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ionne [Inner Dialogue] Liner Note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는 자신의 오가닉 뮤직 프로젝트 에스피오네(espionne)로 코스메틱 브랜드 빌리프(Belif)의 사운드 트랙 시리즈,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Belif Music Treatment)’를 제작한다. 햇수로만 무려 10년째. 2월 28일에는 [Inner Dialogue]로 약 1년 반 만에 11번째 시리즈로 돌아왔다. 타이틀의 ‘Inner Dialogue’, 즉 ‘내면의 대화’는 빌리프의 10주년을 축하하며 브랜드가 지켜온 전통과 코스메틱 제품의 기능성을 의미한다.

맑고 청량한 사운드 트랙 [Inner Dialogue]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귀를 열어둔 채 상상의 여름을 그려야 제맛일 것. 그러나 두 눈으로 먼저 확인할 게 있다. 바로 하단에 첨부된 [Inner Dialogue]의 라이너 노트. 에스피오네가 직접 작성한 작업기로 녹음 당시 현장을 담은 글이다. [Inner Dialogue]의 여섯 트랙과 함께 따라가 보자.


espionne – [Inner Dialogue] Liner Note

올해로 10년간 이어진 음악 프로젝트가 됐다. 특정 브랜드와 제품에 라이브러리 뮤직의 콘셉트를 도입한다는 발상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10년 동안 다양한 연주자와의 협력으로 만든 음악은 과정과 결과 모두 특별한 것이 되었다. 전자악기나 컴퓨터 시퀀싱의 도움 없이 고전적인 방식으로 곡을 쓰고 녹음하는 프로젝트이기에 연주자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쌓아 올린 협력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10년간 다양한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이제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나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함께한 다수의 연주자나 디자이너에게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도 언제나 믿고 맡겨온 빌리프 측에도 감사하는바. 돌이켜보면 지난 10년간 이 프로젝트를 작업하면서 정말 다양한 뒷이야기들이 있었는데 한 번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 기회가 ━ 사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음 ━ 없었다. 이번에는 10주년을 맞아 곡을 쓰는 시점부터 나의 노트에 기록된 작업일지를 정리해보았다 ━대다수가 TMI긴 하지만 ━ .

1. “Birthday Song” (2:30)

10주년을 맞이하는 만큼 특별한 생일 축하곡이 필요했다. 울리쳐(Wurlitzer) 일렉트릭 피아노로 만든 리프로 시작해서 메이저로 밝게 바뀌는 B 파트로 방향을 잡았고, 삼바 소울로 리듬 파트를 편곡했다. 리듬 섹션은 밴드 까데호(Cadejo)가 [Timeless]에 이어 연주해주었다. 리듬 섹션의 앙상블이 그 나라의 음악 퀄리티를 좌우한다는 신념이 있는 나에게 까데호는 매우 자랑스러운 밴드다. 아지무치(Azymuth)가 수많은 브라질 MPB 명반에서 리듬 섹션으로 활약했듯이 이들의 앞날도 더욱 기대해본다. 김재호 군의 베이스는 사소한 노테이션도 까다롭게 주문하는 나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김다빈 군은 정말 잘생겼고 드럼도 잘 치고… 이태훈 군은 나의 노예가 된 지 10년 차… 콴돌(Quandol) 군의 퍼커션도 이제는 거의 자동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패턴 지정만 해주면 자동 재생되는 악기처럼 그는 한 시간 만에 모든 녹음을 마치고 떠났다. 리듬 구성의 핵심은 의외로 셰이커에 있는데 두 개의 서로 다른 셰이커를 녹음해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가벼운 쪽을 골랐다. 후반의 윤석철 솔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간이다. 살짝 퍼즈 걸린 톤으로 사뿐사뿐 밟아나가는 플레이는 정확히 울리쳐라는 악기를 가장 잘 표현해내는 임프로바이즈(improvise)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캣(Scat) 파트를 위해 연진 씨에게 데모를 보냈다. 연진 씨는 결혼 준비로 한창 바쁠 때임에도 시간을 쪼개어 곡을 완성해주었다.

