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S #3. 나루토 런

생사가 달린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일말의 추태 역시 허용되지 않는 만화 속 히어로들에게 ‘어떻게 달리느냐’ 하는 문제는 분명 만화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 팔짱을 낀 채 상반신을 고정하고 달리는 십걸집 달리기부터 두 팔을 벌리고 해맑게 전진하는 아라레 달리기까지. 수많은 만화 속 달리기가 진성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연되어 온 가운데 드높은 만화의 명성만큼이나 단연 최고의 폼이라 평가받는 체술이 있으니, 바로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달리기 나루토 런(Naruto Run)이 그렇다.

마사시 키시모토(Kishimoto Masashi)의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나루토(Naruto)’는 닌자들의 화려한 손기술과 체술은 물론, 독특한 뜀박질 자세로 숱한 만화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양팔을 번갈아 흔들며 있는 힘껏 질주하는 인간계 달리기와 달리 상체를 숙인 채 팔을 뒤로 젖혀 달리는 닌자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도 사실. 실제 이 자세로 달려보면 그 어정쩡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나루토 속 닌자들은 모두 철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데, 이쯤 되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나루토 런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속사정이 심히 궁금해진다. 이번 VVS에서는 나루토 런이 행해질 수밖에 없던 합리적 추측과 그와 관련한 이모저모를 정리해 보았으니, 만화의 내용보다 부스러기에 더 관심이 많은 이라면 함께 즐겨보길 권한다.


1. 실용성

나루토 런이 행해지는 가장 첫 번째 이유로는 물리적 효율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닌자 입장에서 말이다. 상체를 앞으로 숙임으로써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고 신체의 표면적을 줄여 적에게 피격당할 확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 뿐만 아니라 팔의 움직임을 최소화해 소음을 줄일 수 있으며, 나루토 세계관에서 에너지를 뜻하는 차크라를 방출한다는 썰도 있으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팬들이 지어낸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루토 런의 효용성을 현실 세계에서 검증하기 위해 나선 이들도 많다. 유튜브 채널 ‘SoraNews24’의 진행자 카일 힐(Kyle Hill)이 2012 런던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제네바 타르모(Jeneba Tarmoh)와 함께한 영상이 그 대표적 예. 50 미터를 구부정한 자세로 세 차례 달린 제네바의 기록은 일반 달리기보다 약 0.21초 느려진 것으로 확인됐다(만화처럼 정확한 나루토 런 자세는 아니었다). 수치상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팔을 뒤로한 채 달린다는 위험 부담과 가슴을 앞으로 내밂으로써 체중이 쏠리는 현상이 달리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고. 이에 더해 균형 감각을 포기해야 하는 점과 무릎을 올리며 달리지 못하는 점 또한 나루토 런의 최대 단점이라 덧붙였다. 

2. 예산 절감

어찌보면 가장 납득하기 쉬운 현실적 문제, 돈이다. 보기와 달리 인간의 달리기는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한 시스템 아래 작동하고 있는데, 한쪽 팔과 반대편 다리가 동시에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하는 것은 물론, 이를 뻗는 타이밍이나 관절의 각도, 헐떡이는 숨,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중 어느 하나만 조금 틀어지더라도 굉장히 어색해 보이는 게 바로 달리기 모션이다. 가뜩이나 전투 장면이 주를 이루는 나루토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컷마다 이를 세심하게 디자인한다는 말은 사실상 비용과 시간을 무한정으로 투자한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렇기에 상체를 고정시킨 나루토 런은 애니메이터와 제작사 모두에게 분명 단비 같은 존재일 것. 

3. 가오

마지막으로 가오, 즉 멋의 문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낭만적인 전투 장면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이 시대 만화 주인공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명분이 있을까. 이는 분명 만화 팬들 또한 지극히 바라는 바일 터. 우리들의 고독한 닌자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천방지축 달려 나가는 모습만큼 추태도 없을 테니 말이다. 가벼운 담화는 물론 어떤 심각한 이야기를 하며 달리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닌자의 덕목 아니겠는가. 앞서 애니메이션 제작에서의 돈 문제를 언급했지만, 나루토 런은 제작 비용과 시간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만화책에서도 유지됐다. 얘기인즉슨, 가오의 문제라는 것에 조금 더 신빙성이 실린다는 사실.

세인트 세이야 런

나루토 런의 원조는 유희왕을 집필한 아라키 신고(Shingo Araki)가 종종 만화에 그려내던 스타일로, 그의 대표작 세인트 세이야(Saint Seiya)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닌자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모든 닌자가 동시에 달리는 ‘떼 샷’ 연출이 큰 호응을 얻으며 해당 달리기의 타이틀 영광은 ‘나루토 런’에게 돌아갔다고.

나루토 런은 현실 세계의 수많은 덕후들의 재연을 통해 그 명성을 이어왔다. 뉴스를 전하는 리포터 뒤로 신명 나게 달려가는 남성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비보시티(Vivocity)의 ‘나루토 런 페스티벌’, 심지어는 나루토 런으로 미 국방부 1급 군사기지, 51구역으로 향하려는 이들까지 등장하니, 미 공군에서도 나루토 런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을 정도. 

만화를 만화로 두지 못하고 기어코 현실로 가져오려고 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나루토 런은 가장 쉽게 주인공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는 자세일지 모르겠다. 허나 닌자 복장을 갖추지 않고(설령 갖췄다 할지라도) 이를 재연한다면 동네 바보로 전락하기 쉬우니, 시행 전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기억하자, 만화는 만화일 뿐.


이미지 출처 | Namuwiki,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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