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거의 노래 : espionne – ‘Library Music’

지난 3월과 4월, 꽃이 만개하긴 했으나 우린 겨울보다 더 움츠렸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기지개 켤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계절. 봄은 백일몽같이 지났고, 요즘은 여름에 더 가까운 날씨다. 그러나 이태원을 중심으로 병마가 다시 퍼져가니, 잔혹한 계절은 여전하다.

자유로운 여름을 위해 어두운 방에서 고군분투 싸우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디거의 노래’, 다섯 번째 주제는 이상적인 여름, 남국의 소리를 반영한 음악인 ‘라이브러리 뮤직(Library Music)’이다. 그리고 이를 소개할 주인공으로 한반도 최고의 디거 박민준, 에스피오네(espionne)가 수납장을 열었다.

약 20년을 로컬 디제이 신(Scene)에서 분주하게 활동한 그의 음악 셀렉션, 그리고 에스피오네의 음악적 원천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는 총 8장의 라이브러리 레코드를 셀렉했고 이는 하단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지난 인터뷰와 함께 그가 셀렉한 바이닐을 찬찬히 따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번 주제인 라이브러리 뮤직,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나?

일상적이고 소박하면서도 이상향을 담기도 한 부분이 가장 큰 매력이다. 이를 녹음한 뮤지션들은 엄청난 역작을 남기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다가 녹음 의뢰를 받았던 거지. 빠르게 녹음을 진행해야 했기에 소박한 기록물이 된 거다. 그리고 상상력을 동반하여 이상향을 그렸다. 70년대 프랑스에서 탄생한 바이닐들은 대부분 브라질을 상상하고 음악을 제작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타국에 대한 경험이 그리 많지도 않았을 거다. 또한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도 당시 명인들의 노하우를 그대로 접할 수 있는 좋은 교과서다. 음악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프로세스를 날 것으로 배울 수 있다.

이는 지금 빌리프(Belif) 뮤직 트리트먼트 시리즈를 1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매력이기도 한가?

그렇다. 또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하다 보니 영상 음악을 제작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때문에 지금 내 라이브러리 레코드를 만드는 것에도 애정이 있다.

반면 원해서 제작한 음악이 아니라 위촉받아 제작한 음악인데 자유롭지 못한 제한적인 부분에 대한 고충은 없었을까?

주제가 제한된 것은 사실이나, 사실 ‘제한’된 음악이 아니라 ‘제안’된 음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작곡가들 모두 클라이언트와 전혀 맞지 않았으면 제작하지 않았을 거다. 예로 어느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나에게 EDM을 제작해달라 한다면 나는 못 한다고 거절하겠지. 그러나 레코딩, 스타일, 프로덕션에 자유가 생기면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좀 더 심화하여 뽑아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 이제 음악을 소개받고자 한다. 첫 번째로 소개할 바이닐은 어떤 음악인가?

시카고 출신의 작곡가 딕 보웰(Dick Boyell)의 [Music To Move Families By]. 영국, 프랑스, 스페인, 홍콩 등 총 7개의 나라와 도시를 돌아다닌다는 콘셉트의 앨범이다. 사실 라이브러리 음악보다는 광고 음악에 가까운 앨범으로 물류, 이삿짐센터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레코드다. 트랙 제목 또한 모두 이사에 관련되어 “할리우드로 이사한다”, “버본 스트리트로 이사한다” 등의 제목이 형성됐고 장소와 관련된 클리셰적인 요소와 지역적 특색, 키워드도 곡에 녹아있다.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국적인 소리에 포커스를 두고 관현악, 소프트 팝, 록 등을 잘 버무렸다.

또한 [Music To Move Families By]는 빌리프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와 영감이 되기도 했다. 사실 처음 빌리프에서 처음 앨범 제의를 받았을 때 큰 영감이 없었는데, 이사를 주제로 음악을 만든 것을 떠올리며 나도 뭐든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작했다.

Dick Boyell – [Music To Move Families By]

다음으로 소개할 바이닐은?

