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서브컬처, Zine

디지털 세대의 사람들은 스마트폰, SNS 등에 완벽히 적응했고 이것은 과도하게 편리한 것을 추구하거나 심화한 나르시시즘으로 셀피 문화가 온라인상을 도배하게 되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양한 방면으로 탐구하고 싶은 것에 대담하게 뛰어들었고 스스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우연히 교차한 정치적, 윤리적, 문화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들이 수많은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면서도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으로 심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진(Zine)은 그중에서 가장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창작물이며 디지털 공간이 채우지 못했던 부분을 해소해주는 매체가 아닐까.


What is a Zine?

이미지 출처 | Epson / Kentucky Gun Co

정해진 틀은 없지만, 개인 혹은 단체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팸플릿 형태의 출판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다. 이미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매거진(Magazine)은 진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써 저널리즘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진은 20세기 초반부터 일반인들이 만든 출판물로서 매거진보다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최초의 진으로 언급되는 것은 1920년대 공상 과학 소설의 팬들이 그들의 관심거리와 독자 간의 교류를 드러내기 위해 제작한 출판물인데 지금까지도 진이 팬진(Fanzine)이라는 용어와 일맥상통하게 쓰이는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70~90년대 팬진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펑크 신(Scene)에서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진을 만드는 문화가 형성되어 진은 독립적인 제작과정을 거치는 출판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Zined! a documentary by Marc Moscato

Zine의 기틀을 마련한 Punk와 Riot Grrrl

70년대 펑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국 펑크 신에서는 댐드(The Damned), 클래쉬(The Clash), 버즈콕스(Buzzcocks), 샴 식스티나인(Sham 69) 등 많은 밴드가 출현했고 문화적으로 거대한 물결을 만들었는데 이 당시 런던에 살고 있던 마크 페리가 밴드 라몬즈(Ramones)의 곡인 “Now I Wanna Sniff Some Glue.”에서 빌려온 스니핀 글루(Sniffin’ Glue)라는 펑크 팬진을 1년 동안 매달 발매했다. 이후 플립사이드(Flipside)나 서버번 보이스(Suburban Voice) 같은 팬진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맥시멈 락앤롤(Maximum Rocknroll)은 현재까지도 온라인을 통해 운영되며 한국의 스컴레이드(Scumraid) 같은 밴드를 리뷰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Maximum Rocknroll

언더그라운드 영역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아나코 펑크(Anarcho Punk) 밴드 크라스(Crass)가 주장했던 DIY(Do It Yourself) 윤리에 영향받은 창작물들이 펑크 신에서 나왔고 팬진 역시 DIY를 기반으로 하는 매체로 굳혀졌다. 80년대 펑크밴드들이 약 1분에서 2분 정도의 짧고 빠른 곡을 제작해서 전체 길이가 10분 내외인 데모(Demo)와 EP 앨범 위주로 발매했는데, 진도 이처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드윈들 디스트리뷰션(Dwindle Distribution) 매니저이자 동시대에 ‘Go For It!’이라는 스케이트 진을 만들었던 스티브 더글라스(Steve Douglas)는 “처음 진을 만들 때 8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만들었으며 8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쇄는 우리 엄마에게 맡겼다”라며 진의 분량이나 제작에 기준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후 진은 또 다른 주제와 내용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90년대 페미니즘 펑크 무브먼트인 라이엇 걸(Riot Grrrl)이 유행하고 나서부터다. 라이엇 걸은 여성에 대한 폭행, 가정 폭력, 성차별, 인종차별, 가부장제 등에 반대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고 비키니 킬(Bikini Kill)과 엘세븐(L7) 등의 밴드가 참여하여 최근에는 푸시 라이엇(Pussy Riot)까지 이어오고 있다. 라이엇 걸 무브먼트 초반에는 음악은 물론 문자와 사진, 그림 같은 시각적 매체의 표현이 동반했는데 라이엇 걸 무브먼트에서 팬진은 중요한 표현 수단이었다. 1993년 캐나다의 한 뉴스매체에 따르면 북미에서만 4만 부의 라이엇 걸 팬진이 출판되었다고. 진의 수요 규모가 제법 컸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라이엇 걸, 퀴어, 페미니즘에 관한 진은 계속 나오고 있는데 최근 성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에 관련한 팬진이 상당히 다양하게 나오는 추세다.

이미지 출처 | Perfect Number Mag

Some Kind of Zines.

사실상 대부분 진이 독자적으로 제작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어서 비정기적으로 나오거나 오래 지속하는 사례는 드물다. 산발적으로 제작되는 진의 특성상 맥시멈 락앤롤처럼 한 분야를 대표할 수 있는 진은 많지 않지만, 현재에는 독특한 주제와 개성 있는 내용을 담은 진이 나오고 있어서 진의 영역은 갈수록 세분화되고, 확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양한 주제와 창의적인 형식의 진을 몇 가지 골라 아래에 모아보았다.

