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LA VIDEO ROOM – 추석

INTRO

다사다난 [多事多難] : 여러 가지로 일이 많은데다 어려움도 많음.

연말 인사의 단골손님인 사자성어지만, 올해는 그 의미를 단순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인사말로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2020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힘든 일로 가득하지 않았나. 온 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는 명절도 이제는 우리가 알던 모습에서 변화할 것이다. 올해는 그 누가 풍성한 한가위를 말하겠는가. 참으로 혼란스러운 2020년, 우리에게 주어지는 황금보다 귀한 이번 추석 명절을 망칠 수는 없기에 이번 비즐라 비디오 방(VISLA VIDEO ROOM)에서는 ‘추석에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 몇 편을 소개한다.


“그래비티 (GRAVITY)”

‘언택트’로 대변되는 현 시국에 민족 대명절 추석은 이미 어색한 행사가 되어버린 듯하다. 매년 추석 시즌에 맞춰 개봉하던 영화계도 올해만큼은 잠잠하며, 동시에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진다. 이번 추석 고향을 간다면 나에게 남은 선택지라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는 넷플릭스가 유일할 게 분명. 이런 상황 속 내가 추석에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다.

2013년 개봉한 이 영화는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로 파견된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와 동료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인공위성 잔해물과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사고로 지구와 교신이 끊기고 혼자 우주 미아가 된 스톤 박사가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진정 ‘언택트’의 끝을 볼 수 있다. 우주 공간을 현실감 있게 표현한 영상미와 사운드로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관련 부문(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향효과상, 음향편집상, 시각효과상, 음악상)을 모두 수상한 이 영화를 보기 싫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영상미와 사운드 때문이다.

초반 오프닝 시퀀스부터 롱테이크로 압도하는 이 영화는 우주 공간의 리얼함을 느끼기 위해 3D IMAX 관람을 적극 권장했다. 또한 우주 공간의 낭만과 공포를 표현해주는 클래식 선율과 정적이 치밀한 계산 아래 설계되었기에 온전한 관람을 위해서는 사운드 시스템도 중요하다. 이런 영화를 온 가족이 들썩한 집에서 함께 본다면 주인공의 고독함을 느끼기보다는 시선은 음식에 가 있을 것이고, 귀에는 친척들의 조언이 쉴 틈 없이 들어올 것이다.

이렇듯 영화라는 콘텐츠에서 극장 관람은 중요한 요소다. 집에서 넷플릭스로 보는 영화와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주는 경험은 다르다. 극장이라는 한정적 공간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에 집중하는 것을 유도하지만, 넷플릭스 영화는 이내 집중력을 스마트폰에 빼앗기기 마련이다. 관람의 밀도는 다를 수밖에.

영화 제목 ‘그래비티’는 영화 내에서 여러 메타포를 지닌다. 스톤 박사는 딸을 잃은 어머니로, 영화 초반 우주의 고요함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다른 이와의 관계나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무중력과도 같은 상태. 하지만 진정한 언택트를 겪고 난 후 그녀는 삶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 영화에서 ‘중력’은 지구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자 사람 사이의 관계이자 모성애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나 또한 COVID-19로 인한 언택트는 IT의 편리함보다는 오프라인 행위의 소중함을 환기한 계기였다. 팬데믹이 끝나고 다시 마음 편히 극장을 간다면 좌석 예매부터 큰 스크린과 돌비 사운드로 관람하는 영화, 주변 관객과 함께 터지는 웃음포인트, 집으로 돌아오며 친구와 나누는 영화 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영화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박한수(Contributing Editor)


“유열의 음악앨범”

