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터부시 하던 과도기를 거쳐 오늘날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타투 신(Scene)은 그 찬반을 논하는 것이 더는 의미 없어졌을 정도로 자연스레 우리 삶 속 한 부분을 채워가고 있다. 여름철 반팔 소매 끝으로 슬쩍 드러나는 타투가 오늘날 그 자체로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여겨지게 된 덕에 주변에서 크고 작은 타투를 구경하기 좋은 환경에 놓여있지만 각자의 입맛이 천차만별인 만큼 여타 미디어에서 비추는 이상적인 타투만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 반대로 누군가의 “이건 무슨 의미냐”라는 다소 뻔한 질문을 받았을 때, 당당한 모습으로 자랑 아닌 자랑과 함께 본인의 문신과 그 의미를 말하기 꺼리는 이들도 꽤 많으리라 짐작한다.
모든 선택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후회는 이따금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데, 어릴 적 치기어린 마음으로 새겨 넣은 타투, 혹은 개인적인 심경이나 환경의 변화가 낳은 결과 등이 그러한 후회스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물론 누군가는 유명한 타투이스트에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받았을 수도, 누군가는 큰 의미 없이 문신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영원하리라 믿었던 지난 연인과의 이별, 혹은 인류애(Amorfati)라는 멋들어진 단어와 동명의 트로트곡이 별안간 대 히트를 치는 등 의도치 않은 환경의 변화는 마음속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을 심어줄 수도. 단순히 ‘보기 좋다’, ‘나쁘다’ 같은 완성도 논쟁이 아닌, 한번 새겨진 이상 본인만의 작은 역사로 남게 된다는 타투의 특성은 시술자의 삶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에 그들의 개인적인 코멘터리에 귀 기울여 보는 일은 퍽 재미있는 드라마를 한편 보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내가 이상적인 어떤 지점에 도달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는 것처럼 스스로 계속해서 되뇌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살아가다 보면 계획하면서 살아갈 때가 있어서 완전한 무계획은 없는 건가 하는 생각에 실소가 터지기도 하기에 무계획이 계획이 되고 계획이 무계획이 되는 그런 날이 요즘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 중학교 2학년 때 친구가 타투를 받은 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조금 그릴 줄 알던 저는 친구들의 등, 어깨, 손에 타투를 그려주기 시작했고 이내 친구들 사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불로 바늘을 달궈 실을 감고 실에 먹물을 묻혀 살을 찌르고 뜯어가며 그려 넣었던 문신이다 보니 부분 부분 엉성합니다.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해서 샤워를 할 때면 항상 어깨가 안 보이는 곳에서 씻고 목욕탕 등 문신이 드러나는 곳은 당연히 가지 않게 되었으며 너무 많은 친구들의 몸을 망쳐놓은 게 저에게는 더 큰 후회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Positive Mental Attitude’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지난날 충동적이고 미흡했던 위치 선정 센스보다는 주로 전 여자 친구 이니셜로 오해받는다는 점이 나를 후회스럽게 만든다.
- 18살이 되고 며칠 후에 당시 친했던 친구들과 한 가족을 뜻하는 의미의 용을 새기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고 싶은 마음에 타투이스트가 보여준 도안을 보고 바로 진행하자고 했고, 몇 시간이 지난 후 결과물을 봤을 때 이게 뭔가 싶었다. 지금은 그 의미를 생각해서 그대로 놔둔 상태지만 나중에라도 커버업할 생각이다. Graham, 내 200달러 돌려내라.
- 16살 때 친구가 문신하러 간다길래 같이 갔는데, 하나 공짜로 해준다고 해서 받았다. 그때 롤링스톤즈를 좋아해서 받았지만 위치도 너무 잘 보이고 형태도 잘 표현되지 않아서 후회스럽다.
- 저는 굉장히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항상 ‘자유로움’을 꿈꿔왔는데, 2004년 군대를 제대하고 그 해 6월부터 문신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타투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은 때도 아니었고, 무작정 집을 나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주로 주위 친한 친구들에게 데모로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홍대에서 활동하는 펑크 밴드 사이 타투가 유행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누구 밑에 들어가서 배우는 것보다는 독학이나 혼자 연습해서 하는 아마추어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받고 싶은 도안이 있거나 무슨 의미를 부여해서 받는 게 아닌 즉흥적으로 친구랑 같이 놀거나 술을 마시다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타투이스트 친구들이 보면 이런저런 핀잔을 많이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똥 문신일지 몰라도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제 피부에 새겨진 역사이자,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살고 있을지 궁금한, 기억조차 희미한 친구들의 추억입니다.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까지는 반항심과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에 문신을 받았다면 30대 중후반은 허탈함과 안정적이지 못한 불안한 제 인생에 조금이나마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몸에 빈 공간을 ‘가득 채우기 위한’ 문신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날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자’라는 마음이 큽니다. 인생이란 채우려 하면 할수록 채워지지 않잖아요.