  • The Skate Witches
이미지 출처 | Girls Skate Network

90년대부터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한 샤리 와이트(Shari White)와 크리스틴 이벨링(Kristin Ebeling)은 어느 날, 유튜브(Youtube)에서 스케이트 위치스(Skate Witches)라는 스케이트 영상을 보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있지만, 여성 스케이트보더들의 터프한 모습을 담은 영상은 크리스틴을 매료시켰고 스케이트 위치스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은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크리스틴이 기사를 쓰면 샤리는 인쇄를 하며 팬진을 만들어갔다. 그들은 스케이트보드 신에서 조명받지 못하는 여성 스케이터에 관한 내용을 담아내며 여성 스케이터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팬진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최근 반스(Vans)의 캠페인 ‘디스 이즈 오프 더 월(THIS IS OFF THE WALL)’에도 소개가 되며 주목받기도 했다.


  • Broke in Korea
이미지 출처 | Daehanmindecline

코리아타임스(Korea Times)의 기자인 존 던바(Jon Dunbar)가 만든 진 브로크 인 코리아(Broke in Korea)는 한국 펑크 신과 한국 사회상을 담은 팬진이다. 그는 한국 펑크의 성지였던 스컹크 헬(Skunk Hell)이 홍대에 존재하던 때부터 신에서 활동했으며 지금까지도 펑크 밴드와 교류하며 사진 촬영은 물론 팬진을 제작하며 활동하고 있다. 이전에 한국 펑크 신의 팬진은 ‘불온서적’, ‘Break The Shell’, ‘Rosa Times’, ‘Faithful x Youth’, ‘SALM’ 등이 있었지만 브로크 인 코리아는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최근까지 이슈를 발행한 팬진이다.

존 던바는 브로크 인 코리아 이외에도 대한민디클라인(Daehanmindecline)이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최근의 근황과 외진 폐허, 공연 사진, 집회 등 다양한 사진과 글을 공유하며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의 현상과 한국 펑크 신의 근황 및 과거,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 고양이가 보내는 메세지 등 여러 내용을 담은 팬진 브로크인 코리아는 대한민디클라인의 홈페이지에서 스캔본을 확인해볼 수 있다.


  • Fifty Shades of Spray
이미지 출처 | Fifty Shades of Spray

그래피티 진인 피프티 셰이즈 오브 스프레이(Fifty Shades of Spray)는 세계 각지에 있는 그래피티를 똑같은 색감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을 만드는 허버트 레몬(Herbert Lemon)은 노팅엄을 기반으로 한 그래피티 아티스트이며 그래피티 사진을 아카이브하는 사진가다.

허버트 레몬에게 진이라는 매체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돈 패닉(Don’t Panic!)’이었는데 다양한 디자인의 스티커와 카드가 담긴 돈 패닉은 그가 이미지를 모으고 그것을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피프티 셰이즈 오브 스프레이를 통해 미디어와 메인스트림에서 조명받지 못하는 ‘진짜 그래피티’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 Shelf Heroes
이미지 출처 | Shelf Heroes

본래 DVD 리뷰 블로그에서 시작한 영화광 벤 스미스(Ben Smith)는 영화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을 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내기 위한 구상을 이어갔고 이것은 셸프 히어로즈(Shelf Heroes)의 시작이었다. 광고, 예고편은 없애고 영화가 주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보여주기 위한 진을 만들었다고 벤은 설명한다. 발행되는 호마다 숫자가 아닌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표지 또한 발행호의 알파벳이 첫 글자로 표기된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일러스트를 사용한다.

셸프 히어로즈를 디자인하고 출간하는 본인을 비롯해 진의 내용을 채우는 컨트리뷰터(Contributor)들이 참여해 콘텐츠를 채우는데,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교수, 학생, 아마추어 제작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진에는 영화에 관련된 일러스트, 소설, 시, 만화 등 영화 팬이라면 깊은 관심을 가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 Guerilla Warfare Video Fanzine

70년대 펑크의 태동기부터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사운드는 물론, 앨범을 담아내는 포맷과 관련 머천다이즈의 형태는 변화해갔다. 비정기적으로 팬진은 출간되고 있었지만, 그들은 오래가지 못했고 양적으로는 많았지만, 분실은 허다했다. 음악 앨범은 바이닐(Vinyl)과 카세트(Cassette)에서 CD의 형태로 변화하듯 팬진은 또 다른 형태를 보이기도 했다. 90년대 전후 VHS 테이프와 DVD의 보급으로 영상을 쉽게 찍고 편집할 수 있게 되자 종이가 아닌 DVD로 팬진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게릴라 워페어 비디오 팬진(Guerilla Warfare Video Fanzine)은 밴드의 공연 영상과 음원, 인터뷰, 과거의 TV쇼와 같은 자료화면을 짜집기한 다큐멘터리 형태의 영상이지만 2002년에 첫 이슈(Issue)를 발매한 후 몇 개의 이슈를 비정기적으로 발매한 팬진이다. 각 이슈마다 내용이 다르지만 첫 번째 이슈의 주요한 내용은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활동한 뉴욕 하드코어 밴드들의 라이브와 인터뷰, 뉴저지와 그 주변의 신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1986년에 방영된 필 도나휴 쇼(Phil Donahue Show)의 영상 등이 담겨있다.


커버 이미지 출처 │ Leeds – Independent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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