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LA 인물 열전 – 한국 컬트 영화의 교주, 김기영 감독

공감할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에게는 남몰래 즐기는 취미가 하나 있다. 이는 바로 나무위키를 통해 각종 유명 인사들의 삶을 엿보는 것. 팩트와 거짓 찌라시들이 뒤섞여 있는 그곳에서 개개인의 인생은 한 편의 소설로 되살아나는데, 비록 영양가 없는 TMI 대잔치이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미는 배가된다. 간혹 술자리에서 얘기라도 나오면 아는 척하기 딱 좋은 수준의 값싼 지식이랄까.

그동안 남모르게 즐겨왔던 이 취미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새로운 콘텐츠 ‘VISLA 인물 열전’을 기획했다. 이는 화려한 인생사로 20세기를 장식했던 국내외 다양한 인물들을 조명하는 콘텐츠로, 당시를 기억하는 30대에게는 흐릿한 향수를, Z세대에게는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정도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90%의 재미와 8%의 유익한 정보, 그리고 어쩌면 2% 정도의 교훈을 줄 수 있는 비즐라만의 전기(傳記)인 셈이다.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 덧붙이자면, 이 콘텐츠는 각 인물이 남긴 업적이나 작품 세계에 관해 논하기보다 이들이 얼마나 남다른 인생을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갖은 경로를 통해 최대한의 팩트 체킹을 거쳤지만 혼란한 인터넷 생태계의 특성상 불순한 가십들이 스며들었을 수 있으니,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발견한다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댓글로 친절히 알려주시길.


“하나의 유령이 한국영화 위를 떠돌고 있다. 김기영이라는 유령이. 이것은 한국영화계에서 드물게 만나는 영화 유산의 자의식이자 특정한 시대정신의 발현이다.”

영화 평론가 이연호
김기영 감독, 중앙일보

VISLA 인물 열전의 첫 주인공은 한국 컬트 영화의 교주, 김기영 감독이다. “하녀(1960)” 리메이크 시리즈로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세계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서 다뤄졌지만, 그의 기이한 삶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대중은 많지 않다. 특히 1960~70년대 한국 영화를 접해 본 적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의 이름조차 낯설게 다가올 것.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이 글을 통해 출생부터 죽음까지, 김기영 감독의 삶을 따라가 보자.


역사의 소용돌이 속 청년 김기영(1919~1955)

김기영 감독은 1919년 10월 1일, 서울 교동에서 태어났다(본인은 1922년생이라고 주장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있지만, 공식적인 자료로는 1919년생이다). 소학교 시절 그의 가족은 평양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창 시절을 쭉 이북에서 보내게 된다.

김기영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영화관을 드나들었으며, 이 덕분인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다방면에 재주가 있으니 소학교 선생밖에 못 하겠다”라는 말을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칭찬하는 건지 맥이는 건지 그 의도가 다소 헷갈리지만, 당시 문학, 미술 등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술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모양. 감독은 이후 이 말을 기억하며 “영화를 하면서 (그 재주를)다 써먹게 된 셈이다”라고 쿨하게 대꾸했다고.

학창 시절의 김기영,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기영은 서울로 상경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으나 아쉽게 낙방한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 넘어가 교토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는데, 이 시기에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꽃피우게 된다. 당시 한국과 달리 일본에는 이미 영화관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었으며 대학생들만을 위한 외화 상영관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김기영 감독은 영화관을 자신의 정신적 도피처로 여기며 즐겨 방문했지만, 그때만해도 그에게 영화 만드는 일은 “서양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의 특권”처럼 느껴졌다고. 그럼에도 이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 손목시계를 살 돈이 없어서 커다란 회중시계를 들고 매 장면(커트)의 시간을 재가면서 영화를 볼 정도였다.

광복 후 일본 유학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하는데, 그곳에서 평양 고보 동창생 김덕순을 만나 처음으로 연극을 제작하게 된다. 평양에서 막을 올린 그의 첫 작품은 프랑스 희곡 “상선 테나시티(Le Paquebot Tenacity)”. 이는 그의 첫 작품이었음에도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했는데, 당시 극을 검열했던 출판, 예술, 연극 담당 검열관은 공연을 준비한 학생들에게 모스크바 유학을 제안하며 크게 칭찬했다고(이때 김기영 감독을 도와 연극의 배경음악을 맡았던 학생은 이후 한국 클래식의 대부, 정진우 피아니스트가 된다). 김기영은 “상선 테나시티”를 시작으로 평양에서 다양한 공연을 올렸지만, 이후 신탁통치안이 거론되면서 도시의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서울로 돌아와 의학 공부와 연극 활동을 병행하게 된다.