- 자그마한 예쁜 타투 정도는 좋은 경험이라는 어머니 말씀에 타투라는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목에 예쁜 매화 한송이를 새겨 넣었다. 당시에는 예쁘게 느껴지다가 너무 익숙해진 탓에 그 위에 덮은 깃털 타투가 이렇게나 후회스러울 줄 몰랐다. 바퀴벌레부터 매미, 나방까지 최근까지도 내 목에 존재하는 것이 깃털이라고 말하는 이는 못봤다. 모델 일을 시작하면서 더더욱 이 타투를 가리게 되었고 ‘타투 지우개=컨실러’는 내 일에 필수가 되어버렸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타투, 정말 지우고싶다.
- 2년 전쯤 힘든 시기를 이겨내며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일할 수도 없고 생각도 많아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문득 문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집 근처 다이소로 향했고 검정 지브라 볼펜 두 개, 바늘 그리고 탄산수 한 병을 사서 다시 집으로 왔다. 라이터로 바늘을 소독하고 볼펜 심지를 꺼내 부려뜨려서 병 뚜껑에 부은 다음 도안을 간단히 그리고 바늘을 잉크에 담아서 찌르기 시작했고 이내 완성한 것이 이 타투다. 좀 웃고 싶어서 웃는 얼굴을 그렸는데, 혼자하는 데는 한계가 있구나 싶네.
- 웃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그 안에 비치는 웃지 않는 눈이 처음에는 그저 특별해 보이고 예뻐서 했던 타투.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끔 무서워(?) 보이는 타투. 살다 보니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을 경험하며 웃는 모습 뒤에 어떤 진심을 가진 건지 몰라서 괜한 거리를 두고 편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느낀 적이 많다. 문득 이걸 볼 때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으로 비치겠거니 싶어서 처음에는 마냥 귀여웠지만 때로는 무섭고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드는 타투가 된 거 같다.
- 인간의 표정과 감정은 다양하다. 널뛰는 나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고 싶어서, 내 기분의 고저 그 사이 교차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나 스스로도 그러한 존재가 되긴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삐뚤빼뚤한 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 본명에 ‘불꽃 섭’이라는 한자가 있어서 아랫배에 불꽃 문신을 했는데 군대에서 목욕할 때마다 ‘불타는 고추’라고 놀림을 받아서 레이저로 따끔따끔 불나게 지우고 , 그 위에 가족사진 문신으로 덮었습니다.
- 제멋대로 생긴 눈, 코, 입이 한창 내일은 없는 것처럼 고주망태로 지내던 시절 내 모습 같기도 하고, 닮았다는 소리도 종종 들어서 그냥 재미로 했다. 귀여운 타투지만 이제는 저 얼굴처럼 고주망태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 중.
- 일적으로나, 사회에서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말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망하게 하는 사례를 많이 보고 나서 ‘The rest is silence’라는 문구에 끌려 타투까지 하게 됐는데 문구대로 살아가다 보니 호구가 돼 있었다. 사람은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 내가 처음으로 타투를 받은 때는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무엇이든 또래 중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멋있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동반자라는 뜻을 지닌 ‘Soulmate’라는 글자를 새겼지요. 이후 몇 년간(아직도)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Seoul mate’, ‘Seoul metro’ 등의 별명이 생기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이 타투에 관해 물어보는 게 너무 싫어서 커버업을 해볼까 했지만, 후회를 인정하는 쪽이 더 멋진 거라 여겨 아직까진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저의 친한 친구와 ‘Soulmate’ 타투를 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 사귀고 있던 사람과 함께한 거랍니다. 손 잡으면 두 개의 ‘Soulmate’가 맞닿을 수 있게요. 나는 왼팔, 그 친구는 오른팔… 아무튼 그 친구와 저는 ‘Soulmate’가 아녔습니다. 서로의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에요. 신이 철없는 저를 도와주신 거라 여긴답니다.
- 좋아하는 작가마저 같을 정도로 서로의 취향이 잘 맞았던 사람과 함께한 타투다. 그 작가의 작품 속 낙서가 마음에 들어 함께 새겨 넣었고 ‘One’이라는 의미처럼 하나를 뜻했으나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 4년간 연애한 그 남자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 사랑을 간직하고 싶어서 내 멋대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의 이니셜을 새겼다. 결혼할 줄 알고… 헤어지고 나니 새겼던 것 자체가 후회된다. 커버업을 하려고 가운뎃손가락과 같이 하나는 빈 하트, 하나는 꽉 찬 하트로 수정했는데, 손가락 안 부분이 작업받을 때 엄청 아프기도 하고 제대로 커버업이 안돼서 얼룩진 것 마냥 남아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