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LA 인물 열전- 이상과 김환기 그리고 김향안

단편 소설 ‘날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근대 작가 이상. 그리고 대한민국 미술 역사상 최초로 100억 이상의 경매가를 달성한 화가 김환기. 대한민국 근현대예술에 한 획을 그은 이 두 거장 사이에는 ‘김향안’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이 여인은 많은 이들에게 “두 천재의 아내”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는 그 이전에 뛰어난 수필가이자 화가, 예술 경영가였다. 남성 위주의 예술사에서 도외시되었던 그녀의 삶은 더 많은 관심과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예술과 생존의 두 가지 싸움을 모두 이겨내며 김환기 화백의 성공을 진두지휘한 김향안이 ‘VISLA 인물 열전’, 그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상과 변동림의 시대

김향안(金鄕岸·, 본명 변동림)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독서를 너무 좋아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을 정도였던 그녀는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여성으로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던 셈인데, 이런 그녀의 삶은 천재 시인 이상을 만나게 되면서 급작스러운 변화의 물살에 휩쓸리게 된다.

이상과 막역한 사이였던 화가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동생이었던 김향안은 구본웅의 소개로 이상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이상은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아주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3세가 되던 해 각혈로 조선 총독부 건축기사 일을 그만둔 그는 기생 금홍과 동거하며 ‘제비’ 다방을 운영했지만, 이내 외도와 육체적 쾌락에 눈이 멀어버린 금홍에게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 ‘돈도 벌어올 줄 모른다’라며 천대받은 끝에 2년 만에 다방과 애인 모두를 잃고 만다. 새로 개업한 카페 ‘쓰루’와 다방 ’69’마저 연이어 파산하자 이상은 가족을 빈민촌으로 이사시키며 죄책감과 무능력에 힘겨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구본웅의 소개로 창문사에서 근무하던 이상은 김향안을 소개받는다. 두 사람은 매일같이 만났으며, 청량리 밖 갈대숲을 즐겨 거닐었다.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이상은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어디 먼 데 갈까?”라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데, ‘먼 데 여행이 맘에 들었고 또 죽는 것도 싫지 않았던’ 김향안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이 남자에 흥미를 느껴 고백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곧바로 집을 나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후일 동경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양가의 허락 아래 서둘러 결혼식을 올린다. 둘이 달콤한 밀월 생활을 보내던 1936년에 이상은 ‘지주회시’와 ‘날개’를 발표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두 젊은이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 같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절대 순탄치 않았다. 김향안은 빈민가에 사는 이상의 가족들까지 책임지기 위해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했지만 입에 풀칠만 겨우 하는 정도였고,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비참한 현실을 마주한 이상은 결국 1936년 10월, 결혼 4개월만에 새 출발을 위해 홀로 동경으로 향한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동경이었지만, 그곳에서의 현실도 그에게는 가혹기만 했다. 꿈꾸던 모습과 다른 동경의 실상은 그에게 환멸감만 가져다주었으며, 설상가상 폐결핵까지 더욱 악화됐다.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라는 편지를 쓸 정도로 자괴감에 시달리던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햇빛도 들지 않는 방으로 홀로 은거해버린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937년 2월, 이상은 불령선인, 즉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는데, 한 달 넘게 갇혀있는 동안 폐병이 더욱 심해져 결국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김향안은 이상이 세상을 떠나기 전 동경으로 달려가 그의 임종을 지키는데,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이상의 마지막 유언은 “셈비키야(千疋屋, 일본 고급 과일 디저트 판매점)의 멜론을 먹고 싶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멜론을 사 왔지만, 이미 그는 멜론을 받아넘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훗날, 그녀는 자신이 ‘철없이’ 멜론을 사러 나가지 않았으면 이상의 마지막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1937년 4월 17일, 김향안은 그렇게 짧은 결혼 생활을 마무리했다. 훗날 김향안은 ‘실화(失花)’, ‘종생기(終生記)’ 등 이상의 작품 속 여인이 자신일 것이라는 일부 평론가들의 오해 탓에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며 이상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의 천재성만큼은 절대로 깎아내리지 않았다. 다음은 그녀가 비운의 천재 작가, 이상에 남긴 평가다:

“이상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인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고 소멸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김향안

김환기와 김향안의 시대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낸 김향안은 한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지만, 언제까지 슬퍼할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간간히 수필과 소설을 기고하며 지내던 그녀는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쓰오(則武三雄)의 소개로 총독부에 취직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소개로 두 번째 사랑,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당시 김환기는 이미 딸을 셋이나 둔 이혼남이었고, 김향안 역시 그를 ‘키만 큰 시골뜨기’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김환기가 김향안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글솜씨 덕분이었다. 그는 첫 만남 이후 부지런히 편지를 보냈고, 김향안은 훗날 그의 편지에 대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글’이었다고 평하며 둘의 사이가 편지로 가까워졌다고 회고했다.

김향안에게 보내는 김환기의 편지는 늘 다정했다, News1

꾸준한 교류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신한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하지만, 김향안의 가족이 애가 딸린 이혼남을 반길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하의 김향안이 포기할 리가. 스물여덟의 어린 나이에도 배짱이 두둑했던 그녀는 김환기의 아이들에 대해 “열이면 어때? 데려다 교육하면 되지”라고 당차게 선언하며 그의 딸 뿐만 아니라 홀어머니까지 모두 품기로 한다. 그렇게 1944년 5월 1일, 김향안은 결국 김환기와 결혼하며 본명을 ‘김향안’으로 개명한다(혼동을 막기 위해 본문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김향안으로 통일했지만, 결혼 전까지 그녀의 이름은 변동림이었다). 김환기의 성을 따라 김 씨로 바꾼 점이나,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鄕岸)’을 가져다 쓴 점을 보면 당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결연했는지 알 수 있다.

1944년 5월 1일 종로 기독교회관 결혼식 , 환기 미술관

비록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김향안은 특유의 살뜰함으로 김환기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녀는 살림이 어려울 때에도 백자 항아리를 사 들고 오는 김환기를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으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힘들었던 피난 시절에도 그를 탓하기는커녕 “나는 내 힘으로 내 아이들을 길러낼 아무런 실력도 없는, 오직 남편에게 기생하는 생활 무능력자”라며 자신을 탓했다. 생계를 위해 친구들에게 그림을 팔러 다녔던 것도 그녀였고, 생활비가 부족할 때 쌀을 꾸러 다녔던 것도 그녀였다. 이 같은 희생 덕분이었을까, 해방 후 김환기는 국립 서울대학의 미술학부 강의를 맡게 되었고, 국전 심사 의원과 서울시 문화 위원으로 일하는 등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가게 되었다. 훗날 김환기가 고국의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네 엄마의 희생적인 노력과 협조가 아니고는 나는 잠시도 편히 붓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쓴 것처럼, 김향안은 김환기의 재능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투자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환기 미술을 세계로 : 프랑스 시대

김향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꾸준히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던 김환기는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그의 파리 데뷔 역시 김향안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인데, 이에 대한 일화는 그녀의 당찬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술에 취해 귀가한 김환기는 김향안을 붙잡고 세계 수준에서 볼 때 자신의 예술이 어느 즈음에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며 절실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김환기로서는 오랜 기간 품어 온 고민이었을 텐데, 이에 대한 김향안의 대답은 오히려 짧고 시원시원했다:

“나가 봐!”
“어떻게?”
“내가 먼저 나가볼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바로 다음 날, 김향안은 곧장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 출국을 준비했다.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높일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남편을 데뷔시키기 위한 사회적 기틀을 다져놓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녀는 1955년, 혈혈단신으로 프랑스로 날아가 파리 소르본 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어학을 공부하고, 연줄이 없으면 얻기 어렵다는 아틀리에(작업실)까지 미리 마련해두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1956년, 김환기는 김향안의 부름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세계 시장에서의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1957년), 환기 미술관