김기영 감독의 결혼식,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1950년, 김기영은 의과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연수 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1950년은 6.25 전쟁이 발발한 해 아니던가. 전쟁이 터지자 그는 뜻하지 않게 부산으로 내려가 한 대학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김기영은 부산의 한 시장에서 서울대 연극부 활동을 함께 했던 치과대생 김유봉을 우연히 만난다. 그녀는 김기영을 보자마자 대뜸 “그 많던 애인들은 다 어디 갔어요?”라고 질문했는데(이 질문에 대해 김기영 감독은 “연극하던 여학생들 모두 내 애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라고 추억했다), 이에 대한 김기영의 대답이 더 가관이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다 없어졌어”라고 대답하며 “그럼 우리 어떡할래? 좋은 수가 없을까? 용두산 밑에 하꼬방 하나 지을게. 너 올래?”라며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를 시전했다. 놀랍게도 이 만남 이후 둘은 김기영의 말처럼 널빤지를 사다가 지은 판잣집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데, 훗날 김기영 감독은 이를 두고 “부모 의견이나 집안 사정을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마음 편히 마치 연극을 하듯이 판잣집에서 같이 살았다”라고 표현했다. 우연찮게(?) 김기영의 아내가 된 김유봉은 이후 치과 의사 생활을 하며 감독의 동반자이자 제작자로 작품 활동을 지원하게 된다.

아내를 만난 것 외에도 부산 생활 도중 김기영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마주하게 된다. 당시 주한 미 공보원(USIS)은 미국의 지배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기 위해 리버티 뉴스(Liberty News)라는 것을 제작했는데, 이 촬영지가 마침 진해와 마산 부근에 있었던 것. 김기영이 연극 연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 공보원은 그에게 문화 영화나 리버티 뉴스의 대본을 작성하고 편집하는 일을 제안한다. 당시 김기영이 대학 병원에서 일하며 받았던 월급은 삼천 원이었는데, 미 공보원이 그에게 제안한 액수는 무려 오만 원(!!). 김기영은 곧장 일자리를 옮겼고, 본격적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뜻밖의 행운을 잡게 된 이 시기를 두고 김기영은 “첫 월급 가지고 결혼식도 치르고, 피난 때 모두 굶주리는데 나 혼자 호화판이라 미안하기도 했다”라고 고백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일이었지만, 이 새로운 직장은 김기영에게 둘도 없는 기회였다. 당시 리버티 뉴스가 촬영된 상남 촬영소는 미국 여느 스튜디오 못지않게 훌륭한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스스로 연구해가며 영화를 배우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마치 ‘미국 유학을 다녀온 셈’이었다고. 이후 그는 공보원의 지원으로 1955년, 첫 장편 극영화 “주검의 상자”를 완성한다. 그는 조감독 시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데뷔한 특이 케이스로, 그동안 걸어왔던 삶처럼 예기치 않은 기회로 영화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영화 감독으로서의 삶 (1955~1998)

“김기영 감독님은 괴물이다. 우선 용모부터가 그렇다. 그는 큰 6척의 키와 거구의 몸체, 평생 감지 않은 부수수한 머리..(중략).., 부릅 뜬 가재 눈, 그리고 늘 경계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타인과 사물을 본다.”

영화 감독 유지형

작품 인생 초기에 김기영 감독은 사실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들을 제작한다. 리얼리즘 3부작으로 불리는 “초설(1958년)”, “십 대의 반항(1959년)”, “슬픈 목가(1960년)” 등이 대표적이며, 그의 진술처럼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영향을 받았던’ 시기였다.

“하녀” 전단지,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하지만 김기영 감독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그 이후인 “하녀(1960년)”부터 “충녀(1972년)”까지의 시기다. 당시 프로이트의 이론에 흠뻑 빠져있던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 독특한 연결고리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김기영은 1960년 개봉된 “하녀”를 원작으로 약 10년 단위로 리메이크작 “화녀(1971년)”와 “화녀 82(1982년)”를 발표했다. 또한 “하녀”의 변형판인 “충녀”를 제작했고, 이를 리메이크하여 “육식동물(1984년)”을 만들기도 했다. 그야말로 자기 복제의 끝판왕인 셈인데, 이 같은 스타일을 두고 영화 평론가 이연호는 “김기영 감독은 평생 한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 서른두 편은 단지 그것을 약간 다른 형태로 토막 냈던 절단의 역사일 수 있다”라고 평했다.

