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랄프 로렌(Ralph Lauren)의 이미지가 어떨지 모르겠다. 차분한 선의 정돈된 슈트, 정갈한 넥타이를 맨 중년이 있을 수 있겠고, 2000년 초 중반 유행했던 발랄한 폴로 모자와 피케티, 혹은 귀여운 폴로 베어가 그려진 스웻셔츠를 입은 학생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랄프 로렌을 입는 갱(Gang)이라면?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의 로-라이프(Lo-Life)는 폴로만을 입는 갱이다. 80년대에 이르러 폴로(Polo)는 힙합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는 자칭 폴로 마니아였고,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래퀀(Raekwon) 역시 폴로를 즐겨 입었다. 힙합과 갱, 그리고 폴로. 뭔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들의 모토는 돈(Money)과 여자(Hoe’s), 그리고 옷(Clothes)으로 정의되며, 여기서 옷은 오직 폴로를 의미한다. 그들을 지칭하는 로-라이프의 로(Lo)는 역시 폴로의 ‘로’.
로-라이프의 로고
Big Vic Lo, 후에 Thirstin Howl III 라는 이름의 래퍼로 활동한다.
뮤직 비디오에서도 나타나는 Thirstin Howl III의 폴로 사랑
로-라이프의 기원은 로-라이프의 아버지와도 같은 빅 빅 로(Big Vic Lo)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빅 빅 로는 로-라이프의 전형으로, 여자의 전화번호를 얻기 위해 수작을 걸다 “You are Low Life!(야 이 저급한 새끼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빅 빅 로는 주눅이 들긴 커녕 “그래 맞아 난 매일 (Po)Lo를 입어, “Lo”는 내 삶이야!”라고 외쳤고, 동시에 빅 빅 로 주변의 친구들 역시 “Lo Life”를 외치며 동조했다. 이게 공식적인 로 라이프의 출발점이다. 이들은 브루클린 주변의 랄피 키즈(Ralphies Kids), POLO U.S.A(United Shoplifters Association) 등 폴로를 추종하는 집단들과 함께 ‘로-라이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랄피 키즈와 POLO U.S.A 등의 그룹은 여전히 존재하며, 로-라이프는 그들을 통칭하는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겠다.
폴로 애호가로 알려진 래퀀과 저스트 블레이즈
폴로는 흑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지방시(Givenchy)나 발망(BALMAIN)과도 같은 명품 브랜드가 힙합 아티스트의 위, 아래를 책임지고 있었다면, 80년대는 폴로의 전성기와도 같았다.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거리에서 아직 아마추어였고, 아이조드(IZOD)는 너무 구식, 베르사체(Versace)는 노토리우스 비아이지(Notorious big) 이전에는 힙합패션 사전에 등재되어있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의 백인 상류층을 겨냥한 폴로가 어떻게 거리의 가난한 흑인과 라틴계 청소년들에게 선택되었는지 의아한 일이나 폴로는 그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폴로의 세련된 디자인도 한몫했겠지만, 뉴욕 외곽에 위치한 빈민가 브롱스(Bronx)에서 태어나 큰 업적을 이룬 랄프 로렌의 성공신화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생생한 컬러와 대담한 디자인을 갖춘 폴로는 그 누구라도 마다할 수 없는 멋진 옷이었다.
여러 로-라이프의 모임
FRANK151의 로-라이프 인터뷰 영상
문제는 이들이 폴로를 손에 넣는 방법에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마땅한 직업이 없거나, 모든 옷을 폴로로 구입할만큼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대신 맨해튼 부근의 상점가를 다니며 폴로의 의류를 닥치는 대로 훔쳐 입었다. 로-라이프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상점가를 습격해 고가의 폴로 아이템을 훔치고, 다음날인 일요일에 브루클린의 스케이트장 한구석에 모여 서로 패션쇼를 여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이들의 목표는 역시 여자였으니 밖에서 바라본 스케이트장 속 로-라이프의 모습은 폴로로 자신을 한껏 치장한 수컷 공작새 무리를 방불케 했을 것이다.
다양한 의류의 모티브가 된 폴로의 스노우 비치 재킷
고가에 판매되고 있는 빈티지 폴로 의류
폴로의 많은 아이템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의류는 화려한 색감과 함께 큼지막한 로고가 더해진 옷이다. 저스트 블레이즈와 래퀀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스노우 비치 재킷은 로 라이프에서 전설적인 아이템이 되었으며, 다양한 브랜드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 의류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외 P-Wing 셔츠와 실크 크레스트 셔츠 역시 여전히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베이(eBay) 검색창에 빈티지 폴로를 검색하면 당시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기 수월할 것이다.
일본의 로-라이프
프랑스의 로-라이프
로-라이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뉴욕 거리의 갱으로부터 시작된 이 문화는 현재 미국을 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폴로는 단순한 브랜드를 넘어 1980~90년대를 상징하며, 당시의 문화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아이템이다. 지금에 이르러 로-라이프는 갱보다는 하나의 의복문화가 되었다. 현재 국내에도 빈티지 폴로를 사 모으며, 90년대 느낌을 재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라이프가 아닌 lo-life.kr을 기대함과 동시에 단순한 수집이 아닌 문화로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