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카페 겸 밴드를 위한 공연 공간인 ‘공상온도’에서 사뮈(Samui)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의 EP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지]에 심취해 마침 CD를 한 장을 구매한 차에 구경 간 공연. 당시 사뮈의 모습은 유함, 아니 수더분하다는 표현이 알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모습을 이어폰 너머 실제로 보니 신기했던 것 같다. 함께 구경간 친구와 대화 또한 나눴다. “수더분한 얼굴에서 어찌 저리 굵직한 소리가 나올까…”라고.
뮤지션 사뮈를 유독 따라다니는 수식어, ‘염세적’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그의 굵직한 목소리를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언제나 저음을 무기로 삼아 우리 평범한 일상을 투과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니. 이제 막 공개된 사뮈의 첫 정규 앨범 [농담] 역시 그러하다. 여느날과 다를 것 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싱그럽게 내리는 봄비를 맞는다. 두통과 열대야를 못 이겨, 뒤척이다 텅 빈 역으로 나간다. 그리고 공허히 담배를 태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의 삶. 개인의 목소리가 전체를 관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상의 순간에서 느낀 감정을 음악에 고스란히 담아낸 덕분이 아닐까.
4월 1일 만우절. 나는 앨범 [농담]을 들으며 사뮈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농담 따먹기 좋은 날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농담 농도 0%. 그 진지한 대화 전문은 하단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앨범 [농담]과 함께 찬찬히 살펴보자.
Mini Interview
데뷔 5년 만에 첫 번째 정규작이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사실 시작이라고 표현한다면 첫 EP [새벽 지나면 아침]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꾸준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고 있었고, 약 5년간의 내 상황에서 느꼈던 걸 일차적으로나마 마무리 지었다는 표현이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디지털 시장의 흐름에 반하여 CD를 꾸준히 공개해왔다. 이번 [농담]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무려 125%로 초과 달성했다고. 감회가 어떠한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큰 도전이었는데, 우려와 달리 펀딩을 오픈한 첫 번째 날에 거의 50%를 달성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 앨범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년 8월부터 준비했던 앨범이었고 2월에 펀딩을 오픈했기에 이미 앨범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시작한 펀딩이었다. 때문에 펀딩 오픈 당시에 꽤나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많은 분의 관심 덕분에 힘을 얻어 끝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앨범 발매일이 3월 말에서 4월 3일로 변경됐다. [농담]은 만우절을 의식한 걸까?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일정이 러프하게 잡혀있는 상태였는데, 최종적으로 4월 3일이 어떻겠냐는 유통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근데 질문을 듣고 생각해보니 바꾸길 잘한 것 같다.
‘염세적’이라는 수식어가 유독 사뮈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저에 깔려있는 부분이니까. 다만 그저 염세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닌데, 내 음악으로만 나를 알던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일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게 된다. 뭐, 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사뮈가 그리움과 정이 많은 사람이라 느꼈다. 이를 생각한 것은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지”를 듣고 난 후부터. 앨범 [농담]에 “봄비”, “그럴 때가 있지”, “빈 역” 또한 사뮈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 그리움을 자주 느끼는 편인가?
맞다. 내 음악을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 기분이 좋다. 다들 내가 이유도 없이 염세적인 사람인 줄만 알거든. 나는 정이 많은 편이고, 그래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게 너무나도 힘들다. 실제로 많은 이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 둘 주변의 사람들이 떠나다 보면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때가 생각나 자책하기도 했다. 웃긴 건 자책을 하느라 또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더라. 그런 경험이 반복되니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의 수록곡인 “당신에겐 솔직하고 싶어요” 같은 가사가 나온 게 아닐까. 그와 동시에 질문에서 언급했던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지”를 낼 당시의 내 마음을 보며, 내가 또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과거 자신의 음악을 지긋이 감상하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순간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기에 특히 각별할 것 같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몇 해 전 적어둔 일기를 보는 것 같다. 곡을 듣고 있으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적어둔 일기를 펼쳐보면 그때 기억이 나기도 하고 막 그러지 않나. 그래서 훗날에 달라진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재밌을 때도,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근데, 사실 음악을 내고 나면 잘 안 듣는다.