“하녀”는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영화적 자산의 일등보고’라고 평할 정도로 큰 애정을 품고 있던 작품으로, 해당 시리즈는 박정희 정권 아래 그 어느 때보다 남성성이 강조되던 시대에 여성 상위의 작품관을 담아내고 있다(이는 “육식동물”에서 정점을 찍는데, 작품 속에서 여성 캐릭터가 남성을 사실상 사육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특유의 기이한 분위기 탓인지 많은 사람들은 “하녀” 시리즈가 흥행에 실패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시리즈의 첫 작품인 “하녀”는 25만 관객을 동원했고, 이후 “화녀”와 “충녀” 역시 1971년과 72년에 각각 흥행 1위를 달성했다. 독보적인 색채의 작가이자 흥행 감독이었던 그는 이후 소림사 무술 영화가 인기를 얻자 “소림사 주천귀동(1982년)”을, 액션 영화가 인기를 얻자 “정무문 ‘81(1981년)”을 제작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대중적인 취향과 아예 담쌓은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김기영을 생각할 때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세계관을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이어도(1977년)”에서 죽은 이의 정액을 얻기 위해 시체의 성기에 관을 꽂아 산 사람과 섹스를 벌이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많은 팬의 기억 속에 충격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시리즈 내내 등장하는 쥐는 거의 그만의 시그니처로 자리매김했는데, “하녀”에서는 불쾌한 불청객 정도로 등장하지만 “충녀”에서는 아예 쥐 떼가 여주인공 위로 쏟아지기도 한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준비하던 “악녀”에는 쥐 만두가 등장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월트 디즈니(Walt Disney) 버금가는 쥐 사랑인 셈. 실제로 김기영은 “화녀”에 출연시킬 쥐를 집에서 직접 사육하고 훈련시켰는데, 이 쥐들이 번식해 수백 마리가 됐고, 잘 때 이불 속에 쥐가 들어와 있는 일도 있었다고. 김기영의 광팬을 자처하는 봉준호는 “히치콕에게 새가 있다면, 김기영에게는 쥐가 있다”라고 말했다.

김기영 감독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가 변태적인 수준으로 영화에 집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생전 개봉된 영화는 거의 다 챙겨 보았으며, 음악에 관한 관심도 지대해 한재권 음악 감독과 한 시간 동안 힙합을 주제로 대화할 정도로 트렌드에 밝았다고 한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지식을 토대로 그는 조명부터 디자인, 주제곡까지 모두 관여했는데, “주검의 상자”를 제작할 당시에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진사를 찾아가 직접 조명을 배웠고, “하녀”의 타이틀은 아예 자신이 직접 그리기도 했다. 당시 유명 감독들이 한 해에 영화를 열 편 이상 찍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음에도 그가 32편의 영화만을 남긴 것은 이 같은 완벽주의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금련” 작품 구상집 속 김기영 감독의 콘티,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또한 김기영 감독은 ‘콘티 없이는 한 장면도 찍지 못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항상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글씨와 그림으로 콘티를 짜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배우들에게 콘티를 보여주면 콘티대로 연기하지 않고 제 딴에 계산을 해 딴짓을 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일화로 윤여정은 “충녀”에서 침대 위에 쥐가 잔뜩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촬영했다가 매우 놀란 적이 있는데, 당시 김기영의 독특함에 질려 너무 힘들어서 평생 영화를 다시는 안 하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고.


죽음, 그 후의 이야기들 (1998~)

