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티셔츠의 계절이 왔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는 다운재킷부터 윈드브레이커, 코트, 셔츠 등 다양한 겉옷으로 멋을 부리지만, 여름은 예외 없이 티셔츠다. 물론 가벼운 재질의 셔츠나 여타 상의로 멋을 낸 이들 또한 보이지만, 200그램이 채 되지 않는 가벼운 티셔츠가 주는 해방감이란.
또한, 티셔츠는 프린팅이 용이하다. 덕분에 티셔츠 위 그려진 갖가지 디자인을 보는 재미 역시 티셔츠의 즐거움 중 하나다. 깔끔한 무지 티셔츠도 좋지만, 멋진 아트워크가 들어가 있거나, 엉뚱한 삽화, 아니면 좋아하는 뮤지션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여러 종류의 티셔츠는 개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의 기능까지 겸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우리 주변의 멋쟁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티셔츠는 무엇인지. 듣기만 해도 궁금해지는 그들의 티셔츠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며, 본인의 넘버 원 티셔츠는 무엇인지 떠올려보길.
권순환 / 비정규직
2009년 9월 9일 비틀즈의 컴필레이션 앨범 “09.09.09 Sampler”가 발매됐다. 숫자 9는 마지막 숫자이자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존 레논은 그런 9를 자신의 행운의 숫자라고 여겼다. 기존 비틀즈의 곡과는 평이하게 다른 비틀즈의 곡 “Revolution 9”은 지금 들어도 기괴하고 난해한 사운드로 꽉 들어차 있다.
이 곡이 탄생한 1960년대 후반은 전 세계적으로 반전 시위가 일어난 시기였다. 그런 혼란한 사회상을 음악으로써 보여주고자 했던 시도가 이 곡의 탄생 배경이다. 이 티셔츠는 당시 발매한 앨범의 프로모션 용도로 제작된 것이다. “Revolution 9”의 마지막 구절인 “number nine, number nine, number nine”을 읊조리는 존의 목소리는 전쟁 속 혼돈이 가득한 이 세상 끝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던 게 아닐까?
임솔 / 디자이너
이 티셔츠의 아트워크는 그래픽 아티스트 곽경륜(Wreck)이 내가 운영하는 브랜드 더 인터내셔널(The Internatiiional)과 일본의 크리에이터 집단 레이브 레이서즈(Rave Racers)의 협업을 위해 제작한 것이다. 레이브 레이서즈의 아트 디렉팅을 맡고 있는 일본의 디자이너 구찌메이즈(Guccimaze)가 개발한 캐릭터를, Wreck에게 에어브러시를 이용해 그의 스타일대로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작년 봄, 다른 아트워크를 의뢰하기 위해 Wreck을 처음 만나 대화하던 중 문득 구찌메이즈를 소개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 모두 하드코어 레이브 문화와 그래피티를 사랑하는 데다 대체 불가한 작업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이었나, 구찌메이즈가 내게 Wreck에 관해 물어봤을 때, 마치 모든 게 약속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 삼자 협업은 그렇게 진행됐다. 아직 이들을 모른다면 이름을 외워두시라. 인터내셔널은 늘 최고의 아티스트와 함께 일하고, 이번엔 두 사람을 데려왔으니 이 티셔츠는 곧 전설이 됩니다.
문바 / FOE, BEM, molar 대표, 인쇄인
2017년, 사무실에 제대로 된 실크스크린 로터리 인쇄 기계를 장만하면서, 오랫동안 염원하던 원색분해 인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원색분해 인쇄는 풀컬러 이미지를 C, M, Y, K 네 가지 컬러의 망점으로 분판, 네 번(혹은, 화이트 배경까지 다섯 번)의 잉크 적층으로 반투명의 네 가지 컬러가 겹쳐지며 컬러 사진이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전통적인 티셔츠 인쇄 기법 중 하나입니다.