2018년 연말 대형 서점가에 비치된 책 중에 ‘트렌드 코리아 2019’를 본 적 있다. 책에서는 2019년의 트렌드 키워드로 ‘뉴트로’를 꼽았는데, 이후 모든 곳에서 마치 정해진 듯이 뉴트로 열풍이 불었다. 2020년에도 여전히 지겹지도 않은지 뉴트로의 광풍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러한 문화 현상은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야말로 뉴트로 또는 레트로 열풍에 편승한 작품이며 잠시 삶의 환기가 필요한 명절에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중국 영화 “첨밀밀(甜蜜蜜)”처럼 더는 새로울 것 없는 멜로의 전개 양상을 띠고 있다. 꽤 오랜 시간 주인공들은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아무리 극적 허용이라고 할지라도 그 ‘우연한’ 만남의 빈도가 너무 높아 몰입을 방해한다. 이러한 허점을 배우들의 비주얼로 해결하는 것이 과연 관객들을 몰입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90년대를 표현하는 옷과 휴대폰, 공간이 등장하며 가장 중요한 그때의 감성적인 음악이 흐른다. 하지만 레트로는 이미 많은 곳에서 우려먹었고, 그저 흉내를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으로 그려진 과거가 그저 미화되고 있으며, 오히려 이런 지점이 마음을 더 공허하게 만든다. 현재가 엉망인데,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혼자 보내는 명절이라면 더욱 피하고 싶다.

여하튼 우리네 명절에는 전 세대를 아우를만한 작품이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은 멜로라는 장르의 특성도 있지만, 가족과 함께 보기에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신파로 점철되는 한국형 코미디 영화가 더 낫겠다. 또는 액션 블록버스터나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은 영화가 오랜만에 모인 가족의 화목을 지켜줄지 모른다. 혹시 혼자 명절을 보낸다면 아름답게 그려진 누군가의 연애 영화보다는 킬링타임 무비가 제격이지 않을까.

최승원(Contribute Editor)


“해피엔드(HAPPY END)”

우선 이렇게 질문할까 한다. 우리는 왜 명절에 영화를 보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명절의 의미에 대한 답이 선행돼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시대와 상황, 입장과 역할에 따라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그 갈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질 것이니, 다소 비겁하지만 손쉬운 정리를 해보자. ‘오랜만에 고향을 찾고, 흩어져 있던 가족이 모이고,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과 공간만큼 쌓여있던 이야기를 털어내는 날’이란 안온한 정리. 이 의미가 적용된다면, 명절에 영화를 보는 행위에 대한 의미는 쉽게 설명된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제사도 지내고, 근황을 물으며 식사를 마친 뒤, 그렇게 많을 걸 했지만 시간은 여전히 자기엔 이를 때, 떨어져 있던 시간과 공간만큼의 어색함과 무료함을 채워주기 위해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명절은 그 의미를 손쉽게 정리하기엔 좀 더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있다. 명절의 모임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은 기존에도 많았겠지만, 오늘처럼 모임 불참이 공개적으로 장려된 시기는 없었다. 따라서 혼자 또는 소수의 지인과 명절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들에겐 명절의 영화가 주는 의미 역시 그전과는 다를 것이다. 명절의 일상 중 영화가 시작되는 위치 역시 보다 중심부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영화는 하나의 세레모니가 아니라, 휴일을 완벽히 즐기기 위한 이벤트로 그 가치가 격상할 것인데, ‘이 영화만큼은 꼭 피하십시오!’라고 말하기 위해 하나의 작품을 고르는 것이 내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글은 마감해야 했기에 고민을 거듭했고, 그 끝에 내가 고른 건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가 감독을 맡은 “해피 엔드(Happy End)”다. “해피 엔드(Happy End)” 전작인 “하얀 리본(The White Ribbon)”과 “아무르(Amour)”로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의 최근작이다. 미하엘 하네케는 사회와 관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편함과 모순을 찾아내 영화 위에 늘어놓기를 즐기는데, 그 희생양으론 가족이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해피 엔드”는 그 불편함의 통합패기지 버전 같은 영화라 영화가 끝나고 나면 가족이란 말 자체에 정나미가 다 떨어질 정도다.