프랑스의 라이브러리 레코드 레이블 패치워크(Patchwork)의 레코드다. 레이블의 일관된 커버아트는 누구나 단번에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여지없이 라이브러리 레코드 같은 생김새에 다양한 레이블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사운드적으로도 경음악의 키치함 등을 잘 담아냈고.

패치워크 레이블은 라벨 넘버링과 부제를 함께 릴리즈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본 레코드의 부제는 ‘Voices’로 클로드 페라우딘(Claude Perraudin)이 가사 없이 스켓싱잉만으로 구현한 라이브러리 음악. 빌리프 프로젝트에도 매번 부제가 붙는데 여기서 착안을 한 거다. 음악 스타일은 소프트 팝이나 싸이키델릭한 요소도 있다. 모던한 기법과 클래시컬한 기법이 섞여 있는, 제목을 구성하는 방법 또한 대표적인 라이브러리 형식을 따르고 있어서 교과서로 불린다.

Claude Perraudin – “Synthetic Sunshine”

다음 바이닐 소개를 부탁한다.

장 자크 페리(Jean-Jacques Perrey)가 무그(Moog)를 이용해 제작한 경음악. 기초적인 세션을 제외하고 모든 효과음을 무그로 처리한 재밌는 앨범이다. 타이틀 [Kartoonery]처럼 진짜 만화에 사용될 법한 라이브러리 뮤직. 무그 효과음의 정석, 당시로는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소리였다. 그리고 이를 제작한 레이블 ‘몽파르나스(Montparnasse)’는 프랑스 전문 라이브러리 레이블이다.

에스피오네가 무그 신시사이저 앨범을 셀렉할 줄 몰랐다. 에스피오네는 오가닉한 음악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지 않나?

전기가 통한다고 모두 디지털인 게 아니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도 오가닉의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아날로그의 마지막 시대에 가장 선구적인 시도가 무그 등의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였지. 에스피오네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로 음악을 제작하는 것까지가 목표다. 사실 옛날부터 이를 생각해왔다. 제작할 시기는 아마도 빌리프가 좀 더 기능성을 강조한 코스메틱 제품을 공개할 때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이 콘셉트를 기다리는 중이다.

Jean-Jacques Perrey & Daniel Longuein – “Kartoon Express Railway”

다음 바이닐 소개를 부탁한다.

프랑스에 국민 재즈 피아니스트 마샬 솔랄(Martial Solal)이 제작한 74년 라이브러리 앨범. 다른 라이브러리 레코드가 이름을 숨겨 익명성을 강조하는 반면 [Locomotion]에는 라이너 노트가 기재되어 있다. 친절하면서도 위트있는 라이너 노트를 보니 라이브러리 레코드 또한 위촉한 아티스트와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한 보통의 라이브러리 판은 하나의 앨범이라 생각이 들지 않는 반면 [Locomotion]은 자신의 앨범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든다. 커버아트 또한 라이브러리 레코드라 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Martial Solal – “Locomotion”

프랑스 재즈 신이 또 유명했지 않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거만해진 시기 또한 파리 투어를 다녀온 직후로 알고 있다.

파리를 동경한 인물들이 많았지. 마일스 데이비스뿐만이 아니라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대표적인 레코드 또한 파리에서 녹음한 경우도 많고. 특히 그때는 미국 재즈 뮤지션이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 같은 프랑스 뮤지션을 동경했던 것으로 안다.

이번에 셀렉한 바이닐 중 프랑스 음반이 다수인데 이유가 있나?