인쇄 데이터를 잡기 위해 좋아하는 영화인 ‘소나티네’의 장면을 캡처하여 제판해 괜찮은 색감을 얻을 때까지 인쇄를 연습했고, 괜찮은 잉크 배합을 찾아내어 인쇄해 얻어낸 저만의 기타노 다케시 부틀렉 티셔츠입니다. 지금은 디지털 프린팅 기술이 발달해서 원색분해 인쇄보다도 프린팅 퀄리티가 더 잘 나와 저도 현재는 디지털 프린팅을 애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따금 개고생하면서 실크스크린으로 풀컬러 인쇄를 하려고 했던 때가 생각나네요.
디지털 프린팅 최고!
유승헌 / 도예가
대학생 시절에 영화를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접한 프랑스 느와르 영화 “예언자(A Prophet)”의 주인공 말리크가 프린트된 티셔츠다. 프린팅된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로도 사용되었던 장면으로 영화의 후반부 중요한 액션 장면의 직전의 상황이다. 프랑스의 역사, 인종, 종교 문제에 대한 무지 긴 러닝 타임,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상황 파악이 다소 어려웠던 전개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형언할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려 결말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소재, 연기, 음악 등 모든 면이 좋았지만, 특히 익숙하지 않았던 프랑스 영화 특유의 오묘한 분위기에 이 영화를 많이 좋아하게 되어 여러 번 돌려봤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퍽트(FUCT)에서 발매한 이 티셔츠를 구매했고 애정하는 티셔츠 중 하나가 되었다. 퍽트답게? 프린팅이나 원단의 퀄리티가 좋은 티셔츠는 아니지만 입다가 해지면 액자에 걸어두고 싶은 그런 티셔츠다.
이유미 / 패션 브랜드 ‘할로미늄’ 대표
일본 뮤지션 얀 토미타(Yann Tomita)의 전설적인 프로젝트 그룹 ‘더 두피즈(The Doopees)’의 심볼이 오른쪽 가슴팍에 프린트된 티셔츠. 두피즈의 [Doopee time] 앨범 발매 20주년을
기념하는 티셔츠로 일본 브랜드 빔즈(BEAMS) 매장의 ‘TOKYO CULTuART by BEAMS’ 코너에서 발견했다. 두피즈의 심볼은 두피즈 앨범 커버를 장식하는 메인 캐릭터의 스냅 사진을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오른쪽 가슴팍에 나와 같은 로고를. 일본이나 한국에서 이 티셔츠로 입고 다니면 음잘알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게 된다. 처음 보는 일본 친구가 ‘너 두피 좋아하는구나?’라며 말을 걸거나, 평소 인사만 하던 분이 화기애애하게 “오! 이 티셔츠 어디서 사셨어요?”라고 스몰토크를 열어주는 티셔츠. 그리고 이 앨범은 정말 명반이다.
옥근남 / POHS-THIS 파운더
1998년 6월 9일. 대한민국의 아티스트 백남준은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방미 기념 연회장에 초대되었다. 뇌졸중 투병 중이던 그는 보조 기구를 끌면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 앞으로 다가갔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백남준의 바지가 내려가면서 그의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순간의 찰나를 다큐사진가의 대가 김녕만 님이 담아냈다. 그는 당시 그 상황에서 무언가 균형이 틀어지는 순간이라 셔터를 눌렀다고 했다. 후에 이를 두고 백남준이 병중에 저지른 실수였다는 쪽과 당시 클린턴의 성 추문을 풍자한 예술적 퍼포먼스라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었고 한미 정치적인 것들이 엮여있어서인지 국내에는 큰 이슈가 되지 않고 금세 사그라졌다고 한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당시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처음 봤을 때 그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정말이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백남준 님은 브라운관을 이용한 다다익선과 같은 설치 미술로서 전 세계에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지만, 일찍이 음악과 퍼포먼스 예술로 주목받던 예술가였다고 한다. 사실 이 장면은 생전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퍼포먼스 예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티셔츠를 만들면서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백남준 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이 장면을 담아낸 사진가 김녕만 님께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이 티셔츠를 너무 만들고 싶었다. 아니, 내가 너무 입고 싶었다. 저작권 이슈 때문에라도 당연히 판매하지 않기로 했고, 아주 극소량만 제작하여 친구들과 나눠 입기로 했다. 단가가 저렴한 디지털 프린트가 아닌 실크스크린 원색 분해 방식으로 인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리루 /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리루입니다. 저는 일상에서 포착한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 다양한 매체로 표현합니다. 티셔츠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인쇄해서 입고 싶을 때, 여러 장 만들어 저도 입고 친구들도 입고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판매합니다. 그리고 여럿이 입고 다녔을 때 불특정 다수가 티셔츠에 있는 저의 그림을 보고 피식 웃기를 희망하기도 합니다. 사진 속 티셔츠를 설명하자면 저의 대표 캐릭터 ‘서희동’을 인쇄한 것입니다.