“해피 엔드”를 보고 누군가는 ‘우리가 사는 게 뭐 사실 다 그렇지’, ‘저게 맞지, 가족이 다 좋아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하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뭘 또 그렇기만 한가’라고 응수하고 싶은 사람이다. 특히 명절이라면, 각자 보내는 하루의 모습이 다르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가족을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명절이라면, 굳이 “해피 엔드” 같은 불편한 작품을 볼 필요가 있을까. 불편함에 관한 논의는 중요한 것이니 “해피 엔드”를 절대 보지 말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명절이니까, 그래도 명절이니까 그저 허허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봤으면 한다. 어디 그럴 수만 있는 영화가 있기야 하겠냐만, 되도록 하네케의 영화는 피하자. 이 글이 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당신의 명절을 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올드보이(Old Boy)”

처음 “올드보이”를 본 지 15년이 지났다. 비디오를 빌려오던 강재형이, 지붕에서 술 마시던 장승업을 지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던 오대수가 되어 힘없이 갇힌 시간과 같다. 같은 15년이라니… 물론 말도 안 되는 껴맞추기식 우연이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당시 티비 뉴스로 소식을 접하던 어린 나는 칸이라고 하면 올리버 칸밖에 몰랐지만 속으로 ‘오오…’ 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해 명절 특선영화로 “올드보이”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그것을 챙겨 보았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명절날 할머니 댁 식탁에 모인 가족들을 등지고서, 혼날까 조마조마했지만 멈추지 못했던 그 영화. 영화라는 건 사람을 기분을 좋게 해야 하고, 가족이라는 건 화목해야만 한다고 알았던 그때. “누구냐 너?”로 시작되는, 하지만 틀린 질문에 대한 결과로 끝이 나는 이 영화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개미, 방, 거울, 티비, 예수, 이수아가 읽던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 망치, 벽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 전시된 클래식 카메라와 사진 등. 의식과 무의식, 원초아와 초자아 혹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비되는 상징들. 오대수는 폐쇄적 공간에 갇히고, 이우진에 의해 그 경계가 부서진다. 다시 오대수는 오늘만 수습하며 살 수 있을까?

자아의 싸움 혹은 영화적인 이야기로도 보이는 이 영화에서 자폐적 환상은 결국 외계에 의해 부서진다. 그곳에 감독의 주제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괴로운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통해 기억을 지운다. 다시 태어난 오대수는 전생을 기억하는가? 알 수 없다. 마지막 오대수의 표정은 어떤 경계에 있는듯하다. 감독의 고해성사인 듯한 영화를 보며 신부님처럼 침묵을 지키는 건 쉽지 않다. 감독은 어떤 환상에 빠져있던 걸까? 우리는 자신의  환상을 지운 뒤 어찌해야 하는가? 우진의 펜트하우스에서 분리된 대수와 몬스터가 마주 볼 때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이 떠오른다.

공간을 구분 짓던 스크린은 더는 벽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뒤에서 벌어지는 일은 앞에서 벌어지는 일과 혼재된다. 이젠 쉽게 믿을 수 없고, 의심 없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다. 일방적으로 듣던 우리는 인제야 질문이 턱 끝까지 가득 찼고, 그것이 가끔 ‘화’라는 형태로도 표출된다. 안정감은 의심과 불안을 거쳐 공포심으로 번진다. 사실이든 아니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파괴적이니깐. 오대수는 15년 뒤 풀려날 걸 알았다면 조금은 다른 시간을 보냈을까. 타의로 탈출하게 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누구냐 너? 나를 왜 가둔 것이냐”가 아니라 “왜 풀려나게 된 것이냐?”인 것인가.

삶과 영화는 다르다. 무엇이 닭인지 알인지, 삶을 담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삶이 닮아가는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 난 적어도 추석엔 모든 걸 멈추고 싶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이 텅 빈 헛간을 추석 때만큼은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먼 친척들이 보고 싶다. 추석 때만이라도 달 대신 해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다.

김병철(Contributing Editor)


이미지 출처 | Naver 영화, Warner Bros., 리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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