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LA VIDEO ROOM – 영화제

전체 객석의 30%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렇게나마 자리를 마련한 2021년 22회 전주영화제는 지난 5월 8일 극장 상영작의 93.3%를 매진시키며 막을 내렸다. 영화제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이 수치가 주는 뭉클함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매년 영화제를 갔거나, 혹은 영화제에 필름 한 컷 만큼의 추억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감상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작년의 수치는 0%, 즉 전주에선 영화제가 열릴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매년 5월이 되면 전주로 향하는 버스 티켓을 예매하며 영화제의 의미를 생각해 보곤 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영화들을 가장 빠르게 볼 수 있는 곳, 혹은 영화라는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단어 하나 아래 모인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적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곳’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곳’은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니, 내게 영화제는 공간으로 인식돼 있었나 보다. 현실과 스크린의 경계에 언제나 영화가 존재해 왔다고 믿었는데, 그 경계를 확장해 잠시나마 넓은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영화제가 아닐까 생각해보며 적는다. 이번 비디오 방에선 영화제에서 만난 잊을 수 없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트레인스포팅2 (T2: Trainspotting 2)

1000만 관객 시대 도래 이후 한국영화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나 거대 자본과 극장의 상영시간 독과점이 이뤄낸 결과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반면,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시대의 흐름과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일지라도 예술적으로 인정 받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영화제가 우후죽순 늘어났다(그러다보니 한국에는 영화제가 정말 너무 많다). 영화제가 영화인을 위한 축제임에는 틀림없지만 결국 관객 입장에서는 기존의 상업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고, 보다 더 가깝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특히 정식 개봉전에 영화제에서 미리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영화에 푹 빠져 있는 씨네필과 평론가, 기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방문했던 나는 영화는커녕 가맥집에서 술독에 빠져 5일을 보냈다. 숙취에 시달리며 전주 영화의 거리를 걷다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인 남자 4명의 스틸컷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20년 만에 돌아온 대니 보일 (Dany Boyle)감독의“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의 후속작 “트레인스포팅2 (T2: Trainspotting 2)”였다. 정식 개봉을 학수고대해왔던 나는 국내 상영관에서 만날 수 없어 아쉬워했는데,극장의 환경에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전주국제영화제, 단 한 번이었기에 놓칠 수 없었다.

혹시 “트레인스포팅”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마크 ‘렌트 보이’ 렌튼(이완 맥그리거), 사이먼 ‘식 보이’(조니 리 밀러), 다니엘 ‘스퍼드’(이완 브램너), 프랭코 ‘벡비’(로버트 칼라일), 이 4명의 답 없는 젊은이가 큰 거래를 마치고 호텔에서 자고 있을 동안, 마크는 모든 돈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위해 그리고 ‘Choose Life’를 우리에게 건네며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20년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마크는 여전히 약과 재활을 오가는 삶을 사는 스퍼드를 만나고, 여전히 포주와 마약 거래를 하고 있는 식 보이와의 격한 재회를 한다. 한편 수감중이던, 벡비는 탈옥을 감행하여 장성한 아들을 만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도둑질을 가르친다. 나이만 먹은 아저씨일 뿐 그들은 여전히 20년전 그대로의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물론 비아그라를 먹지 않고서는 발기 하지 못 할 만큼 세월을 이겨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한편 마크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있는 동안 네덜란드에서 이혼을 당하고, 실업자인 신세로 내몰리며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와중에 다시 돌아온 것인데, 다시금 ‘큰 건’을 한 바탕하기 위해 사이먼과 스퍼드와 결탁하여, 사이먼의 매춘 사업을 위해서 다시 뭉친다. 그러나 탈옥한 벡비가 클럽에서 마크를 발견하고 20년 전의 설욕을 만회하기 위해 그를 쫓는다. 과연 이 아저씨들의 재회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트레인스포팅2”는 전작을 좋아하던 팬에게는 반갑고 선물 같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마크가 이야기하던 ‘Choose Life’는 좋았던 것, 잃었던 것 그리고 후회하는 것 등 그동안의 삶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또 과거에 대한 회상신 (Scene)이 오버랩되고 추억에 잠기게 하고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또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아직도 청년 시절의 뜨겁고 혼란스러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특히 이완 맥그리거의 여전한 미소가 재현되면서 전작과 비교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뛴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트레인스포팅2”는 마치 “트레인스포팅”의 리마스터링 버전인가 하는 착각에 들게 만든다. 전작의 독특한 화면 구도와 미장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업그레이드된 선명한 영상과 CG, 그리고 감각적인 OST가 바로 그 이유일터. 언더월드(Underworld)의 “Born Slippy”를 리믹스한 “Slow Slippy”는 이들의 젊은 시절의 회상 신(Scene)에서 드라마틱하게 흐른다. 또 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 이기팝(Iggy Pop)의 “Lust for Life”가 프로디지(The Prodigy)의 리믹스 버전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감독과 배우, 그리고 OST를 담당하던 음악가들 역시 나이가 들어버렸지만, 아직도 젊은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다. 마치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낸 것처럼.

