈하고 제멋대로 운영되고 있는데 ‘Akira Club’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다.
6) “[.pic x Maalib&WRKMS] Bean farm – All Day (Feat. Sogumm)”
영상 길이: 2분 20초
채널: pic tube
작업을 시작하려면 내 작업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Paleo future’를 주제로 공개했던 3개의 영상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선보인 영상이다. 만들 때는 늘 절망하다가(물론 끝내고 아키라 무비 클립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참 지나서 내 작업물을 다시 보면 ‘어 그래도 생각보단 괜찮은데?’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나 자신을 토닥여주는 의미에서 한 번씩 보게 되는 영상…
마지막으로, Copic이 “MY YOUTUBE LIBRARY”의 다음 타자로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늘 내 마음에 꼬옥 맞는 음악과 작업물을 선보이는 최영(@Yeongdie). 그녀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하다. 왠지 엄청나게 많은, 이상하고 좋은 유튜브 목록을 가지고 있을 것 같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