한 때 흥행에 크게 성공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김기영 감독이지만, 그 역시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유신 시대를 버텨내진 못했다. 영화사들이 통폐합되면서 영화산업이 독과점구조로 재편됐고, 그 역시 다른 영화사의 기획물들을 만드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전보다 강력해진 검열로 영화 상당 부분이 잘려나가거나 개봉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고, 그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이화시는 ‘외모에서 퇴폐적인 색기가 묻어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부터 배우 생활을 금지당하기도 한다. 결국, 한국 영화사의 한 대목을 장식했던 김기영 감독의 이름은 “육식동물”을 끝으로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김기영이 대중들에 의해 재발견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한국식 컬트 영화를 찾던 비디오 마니아들에 의해 발견된 그는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 같은 재평가의 열기에 힘입어 감독은 자신의 말년을 장식할 필생의 역작, “악녀” 제작에 돌입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 “악녀”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는데, 1998년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아 출국을 준비하던 김기영 감독 부부가 갑작스러운 화재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 1998년 2월 5일 새벽, 재기를 준비하던 김기영 감독은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기영 감독의 아들 김동원 씨는 이후 한 인터뷰에서 감독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 역시 그의 삶만큼이나 미스터리한 것이었다. 김기영 감독은 항상 남들이 꺼리는 흉가에서 살아왔다. 이전에 살았던 주자동 골목의 양옥집은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그 혼을 달래기 위해 집 안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놓고 살았으며, 그가 사고를 당한 명륜동 저택 역시 전에 살던 두 노부부가 이유 모를 사고로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 꺼림칙한 곳이었다.

사고 당일, 소식을 듣고 달려간 아들 동원 씨는 잿더미 속에서 비닐에 싸인 유서를 발견하는데, “동원아 보거라”로 시작되는 이 글의 도입부에서 감독은 마치 사고를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이 한옥을 사지 말자고 했는데 네 엄마가 우겨서 샀다”라며 아내를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기묘한 것은 그 다음 내용인데, 거기에는 “내가 공중에 떠서 우리 집 마당을 내려다보는데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다. 네(동원 씨)가 마당에 삼발이를 치고 땅을 파고 있는 것이 보인다”라고 적혀있었다고. 아들 동원씨는 감독의 묘사가 당시 자신의 모습과 너무 유사해 깜짝 놀랐다고.

불에 그을린 “생존자” 시나리오, 경향신문

김기영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2013년, 감독의 미개봉 시나리오 중 하나인 “생존자”가 불에 그을린 채로 발견된다. 김기영 감독은 1997년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시나리오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는 영화가 자신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고 있다고 말하며 “내가 어렸을 적에 강원도 금화군 금남면 양지리에서 살았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폭탄이 터지고 중공군 10만 명과 마을 사람들이 전멸했다. 이건 기록에도 남아 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의 생존자가 바로 나 하나다. 그래서 시나리오의 제목도 ‘생존자’다. 진짜 멋지지 않는가”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감독은 해당 내용이 모두 실화라며 인터뷰를 진행한 이연호 평론가에게 돌아가신 분들의 실명을 대기까지 했지만, 워낙 믿기 어려운 내용인 탓에 이연호 평론가 역시 실제인지 픽션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후 발견된 시나리오의 ‘제작 의도’ 부분에서 “모두 근거가 있는 에피소드로 엮여 있어 픽션과는 다른 차원의 감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는 내용이 또 한 번 발견되자 기자들은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그가 언급한 것과 비슷한 내용의 기밀해제 문서뿐만 아니라 한국전에서 원자탄 사용 논의와 관련된 문서도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생존자”에서 주인공 순자는 “유엔군이 이 황폐한 산골을 큰 도시 개성과 바꾼 이유를 아세요? 이곳을 내주면 안 됐기 때문이야. 우리가 가는 고려마을 입구 철조망 초소 저쪽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괴기한 사건(세균전)이 벌어져 30만 중공군이 하루아침에 소멸되고 고려마을 주민이 자취를 감춰 생존자가 한 명도 없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이는 미군이 세균전 등 전쟁 범죄를 숨기기 위해 서부전선이 아닌 동부전선을 지켰다는 뜻이며,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미 CIA와 한국의 정보기관이 그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추적해 암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비록 감독의 말처럼 시나리오 속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다양한 자료가 존재하지만 1998년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건에서는 미군 세균전 주장이 잘못된 정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중국의 군 고위층 관계자 역시 1997년에 쓴 회고록에서 세균전 주장이 ‘가짜 경보’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기영 감독의 기묘한 분위기에 설득력을 더하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김기영 감독,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이처럼 죽음 이후에도 갖은 수수께끼들로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김기영 감독. 그의 작품들은 이제 국내외 많은 이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으며, 특히 “하녀”의 경우 큰 인정을 받아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의 세계영화재단(WCF)의 지원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디지털 복원되기도 했다. 독보적인 작품성과 이상야릇한 인생사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그는 분명 우리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괴인이자 둘도 없는 천재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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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중앙일보,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