하지만 전작을 봤던 사람과 이 작품을 새롭게 접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나이에 따라 전해지는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전작과는 다르게 템포가 느리고 박진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며,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포인트가 없다. 심지어 어떤 늙은 아저씨들의 철없는 생활과 범죄, 폭력이 뭐가 좋다고 지켜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 또 새로운 인생을 택하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마크가 다시 한번 헤로인을 주사하는 모습은,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순을 그려낸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방황과 힘든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 “너의 미래를 선택해(Choose your Future)”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는 마크의 모습을 우리는 단순히 넘길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살 것인가?

최승원(Contributing Editor)


나폴리: 작은 갱들의 도시(Piranhas)

필름 느와르를 구성하는 조건을 열거해 보자. 도시를 담을 것, 도시를 닮을 것, 도시의 매끈한 표면을 아름답게 담을 것, 아름답게 담긴 매끄러운 도시 이면의 불안과 편린을 놓치지 않을 것. 폭력이 담길 것, 담긴 폭력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것 등등. 잠깐 머리를 굴려 적어 본 이 필름 느와르의 조건은 내가 필름 느와르의 팬인 이유와도 동일하다. 매해 수많은 필름 느와르가 쏟아지고, 대부분 실패한다. 당장 기억을 더듬어 봐도 필름 누아르 하면 떠오르는 감독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 ,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몇몇 더 있지만 아무튼. 그리고 여기에 이제 이름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이다. 바로 지금 소개할 “나폴리: 작은 갱들의 도시(Piranhas)”를 만든 이탈리아의 젊은 감독 클라우디오 지오바네시(Claudio Giovannesi)의 이름 말이다.

“나폴리: 작은 갱들의 도시”는 2019년 전주영화제 개막작이었고, 난 상영 10분 전 직거래를 통한 끝에야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앞에서 두 번째인 B열에 앉아, 목을 위로 쳐들어야 하는 다소 불편한 자세로 영화가 시작되는 걸 지켜보며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금세 그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타이틀이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단 한 순간도 쳐든 목을 내리지 않고 스크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해왔던 완벽한 필름 느와르가 거기 있었다.

나폴리는 알다시피 마피아의 순리 아래 작동하는 도시다. 영화는 이 도시를 10대 갱들이 집어삼키는 과정을 따라가며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깊게 시선이 박히는 건 도시의 풍경이다. 스쿠터를 타는 아이들, 스쿠터가 좁은 골목을 따라 꺾어질 때마다 등장하는 더 좁은 골목, 부식된 건물의 외벽과 그 위로 널려 있는 옷가지들. 그 위로 총성이 울리고, 불길이 치솟고, 피가 튄다. 감독은 이를 전혀 스펙터클로 만들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이 담담한 진실성이 오히려 나폴리의 스펙터클을 집어삼킨 뒤 관객에게 다가온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현재 국내에선 볼 수가 없고,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에선 원본 파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다거나, 뭔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일을 진행해 극장으로 옮겨주길 바란다.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에디터 │ 최승원, 최직경
이미지 출처 ㅣ Sony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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