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가장 뜨거운 브랜드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크로님(ACRONYM)을 꼽겠다. 사실 아크로님이라는 브랜드보다는 아크로님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에롤슨 휴(Errolson Hugh)라는 이름이 더욱 강력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의 온전한 결과물은 아니겠지만, 그가 진행하고 있는 브랜드, 프로젝트에 대한 파급력은 이견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점차 고루해지던 나이키 ACG(NIKE ACG)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꿔버린 것도 에롤슨 휴다.
왜 기능성 의류은 투박해야할까?, 세련된 기능성 의류는 기술력이 부족해 보여서 일까? 사실 세련된 기능성 의류에 대한 디자인 연구는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지금도 우리는 몇몇 브랜드에서 그 꼼수를 보고 있지 않나. 패턴과 색다른 텍스쳐를 사용한 디자인은 확실히 기존의 의류보다 더욱 세련되어 보인다. 하지만 에롤슨 휴는 그런 1차원적인 해답 이상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좀 더 멋지게 만들면서 기능성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그 디자인의 핵심이다. 단순하지만 세련된 디자인, 그 속에 숨겨진 높은 수준의 디테일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Errolson hugh가 참여한 NIKE ACG 컬렉션
6월 발매 예정인 아크로님과 나이키랩(NikeLab)의 협업제품 루나포스1 SP(Lunar Force1 SP)가 벌써 화제다. 누벅과 페이턴트 소재의 갑피, 그리고 측면에 길게 장착된 지퍼가 이번 협업의 전부다. 이전 나이키 에어 줌 플라이트 글러브(Air Zoom Flight the Glove)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된 에어포스 글러브팩이 있었지만, 줌 플라이트 지퍼의 특징인 신발끈을 묶어야 하는 프로세스 역시 그대로 가져왔다. 분명 퇴보는 아니지만, 혁신 역시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에 루나포스1 SP의 측면으로 길게 뻗은 지퍼는 확실한 차별점을 가진다. 루나포스1 SP의 지퍼 디테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실제 제작되기까지의 과정,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와 닿는 것은 그만큼 나무랄데 없는 완성도의 입증이 아닐까. 지극히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제품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아, 정말 편하겠다.”
애롤슨 휴의 직관적인 접근방식은 비단 디자인 뿐만 아니라 마케팅에서도 드러난다. 여러 기능성 의류 브랜드의 광고 대부분에서 모델은 자사의 제품을 착용한 뒤 산을 타고, 언덕을 달린다. 하지만 기능성 의류에 대한 소비자의 의문점은 단 하나. 제품을 입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가 구매의 관건인 것이다. 아크로님은 몇 명의 모델을 세워놓고 아크로님을 입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불필요한 감성을 소거, 정면 돌파해버리는 광고 영상은 ‘최고의 하이테크’라는 자신감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아크로님 영상의 또 다른 장점은 메뉴얼을 제시하되 재미까지 보장한다는 점이다. 그저 높은 수준의 하이테크웨어라고 하기에는 설명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브랜드, 아크로님은 그 끝을 쉽게 가늠할 수 없다.
ACRONYM X NikeLab Lunar Force 1 SP
ACRONYM의 제품 소개 영상
지금부터는 아크로님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세련된 아웃도어, 나나미카(NANAMICA)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미 나나미카 컬렉션에 관한 짤막한 기사를 통해 혼마 이치로(Eiichiro Homma)를 소개한 바 있다. 나나미카의 디렉터 / 디자이너로 참여하고 있는 그는 올해로 56세, 나나미카가 내놓은 세련된 감각의 디자인을 생각한다면 조금 의외의 나이이기도 하다. 반대로 그의 수많은 경력, 경험으로 이루어진 브랜드가 바로 나나미카이니 결코 만듦새에 서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 혼마 이치로는 스포츠 / 아웃도어 회사로 유명한 골드윈(GOLDWIN)에서 오랜 시간 일했다. 2003년 퇴사 후, 나나미카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으니 그 아카이브 역시 얕지는 않다.
나나미카를 설명할 때 ‘감성’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다. 나나미카는 분명 감성있는 하이테크웨어다. 하지만 혼마 이치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패션과 기능성의 고차원적인 조합이다. 너무나 기본적인 이야기 같지만, 그 기본에 가장 충실한 브랜드가 바로 나나미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첨단 직물 시장에서 생산되는 원단을 내가 매일 입어야 하는 블레이저, 셔츠에 적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나미카는 기꺼이 이런 소비자의 꿈을 실현시킨다. 어디서나 쉽고 편하게, 격식과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기능성 의류는 나나미카 최대의 강점이다. 이미 20년 이상 아웃도어 시장에서 일해온 혼마 이치로가 디렉팅한 의류는 그 기능 역시 탁월하다. 굳이 아크로님 같은 다양한 디테일이 없어도 그 고유의 미학을 완성함으로써 제 가치를 다한다.
어디서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NANAMICA의 아웃웨어
나나미카와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의 공동라벨이라고 할 수 있는 노스페이스 퍼플라벨(THE NORTH FACE PURPLE LABEL)의 인기 역시 혼마 이치로의 많은 관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존 노스페이스가 보여주던 방향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 퍼플라벨은 외려 나나미카와 좀 더 닮아있다. 노스페이스에서 쉽게 보여주기 힘들었던 디자인의 의류 속에 당당히 로고가 부착된 모습은 상당히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한다. 아웃도어에 감성을 입히는 ‘아웃도어 감성전략’은 현재 많은 아웃도어 브랜드가 도전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감성을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녹여내는 노하우에 대해서는 나나미카, 즉 혼마 이치로를 따라올 자가 없는 듯하다. 절제와 디테일 사이의 어려운 선 위에서 마치 곡예사인 양 자유로이 전진하는 나나미카의 모습은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보다 변하지 않는 철학으로 소비자를 대한다. 이런 훌륭한 브랜드의 흠을 억지로 잡아낼 필요는 없다.
THE NORTH FACE PURPLE LABEL 2015 여름 컬렉션
지금에 이르러 기능성 의류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촌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익히 알려진 콜롬비아(Colombia), 몽벨(mont bell)과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 다수는 놀라우리만큼 멋진 디자인의 의류로 소비자를 끌어당기고 있다. 이러한 아웃도어 트랜드의 변화는 현대인들의 야외활동에 대한 욕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의 젊은 층에 등산, 캠핑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관련 매체에서 소개되는 도시인들의 아웃도어 착장은 ‘과연 이 사람이 입은 게 아웃도어 브랜드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울린다. 어쩌면 브랜드의 발전은 기업이 아닌 소비자가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콘크리트, 아스팔트투성이의 공간에서 기능성 의류를 입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면, 더 편하게 멋을 부리는 방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글 ㅣ 오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