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거대한 창밖으로 보이는 비행기들을 본다. 누군가는 도착할 여행지의 풍경을 상상해볼 것이고, 누군가는 이 자리에 앉기까지 거쳐야 했던 준비 과정을 되짚어 볼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낯선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을 것이고,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헤아려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됐든 그때의 모든 생각은 안정을 주지만 지겹기도 했을 일상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 거리에 존재하는 새로운 가능성, 여행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지난 1년간 지겹게 해온 ‘여행 가고 싶다’라는 말엔 새로운 가능성의 욕구가 내포돼 있다. 결국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아주 잠깐 정도는 영화가 그 욕구를 해결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이번 비즐라 비디오 방을 준비했다. 우리가 소개할 두 편의 영화가 당신을 잠시나마 공항의 탑승구 앞 의자에 앉혀놓을 수 있길 바란다.
연애사진 (Collage Of Our Life, 恋愛寫眞)
공항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하다. 꼭 외국 여행이 아니더라도, 먼 지방에 갈 때 비행기를 이용하는 일도 꽤 새롭다. 개인적으로 공항 가는 길이 가장 설레던 순간은 어떠한 계획도 없이 바로 떠난 오키나와 여행이었다. 심지어 숙소도 전혀 예약하지 않은 채 떠났다. 결국 오키나와 공항에서 입국 심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추억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온다. 앞서 이야기한 공항 에피소드 역시 추억이 되었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지금 소개하려는 영화 “연애사진”의 대사다. 약 3회 정도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사진이야말로 추억을 생생하게 저장하기 좋은 매체이며, 작품을 스스로 정의하고 있는 대사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은 2003년. 주인공 ‘마코토(마츠다 류헤이)’에게 3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 ‘시즈루(히로스에 료코)’로부터 온 편지가 도착한다. 뉴욕에서 열리는 ‘시즈루’의 사진전에 초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녀가 보낸 편지와 사진들을 모두 버리는 마코토. 불현듯 추억에 사로잡히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평소 영화를 보며 영어를 익히던 마코토는 프로 카메라맨을 꿈꾸며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대학 생활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캠퍼스에서 사진을 찍던 마코토는 주머니에서 귤을 꺼내다가 떨어뜨리고 마는데, 굴러가는 귤을 잡은 수수께끼의 그녀 ‘시즈루’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마코토는 왜인지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그녀에게 관심이 간다. 둘은 점점 가까워지며 그들의 연애는 온통 사진으로 가득하다. 다시 2003년, 동창회에 참석한 ‘마코토’는 잘 나가는 동창들과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조용히 떠나려 하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시즈루’가 1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다시 집으로 달려가 쓰레기통을 뒤졌지만 주소가 적힌 편지 대신에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찍힌 사진을 하나 발견하고 무작정 뉴욕으로 떠난다. 마코토는 시즈루와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연애사진”은 독특한 작품세계로 2000년대 초반 많은 작품을 제작했던 츠츠미 유키히코(Yukihiko Tsutsumi) 감독의 영화다. 감각적인 영상미와 사이토 키요타카(Kiyotaka Saito)의 낭만적인 사진들로 가득 채워진 영화는 마치 사진 슬라이드 쇼를 보는 것처럼 정적인 사진으로 채운다. 영화의 영문 제목 “Collage Of Our Life”처럼 그야말로 콜라주인 셈. 한편 영화에서 공항은 마지막에 아주 잠시 등장한다. 뉴욕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주인공이 다시 도쿄로 돌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다. 사실 공항이라는 공간은 설렘과 아쉬움,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장소 아니던가. 그러나 영화에서는 공항이라는 공간이 주인공 마코토의 인생이 변화하는 주요한 배경이 된다. 영상미에 비해 내러티브는 다소 엉성한 점이 옥에 티로 남는 작품. 인간은 힘들었던 여행도 시간이 지나면 미화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급발진하는 듯한 이야기 전개와 당시 신인이었던 마츠다 류헤이의 아쉬운 연기는 어느새 잊히고 멋진 분위기만이 남는다. 거기에 더해 엔딩 크레딧에는 야마시타 타츠로의 “2000톤의 비(2000トンの雨)”가 흐르며 작품을 아름답게 매듭짓는다.
언젠가 다시 해외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면 코로나 이전과는 사뭇 다를 것 같다. 또 시장 같은 공항마저 반가움에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공항에서의 시간조차도 소중히 보내야 할지도.
최승원(Contributing Editor)
타락천사(墮落天使: Fallen Angels)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타락천사(墮落天使: Fallen Angels)”는 그의 또 다른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이 개봉한 이듬해인 1995년에 개봉했다. 이 시기의 많은 홍콩 영화는 중국 반환에 대한 불안감과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 그리고 반환 이후 사무치게 밀어닥칠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왕가위는 그런 상황과 감정을 자신의 스타일로 구현하는 데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손꼽히고, 그의 작품을 얘기할 땐 언제나 그의 스타일에 대한 얘기가 따라붙으며 “화영연화(In The Mood For Love)”나 “해피투게더(春光乍洩: Happy Together)”가 인용된다. 나 역시도 두 영화를 매우 좋아함은 물론, 왕가위의 영화 중 중경삼림을 최고라 여기지만, 오늘은 타락천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 동전의 양면 같은 이 두 영화를 통해 왕가위는 1997년이 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홍콩을 담고자 했다. “중경삼림”이 낮의 홍콩이라면 “타락천사”는 밤의 홍콩이다. 이것이 내가 “중경삼림”이 아닌 “타락천사”를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낮을 채워낼 수 있는 건 굳이 영화가 아니어도 많으니까. 하지만 밤이 되고, 문 닫은 가게들 앞을 걷는다거나, 집에 홀로 앉아 핸드폰 화면이나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채워지지 않는 여백들을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따라붙고, 그때 가장 적절한 영화는 “타락천사”다. “타락천사”보다 뜨거운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영화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왕가위는 자신의 영화가 홍콩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 감독이다. 그리고 그가 홍콩을 얘기하는 방식은 언제나 적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그들 사이의 관계성이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 대해 왕가위는 “중경삼림의 인물들은 타인이지만 결국 연결됩니다. 타락천사에서는 그 반대고요.… 물리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어도 서로 멀리 떨어져 보입니다”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요즘의 관계가 ‘중경삼림의 방식이다’ 또는 ‘타락천사의 방식이다’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러나 여행 욕구가 끓어 넘치기 직전이라면, 그때 어울리는 영화는 “타락천사”일 것이다.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에디터 │ 최승원, 최직경
이미지 출처 ㅣ Naver 영화, Shochiku (松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