2. “Inner Dialogue” (1:40)

소프트 팝, 흔히 이야기하는 60년대 웨스트코스트 버블 검 팝 사운드를 담아내고 싶었는데 인트로의 기타 멜로디 라인은 이를 다분히 의식해서 두 대의 기타가 서로 교차하는 연주로 구성했다. ‘Inner Dialogue’라는 타이틀은 이 앨범의 메인 테마. 빌리프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뭐랄까… ‘내면과의 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광고나 비주얼을 내세우지 않고 제품 자체의 기능과 효용에 집중하는 브랜드의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테마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콘셉트를 프로젝트의 디자이너인 이재민 디자이너에게도 전달했고, ‘액자식 구성’과 같은 기하학적인 패턴과 색의 반복, 형식이 있으면서도, 자유도가 높은 레이아웃을 상의했다. 그리고 뭐 바로 며칠 만에 멋진 커버가 탄생… 다시 한번 연진 씨의 보컬은 언제 어떤 곡이라도 뿌려놓으면 특유의 무드가 살아나는데, 따지고 보면 가장 오랫동안 많이 작업한 보컬리스트가 바로 연진 씨기도 하다.  

3. “reflexão” (3:33)

연주 음악이라서 원래 빌리프 앨범에는 보컬이 들어가도 가사가 없다 ━ 가사가 포함된 곡이 딱 하나 있었다 ━ . 대신에 보컬리스트에게 스캣 싱잉을 부탁하여 악기처럼 사용하는 것도 라이브러리 뮤직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악기로서의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바로 이 곡이 그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디 디 브릿지워터(Dee Dee Bridgewater)가 떠오르는 수민(SUMIN)의 놀라운 스캣 퍼포먼스! 놀라운 재능을 끼얹어서 만들어진 이 트랙은 사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독특한 곡이 되었다. 이 트랙의 제목은 “reflexão”이고 그것은 반사(reflection) 혹은 명상할 때의 사고, 투영, 뭐 이런 것을 의미하는데, 원래는 ‘거울의 테마’라는 유치한 제목이었다 ━ 물론 지금 제목도 그리 멋지진 않다…━ . 화장품이기에 항상 이와 관련된 오브제로 뭐랄까 수분, 피부, 물, 허브, 햇빛, 그림자, 이런 것들을 녹여내는데 그중에서도 거울이라는 테마에 꽂혀서 만들어 본 곡인 셈이다. 베이스라인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두 개의 악기로 연주했는데 베이스 기타와 펜더 로즈(Rhodes)로 구성했다. 녹음실에 있는 펜더 로즈가 건반 상태가 약간 안 좋아서 베이스 노트 쪽의 키 두어 개가 자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게 나는 바람에 ‘건반이 멀쩡한’ 조성으로 연주하기 위해 키도 바꾸고 패턴도 바꿨다.

4. “Boom!” (1:45)

기타로 쓴 곡이다. 데모는 기타를 두 번 더빙해서 완성했는데 본 녹음에서 기타를 친 이태훈 군이 “오 이거 형이 친 거 맞아요?”라고 해서 으쓱했다 ━ 사실 데모는 대충 쳐놓고 엄청 편집한 거임…━ . 사실 빌리프 작업을 하는 동안에만 약간 기타 실력이 늘었다가 다시 사라지곤 한다. 테마의 기타 아티큘레이션은 의도했다기보다는 내가 치기 편한 포지션으로 잡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고 A 파트 이후에 전조되어 등장하는 파트는 원래는 더 길고 장황한데 이 곡이 영상에 쓰여야 하는 곡인 관계로 짧게 짧게 쪼개고 붙여서 전환했다. 이태훈 군의 기타는 뭔가 한이 담겨 있어서 다이나믹이 센 편. 그래서 본 녹음 들어가기 전에 ‘이 곡은 까를로스 라이라(Carlos Lyra)처럼 쳐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매우 정갈하고, 단정하게 끝내버렸다. 원래는 베이스와 드럼 없이 기타로만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남길래 녹음 당일에 후딱 나머지 파트를 입 편곡으로 설명해서 트리오로 완성해보았다. 한 가지, 드럼 마이킹에 실수가… 아니 비밀이 하나 있는데 킥 드럼용 마이크를 이상한 ━ 킥과 룸 마이크 사이 ━ 위치에 둔 것이다! 킥, 스네어, 오버헤드, 룸 마이크만을 사용해 드럼 녹음을 하기에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 봐도 좋은데 이미 드럼 라인은 완벽하게 녹음되었고 혹시나 해서 오버헤드 마이크 소스만 빼고 들으니 웬걸, 더 소박하고 명료한 소리가 되어 있었다. 스네어의 위상만 고치고 그대로 마무리. 항상 드럼은 마이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역시 빌리프 프로젝트의 특징인데, 어떨 때는 원 마이크 세팅으로 끝냈던 적도 있다.