김향안은 프랑스에서도 김환기 대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녀는 이제 단순한 후원자가 아닌 동등한 ‘예술적 파트너’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수준급의 프랑스어 실력을 갖췄던 그녀는 김환기의 통역사이자 대변인이었으며, 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작업에 협조했다. 피카소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신문에 피카소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전문을 번역해 식탁 위에 올려두기도 했다고. 당시 김환기가 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의 미술적 안목을 칭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는 “네 엄마만 해도 지금 미술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굉장해졌다. 네 엄마의 지도만 받아도 네가 재주와 노력만 있으면 훌륭한 미술가가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어진 프랑스 생활 동안 김환기와 김향안은 파리, 니스, 브뤼셀, 피렌체, 모나코에서 5차례의 개인전을 열며 김환기 미술을 세계 시장에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1959년부터 1963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으며, 김향안과 함께 더욱 큰 세계로의 비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환기 미술의 완성 : 뉴욕 시대

김환기가 홍익대학교 학장으로 근무하면서 부부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학장 일이 적성에 잘 맞지 않았던 김환기는 다시금 세계로 나갈 틈을 엿보았다. 그러던 와중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를 계기로 큰 자극을 얻은 그는 이번에는 뉴욕으로 떠나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예술적 파트너 김향안과 함께 재산을 정리하여 1964년, 또 한 번 먼 길을 떠난다.

뉴욕에 첫발을 디딘 부부는 약 1년간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자리를 잡지만, 지원이 끝나버리자 또다시 고약한 생활고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김향안이었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김환기를 도왔고, 끝없이 밀려드는 영감 속에서 김환기가 오롯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보필했다.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뉴욕에서 당시 가장 높은 관심을 받던 장르는 팝아트였다. 미술의 다양성을 직접 마주하게 된 김환기는 다양한 화면 구성과 재료를 활용하여 예술세계를 발전시켰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점을 찍듯 완성하는 추상화의 형태로 점차 전환해 나갔다. 하루 16시간씩 작업하는 등 작품 활동에 온전히 몰두했던 그는 마치 방망이를 깎는 노인처럼 김환기 미술을 완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그 결과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비롯한 대표작 여러 점을 완성한다.

그렇다면 이 기간에 김향안은 무슨 일을 했을까? 생계를 책임지는 것 외에도 김향안은 파리와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썼는데, 특히 미술 원고와 에세이를 주로 썼다고 한다. 김환기는 남편에게 필요한 일을 하느라 수필보다 미술 원고를 많이 쓰게 된 김향안에게 미안한 마음을 종종 표현했는데, 그는 “아내는 소설을 쓰고 싶은 모양인데 나 때문에 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참 아내를 혹사한 것이다. 소설을 못 써도 아내는 불평이 없다. 나는 아내에게 하숙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홀로 피운 꽃

뉴욕에서 고행에 가까운 작업량으로 몸을 혹사한 김환기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어갔고, 1973년 4월, 존경하던 피카소의 부고 뉴스까지 전해 들은 그는 급격히 기력을 잃기 시작한다. 결국 병원에서 목 디스크 판정을 받은 그는 사랑하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수술을 결정하지만, 수술 도중 그만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1974년 7월 25일, 김향안은 그렇게 자신의 이름마저 바꿀 정도로 사랑했던 김환기를 먼 곳으로 떠나보낸다.

오랜 벗이자 예술적 파트너였던 김환기의 죽음은 김향안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환기는 떠났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널리 알리겠다는 김향안의 다짐은 오히려 더욱더 단단해질 뿐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예술 경영가로서 김향안의 진가가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된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김향안이 가장 먼저 진행한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환기의 회고전이었다. 그의 자취를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그녀는 몇 군데에 전시 신청을 넣었고, 제13회 상파울루 비엔나레에서 가장 먼저 승낙 연락을 받았다. 그녀는 제출 마감일에 맞춰 작품을 발송하는 일부터 전시에 필요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작업까지 손수 진행했고, 그 결과 1975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성공적으로 김환기의 회고전을 개최한다.