‘뮤직 데 울프(Music De Wolfe)’나 ‘KPM’ 등의 영국 레이블은 비교적 한국에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도 레코드 관리가 잘 되고 있고 심지어 한국에 지사가 있어서 온라인으로도 검색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반면에, 프랑스는 특정 재발매를 제외하곤 한 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리바이벌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 라이브러리 뮤직을 알리고 싶었고 또한 프랑스는 유명 뮤지션들이 무명 시절 돈벌이 수단으로 라이브러리 뮤직을 시작한 경우도 있어서 재밌다. 그리고 영국은 라이브러리 뮤직의 성장으로 음악 신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는데, 프랑스는 당시만 해도 위촉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 재밌는 게 나라마다 개념이 조금 다르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필름 스코어를 하는 작곡가가 라이브러리 뮤직을 제작하기도 했고. 그래서 라이브러리 뮤직이라는 게 나라마다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한국에서 프랑스 라이브러리 뮤직은 생소한 편인가?

2000년대 초반 라운지 뮤직이 한창 유행할 시기에 한 번 뜬 적이 었었으나 여전히 생소한 편이다. 리이슈 레이블, 레코드와 컴필레이션이 발매될 당시였는데, 이를 조달하던 사람들 또한 많진 않았고. 그때 프랑스 라이브러리 뮤직을 듣고 좋아하던 사람이 소수로 있긴 있었지.

프랑스 라이브러리 뮤직을 어떻게 접하게 됐는가?

명동, 회현상가 지하에 라이브러리 레코드가 몇 장 있었는데 이는 방송국이 아카이브로 갖고 있던 판이었다. 이걸 처음 살 때는 뭔 앨범인지도 몰랐지. 평범한 판 같진 않았고 어떤 콘셉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훗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들어섰고 검색을 통해 라이브러리 레코드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외국 친구에 의하면 회현상가에 방송국 아카이브 바이닐이 많아서 귀한 라이브러리 레코드가 많이 발견됐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없고.

방송국에서는 어떤 용도로 썼을까?

자료 보관용과 시그널로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 라이브러리 레코드는 많이 없고, 대부분 ‘KPM’이나 ‘뮤직 드 울프’ 릴리즈가 많다. 두 레이블은 60, 70년대부터 한국에 라이센스 반을 팔았다고 하더라고. 또한 찾아본 바로는 삼성과 뮤직 데 울프가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

한국에는 라이브러리 전문 레이블이 없나?

레이블은 없다.

셀렉한 바이닐 중에 한국어가 적힌 바이닐이 있었는데.

아 그건 라이브러리 레코드가 아니라 별표 전축을 홍보하기 위해 공개된 바이닐. 별표 전축을 구매하면 끼워주던 바이닐이었지. 이건 그들이 직접 제작한 CM송을 제외한 다른 곡들은 모두 번안곡이다. 아마 79년에 심의를 받아 공개된 음악이다. 이전에 천일사 그림이 그려진 다른 버전의 판이 있었고.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비교적 화려하고 풍부한 세션이 들어간 것 같은데, 이는 역시 자본을 바탕으로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을까? 천일사는 전속 오케스트라까지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힛트 레코드’에서 이와 비슷한 형식의 디스코 경음악이 많이 발표됐기 때문에 천일사는 그들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CM송 판이나 라이브러리 판을 플레이에 섞기도 하는지?

믹스셋에 자주 섞는 편이다.

그 다음으로 소개할 라이브러리 레코드는?

블라디미르 코즈마(Vladimir Cosma)의 [Ultra Pop-Op]. 영화 “라붐(La Boum)”으로 한국에서 유명한 프랑스 뮤지션 블라디미르 코즈마가 TV 시리즈를 위해 음악을 제작하던 시기에 발매한 라이브러리 레코드다. 소울, 록, 소프트 팝, 재즈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음반으로, 이는 당시에 팝의 범주에 속하던 음악을 모두 포괄하는 음악을 남겼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코즈마는 클래식을 기반으로 음악을 제작한 사람이기 때문에 편성이나 구성이 매우 서사적이다.