세 악기의 볼륨 밸런스가 너무나 완벽했기에 믹스를 아예 안 하고 투 트랙으로 롤랜드 RE-501에 ━ 모노니까 두 번 ━ 통과시켜 토털 컴프레션으로 끝냈다. 이런 경우에는 ‘이래도 돼?’라는 의문을 품는 것보다는 강단 있게 밀어붙이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과감함을 스스로 칭찬하는 편이 낫다.

5. “Easy Moment” (2:15)

순수하게 오르간 톤을 위한 테마를 하나 남기고 싶었기에 오르간으로 먼저 테마를 구성했다. 우리 스튜디오의 자랑 중 하나로, 약 15년 전에 청주의 한 교회에서 구해온 해먼드 C3(다리가 뚫린 것이 B3 모델, 교회용으로 다리가 막힌 것이 C3)에는 로터리 레슬리(Leslie) 스피커가 아닌 50년대 해먼드 오리지널 스피커가 붙어 있는데, 내가 60년대 초반 브라질 뮤지디스크(Musidisc) 레이블의 ━ 지토 리기(Zito Righi)나 살빙요 세자르(Sylvio Cesar) 초기작들 ━ 아련한 오르간 톤을 좋아하기에 그걸 흉내 내려고 일부러 레슬리로 안 바꾸고 썼다. 그런데 사실 그건 나의 뇌피셜이었고 실제로 그 시절에 썼던 오르간은 볼드윈 계열이라고 한다…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는 실제 오르간을 사용하는 레코딩이 거의 없는데,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실제 해먼드 오르간은 각 건반마다 별도의 회로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건 하나의 악기라기보다는 건반 숫자만큼의 악기 집합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무수히 많은 진공관들의 특징도 반영되고 우드 캐비넷의 공명까지도 소리에 꽤 큰 영향을 미치고, 특히나 건반의 무게감이라든지 건반을 눌렀다가 뗄 때의 키 클릭 사운드는 매우 변화무쌍해서 연주자의 프레이징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오르간을 연주한 윤석철 군은 특히 오르간 음악을 좋아하고 특유의 브라질 – 오르간 재즈의 주법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데, 건반을 누르는 속도뿐 아니라 건반에서 손을 떼는 액션 ━ 벨로시티가 없는 악기라 표현이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 ━ 까지 완벽히 컨트롤해서 정말 ‘살아서 날뛰는 듯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6. “Starshine” (1:40)

반복되는 테마에 스윙이나 오드미터… 잘 살펴보면 빌리프 앨범마다 하나씩 꼭 들어가 있다. 영상이나 매장의 시그널, 배경음악용으로 쓰임새가 많기 때문이다. ‘자장가 모먼트’라고 부르는 순간인데, 계속 반복시킬 수 있는 구성이고 많이 들으면 졸리다. 울리쳐 일렉트릭 피아노에 딜레이 페달을 걸어 연주한 윤석철의 임프로바이즈가 한껏 더 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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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황선웅
라이너 노트 / 사진 │ espio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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