서희동은 우리 집 고양이입니다. 희동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 개의 낙서에서 시작했고 스티커, 도자기, 인형, 대형 풍선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품에 지닐 수 있도록 티셔츠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그림을 물건으로 만드는 일이 조금 힘들어져서 잠시 멈추고 있지만 곧 다양한 종류의 굿즈와 티셔츠를 선보이기 위해 애써볼 예정입니다. 함께 제작할 파트너를 오래전부터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만약 이 글을 보시고 관심이 있다면……. 연락해주세요.
박다함 / 카레 애호가
나는 의식적으로 옷을 사는 사람은 아니다. 좋아하는 밴드의 티셔츠를 사던가, 여행 중에 만난 사람에게 우연히 티셔츠를 사는 타입인데, 이 티셔츠도 생각나는 이미지를 티셔츠로 불규칙적으로 만드는 오사카의 디제이 oboco에게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많이 입고 다녔고, 2019년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파티에 이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친구들이 티셔츠를 보고 많이 물어보고 좋아해 줘서 신기했다. 너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좋은 기억이 가득했던 베를린 방문이어서 집에 오기 전에 oboco에게 이 티셔츠를 받은 것처럼 너무 좋은 기억을 준 친구 @internationalcatday에게 티셔츠를 주고 왔다. 내가 다시 입을 수는 없지만, 친구가 여전히 잘 입고 다니는 걸 보니 그냥 행복한 마음이다.
양은서 / YESCERAMIC 운영
2021년에 친구가 그려준 티셔츠, 나의 이름 성씨가 양이어서 양 그림을 그려줬다. 평소에는 잘 그리지 않는 스타일임을 알아서 더 고맙다. “뭐든 꾸준히 해야 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친구는 여전히 에어브러쉬로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린다.
Wreck / 페인터
“T-Shirt = Canvas”
곽하늘 / 스타일리스트, DJ wang tough
2004년에 제작된 마르지엘라의 티셔츠를 제일 아끼는 티셔츠라고 할 수 있겠다. 총 23개의 라인 중 단연코 0번 라인, 즉 아티저널 라인이 내겐 제일 매력적이었고 이 티셔츠 역시 그 0번 라인의 아티저널 티셔츠가 되겠다. 2004년 AW 시즌에 만들어진 이 티셔츠는 0 10라인으로 아티저널 라인 중 남성 라인이며 대개 이탈리아에서 제작되는 마르지엘라의 제품과는 다르게 프랑스 아틀리에에서 만들어졌다. 티셔츠의 이름은 클로버 티셔츠로 빈티지 티셔츠에 재작업을 통해 티셔츠 중앙 부분 클로버 디자인을 더했다.