보아하니 라이브러리 음악이 공통으로 이국을 그리기 위해 브라질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국적인 엑조티카(Exotica)를 음악에 그리기 위해선 브라질리언과 라틴 리듬 등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Vladimir Cosma – “Cool Pool”

과거의 광고와 영화는 당시 팝 중에서도 유명했던 음악의 저작권을 구매하고 사용한 경우는 없었나? 요즘에는 대중에게 인기 있는 어느 가수의 음악이 광고나 영화에 사용하는 사례가 아주 많지 않은데, 50, 60년대면 재즈 스탠더드 넘버를 적절히 사용했을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번안 등으로 자주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외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물론 연출하고 싶었던 분위기와 적절했다면 저작권을 일부 지불하고 사용했을 거다. 그런데 영화 음악과 라이브러리 음악이 해외에선 독립적인 장르로 굳혀진 지가 오래돼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직접 제작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라이브러리 음악 레이블에 음악 제작을 위촉하는 경우는 사운드 트랙을 제작할 예산이 없지만 단순 분위기는 연출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타이틀이 대개 직관적인 거지. 다음으로 소개할 바이닐 [Drumo Vocalo] 역시 그러한 판이다.

[Drumo Vocalo]를 간단하게 소개해줄 수 있을까?

[Drumo Vocalo]은 직관적인 타이틀로 보컬과 드럼만으로 녹음된 것을 단번에 알아낼 수 있는 판이다. 다른 라이브러리 레코드들보다도 좀 더 전위적이고, 추상적이다. 마치 명상을 위해 제작된 실험 음악의 느낌? 이를 제작한 ‘인터내셔널 뮤직 레이블(International Music Label)’은 ‘몽파르나스’의 하위 레이블로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특정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음악을 제작하는 레이블이다. 그래서 영화 음악 프로듀서들이 이를 보고 들으면서 많이 참조했다고 하더라. 나 또한 영화 음악을 시작할 당시에 많은 영감을 얻기도 했다.

Daniel Humair – “Drumvocalo”

어떤 영화에 쓰였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데.

다큐멘터리에 사용된 걸로 기억한다. 다큐멘터리는 특성상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거리감을 조성하는 소리가 필요하다. 그럴 때 [Drumo Vocalo]와 같은 모던 뮤직에 방법론과 추상적이며 실험적인 소리가 제시돼야 몰입을 해체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소개할 [The Sheffield Drum Record]도 미리 확인한 바로는 드럼만으로 추상적인 소리를 제작했던데, [Drumo Vocalo]와 비슷한 분위기의 리듬 음악 같았다.

추상적인 면은 맞지만 두 앨범의 용도는 극과 극이지. [The Sheffield Drum Record]는 오디오 마니아를 위한 테스트 바이닐이다. “이 앨범이 너희 오디오에서 얼마나 생동감 있게 들리는지 한번 직접 테스트해봐라”라고 말하는 앨범. 이를 제작한 ‘셰필드 랩(Sheffield Lab)’은 다이렉트 디스크 기술을 보유하여 녹음과 동시에 바이닐 프레싱에 들어갔다고 한다.

Ron Tutt – “The Sheffield Drum Record”

추상적인 리듬 음악이라 쉽게 접하기 힘든 소리라 추측한다. 이를 즐기는 방법이 있나?

그렇긴 한데, 요즘엔 음악의 전통적인 틀이 깨지고 있는 시대라 엠비언트, 미니멀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절대 유행하지 않을 것 같은 음악들이 유행하는 시대에 비하면 리듬 음악은 설명적으로 쉽다. 리듬에 집중되어 있으니 그냥 들리는 대로 즐기면 되지 않을까? 특히 요즘에는 라이브러리와 익스페리멘탈, 엠비언트만 찾는 어린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특이해 보이고 싶어서 특이한 걸 찾아 듣는 게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선택하고 청취하다 보니 음악적 호기심이 아방가르드에 닿은 거지. 옛날처럼 재즈를 깊이 들어서 프리재즈를 듣는 게 아니다. 라이브러리 뮤직 또한 과거 마니아의 전유물이었다면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접하고 좋아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오히려 얼터너티브 팝적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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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ionne 인터뷰


에디터 │ 황선웅
포토그래퍼 │김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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