전시를 개최하는 것 외에도 김향안은 김환기를 소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섰다. 글솜씨를 발휘해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예술전문잡지 ‘공간’에 김환기에 대한 글을 10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으며, 그에 대한 해외 미술 평론가들의 글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976년 7월, ‘공간’에 실린 카터 래트클리프(Carter Ratcliff)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의 리뷰로, 이 같은 작업은 국내 독자들에게 김환기의 국제적인 위상을 각인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외에도 그녀는 국내외 매체에 작품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개재될 경우 수정을 요청하고, 각종 오해를 바로잡는 등 김환기 미술의 수호자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김향안의 “아네모네”, 환기 미술관

김향안은 미술 경영인으로서 바쁜 삶을 이어가는 와중에 직접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그림을 시작한 그녀는 1964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했으며, 자신의 작품들로 1977년과 1988년에는 뉴욕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는 한 글에서 자신의 ‘아네모네’라는 작품을 두고 “내가 봐도 놀랍게 아름답다”라며 만족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환기 미술관 내부, 환기 미술관 공식 페이스북

이렇듯 남편의 죽음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활동을 이어 온 그녀이지만, 이 모든 일 중 최대의 업적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이들은 단연코 환기 미술관을 꼽을 것이다. 김향안이 미술관 설립을 마음먹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김환기 미술을 위한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술관 건축을 결심하기 전, 김향안은 항상 김환기가 남긴 작품들을 세계의 미술관에 기증하겠노라 공공연히 밝혀왔다. 미술 작품을 공적인 자산으로 봤던 그녀는 자신의 글을 통해 “그림은 아무리 돈을 주고 샀다고 해도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예술의 진가는 국제성을 지니며 공적인 관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서고 무식한 수장가의 손에서 예술이 학대될 때는 사회가 수장가를 고발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작품 대여를 거부하는 수장가들을 두고 “문화를 거부하는 무식한 사람은 미술 수장의 자격이 없다”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던 와중, 해외에서 진행된 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녀의 생각이 달라진다. ‘마치 남의 집을 빌려서 우리 미술관을 연 것 같은 실감’이 들었던 그녀는 이내 우리 집을 만들고 미술관을 만들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김환기 미술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명실공히 세계의 일류 미술관들과 손색없는 국제 미술 경연과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미술관을 말이다.

1975년 파리에, 그리고 1979년 뉴욕에 환기재단을 설립한 바 있는 김향안은 1989년에 이 두 재단을 통합하여 서울로 옮겨오는데, 이 재단을 기반으로 1992년 11월 5일,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환기 미술관이 부암동에 개관한다. 미술관의 설계는 세계적인 건축가 우규승이 맡았고, 폼피두 미술관 관장이었던 미술 행정가 도미니크 보조(Dominique Bozo)도 참여했다. 김향안 본인 역시 미술관 쪽마루의 나무 한쪽 마저도 그림의 결과 맞추려고 애썼을 정도로 미술관 설립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이처럼 많은 이들의 노력이 모인 이 미술관은 김환기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특히 높은 천장 덕분에 대형 컨버스 작품들까지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평소 “김환기의 영혼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라고 말하던 김향안은 이 미술관을 통해 김환기와 자신의 영혼이 영원토록 머물 집이자, 후대를 위한 예술적 안식처를 마련했다.

이후에도 김향안은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김환기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남편이 죽은 지 꼭 30년 만인 2004년 뉴욕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혹자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두고 “김환기가 꿈을 꾸면 김향안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라고 평했다. 대중은 그녀를 ‘두 천재의 뮤즈’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그녀의 진정한 역할은 예술의 협조자였던 셈. 이제 ‘화가의 아내’라는 진부한 타이틀은 접어두자. 김향안, 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더욱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길 바라본다.

환기 미술관 공식 웹사이트


이미지 출처 |   COURTESY OF WHANKIMUSEUM,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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