08년까지 마르지엘라가 직접 디렉터로 있었을 때의 티셔츠와 여러 아카이브 제품을 모으지만, 이 제품은 좀 더 귀했고, 그만큼 비쌌다. 사이즈도 내겐 맞지 않는다. 남성 라인임에도 타이트하게 들어가는 가슴둘레, 2사이즈이지만 45cm 정도로 제작되어 보기만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티셔츠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이 티셔츠는 자세히 보면 나이키 에어 조던 빈티지 티셔츠가 본판인데, 이 티셔츠도 구하기 어려운 티셔츠로 알고 있다. 여기에 클로버가 더해지면서 조던 티셔츠처럼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마르지엘라 느낌의 티셔츠가 되어버렸다. 정확한 가격은 말할 수 없지만 대게 100~150만 원 정도로 형성되어 있다고.
최현지 / 성우
2019년. 코로나가 발생하기 몇 달 전, 일주일간 뉴욕 여행을 떠났다. 지나다 들른 어느 빈티지 숍에서 이 티셔츠를 샀다. 티셔츠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맥켄지가의 재결합(?) 1989년 7월
콜로라도 에스티즈 공원
하늘색 바탕과 네이비 글자의 조합이 마음에 들어서 샀지만, ‘신흥호남향우회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외국인의 모습 같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입을 때마다 ‘아마 그렇겠지’라고 생각한다.
이윤호 / 우주만물, 신도시, 미도파 운영, 사진가
2000년대 초반이었나, 저의 첫 아이돌인 김윤기(@yoonkeekim)가 자신의 방에 써 놓은 글귀를 가지고 브랜드 GIANT BASTARD에서 만든 티셔츠입니다. 당시엔 절판이 되어 구하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아둔 지 십여 년이 지난 최근에야 어렵사리 손에 넣었어요. 정작 지금은 제가 음악에 진심이지 못해 차마 당당히 못 입고 있군요. 김윤기는 변함없이 멋진 아티스트고요.
박수연 / 자영업
BBP, BEATNUTS × BBP “INTOXICATED DEMONS” T-SHIRT. 90년대 힙합 그룹 중 하나인 BEATNUTS의 93년 발매된 첫 번째 EP 디자인으로 일본 브랜드 BBP와 콜라보레이션한 티셔츠다. 5년 전쯤 남편이 사이즈가 맞지 않다며 나에게 주었다. 원래는 흰색 티셔츠인데, 그때 한참 하얀 옷만 보면 무조건 염색해서 입었던 때라서 이것도 염색해서 입게 되었다. 원래 새 옷보다 자연스럽게 물이 빠진 옷을 좋아하는데 세탁하면 할수록 물이 빠지면서 좀 더 얼룩덜룩해졌다. 그래서 예쁘다. 그래픽과도 잘 어울려서 아주 만족스럽다. 그리고 밝은색이라 그런가? 이 옷을 입을 때면 항상 놀러 가는 느낌이 난다.
유지민 / 포토그래퍼, 테크노 디제이
약 10년 전쯤 어머니께서 인천의 지하상가에서 단 며칠만 하는 일본 구제 옷들을 바닥에 대충 깔아 놓고 3천 원부터 7천 원까지 떨이로 파는 곳에 다녀오셨나 보다. 까만 봉지에 대충 넣은 걸 던지시며, “너 해골 좋아하지? 7,000원에 샀어”. 쳐다보지도 않고 딴 짓을 하다가 ‘무슨 해골이야’라면서 펴보았는데, 그래픽 퀄리티가 훌륭했고, 티셔츠로써는 흔치 않은 무게감, 태그에는 ‘MADE IN USA’, 셔츠 하단부의 텍스트를 다시 보니 롤링스톤즈 94, 95년 월드투어 ‘VOODOO LOUNGE’ 머천다이즈 티셔츠였다. 퉁퉁한 몸매에 아시안핏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역시 천조국 XL는 김준현 형님도 입을 수 있는 사이즈였다. 이후 지금까지도 나의 소장 컬렉션 리스트에 상위권에 있고, 기억에 남을 만한 공연 때 줄곧 꺼내 입는다.
Editor│오욱석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매거진 20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