싱글과 EP로 꽤 많은 순간과 순간의 감정을 노래해왔다. 이번 정규에는 무려 열두 개의 생각을 담았다.
인생을 통틀어 첫 번째 정규앨범인데, 이제야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제대로 전한다는 기분이 든다. 생각은 여전히 많지만. 지금까지 내가 사뮈로서 노래해왔던 감정의 기조는 개인적인 부분에 더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앨범이 나의 긴 음악 인생의 첫 번째 막을 마무리하는 기분이 드는데, 이후 음악에서도 여전히 나의 감정을 이야기하겠지만 좀 더 세대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이나 기존과는 다른 감정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추상적인 생각일 뿐이라 내가 어떤 일을 겪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별반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
프로듀싱을 배상언과 함께하고 있다. 사뮈, 여민환의 삶을 관통하는 음악인지라 의견이 갈릴 법도 한데.
스스로 순간의 감정을 이야기한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 나의 작업 방식이 그렇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차적으로 가사화시켜 정리해두고, 언젠가 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기타를 들고 메모장을 훑어보다가 그 순간의 내 감정과 비슷한 생각을 골라 곡을 쓴다. 그렇게 곡을 쓰고 나서 당장 편곡의 방향이 그려진다면 시퀀서 프로그램을 통해 콘셉트의 이해가 될만한 정도의 상태로 상언이 형에게 보낸다. 상언이 형은 감정 표현이 화려한 사람은 아니라서 대부분 가벼운 피드백이 오는데 ‘오’ 혹은 ‘괜찮네’ 같은 피드백이 오면 꽤 괜찮다는 거고, 어쩔 때는 ‘좀 더 봐야겠네’ 같은 피드백이 올 때도 있다.
물론 나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더 디벨롭을 하고 난 뒤, 구체적으로 의견을 공유한다. 가끔 상언이 형이 1차 데모를 듣고 떠오르는 것이 있을 때는 가끔 코멘트를 주기도 하는데, 그 의견이 마음에 들 때엔 최대한 빠르게 작업실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곡의 방향을 설정하는 편이다. 대체로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편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내가 기울어있다면 그 의견을 따라와 주는 편이고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는 선택에 도움을 주는, 사뮈라는 인물에게 아주 고마운 동반자이다.
“신기루”에서 잃고 싶지 않았던 것에 관해 설명해줄 수 있나?
아. 정말 너무 많은데,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낭만이 아닐까 싶다. 살아가다 보면 불쑥 드는 생각이 있다. ‘과거의 나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 스스로 좋아하던 나의 모습을 잃어간다고 느낄 때 슬프지 않나.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음악을 듣는 걸 즐기던 내가 넷플릭스를 보는 게 더 재밌어진 것이 낭만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던 작가의 작품이 더는 궁금하지 않은 것을 느낄 때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가끔 새로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도 그들의 이야기에 쉽게 눈이 반짝여지지 않더라.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는 걸 좋아하던 내가, 이젠 다 뻔한 말 같고 다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그때 ‘내가 지니고 있던, 그리워하던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신기루였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지”, “그럴 때가 있지” 등과 같이 독백 같은 문장을 타이틀로 삼아왔다.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런 나의 무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실제로 사뮈라는 화자의 전반적인 태도가 그렇기도 하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실제로도 좋아하지 않는다. 거부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작년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스스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는데, 앨범 [농담]이 공개된 지금 또한 그러한가?
여전히 어렵다. 옛날 설화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나. 맹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면서 누구는 통나무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누구는 무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인간이 그렇지 않을까? 나 역시도 그렇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그럴 것이다. 다양한 면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 모두 합친 게 나인데, 가끔 한마디로 설명해보라고 강요받고는 한다. 결국 부추김에 못 이겨 어떤 대답을 한들, 나의 단면에 불과하지 않을까.
에디터 │ 황선웅
사진 │ 홍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