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링 위에서, 전쟁은 보드 위에서: 체스복싱

체스복싱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두뇌를 활용해 상대와 지성을 겨루는 마인드스포츠의 대명사, 체스. 신체에 물리적으로 타격을 가하여 승패를 결정짓는 복싱. 이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지만, 최근 둘을 합친 다소 황당한 하이브리드 스포츠 종목이 점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문과 무를 결합한 체스복싱은 많은 이에게 생소하게 들릴 것.

처음 접해본 이라면 체스와 복싱의 조합이 생소를 넘어 괴이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스포츠를 각자 찬찬히 뜯어봤을 때 둘 사이의 유사한 지점들이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두 종목 모두 진행해온 경기의 상황과 관련 없이 단 하나의 결정적 순간이 극적으로 경기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복싱 경기 규칙 중 결정적 한 방으로 상대방을 완전한 그로기 또는 기절, 즉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경기를 끝낼 수 있는 K.O.(Knock out) 가 있다면 체스는 10수 또는 20수 동안 선두에 서며 우승에 유력해지다가도 한 번의 실수가 단번에 승패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게임이다.

앞서 판데믹 속에서 새로운 취미 탐구에 나선 사람들, 더불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의 흥행, 루이비통의 캠페인에서 메시와 호날두가 체스를 겨루는 모습이 축구 팬들에게 알려지는 등 근래 여러 방식으로 체스가 먼저 대중 앞에 빈번히 노출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체스 유망주 한스 니만(Hans Niemann)의 무려 100회가 넘는 부정행위 의혹이 제기되면서 진흙탕 싸움밭이 된 체스계는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니만의 부정행위 방법에 대한 여러 황당한 가설이 파생되며 점차 밈(meme)으로 변질된 스캔들은 넷 상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스캔들이 체스 시장에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역할로 일조하며 사람들의 눈길은 자연스레 그 언저리에 위치해있던 체스복싱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체스복싱은 3분간 링 위에서 복싱 라운드를 겨룬 후 4분간 스피드 체스 라운드를 가진 다음 1분간 휴식을 갖는 것을 한 라운드로 인정하며 시합은 총 11라운드에 걸쳐 진행된다. 이는 체스복싱 연맹이 세운 규칙으로, 단일한 스포츠 종목으로 공인받은 이래 20년간 행해진 정석적인 시합방식이다. 최근 체스복싱이 발전 및 주류로 노출되면서 시합 규칙은 새로운 임계값에 도달하기도.


체스복싱, 그 창대한 시작.

본래 엔키 빌랄 저서 SF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화 니코폴 3부작(The Nikopol Trilogy)의 마지막 권 “추운 에콰도르(Froid Équateur, 1992)”에 등장하는 가상의 스포츠로 대중 앞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체스복싱. 이후 2003년, “추운 에콰도르”에서 영감을 받은 네덜란드 출신 예술가 이에페 루빙(Iepe Rubingh)이 베를린을 무대삼아 체스복싱을 하나의 전위예술 퍼포먼스로 각색해 선보이며 관객들의 뇌리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윽고 이 생소한 스포츠는 점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암스테르담에서 정식 챔피언십 경기까지 개최되면서 하나의 종목으로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 허구의 이야기 속 스포츠가 공식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은 지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

체스복싱이 대중에게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약 30년 전이지만, 그 전부터 대중 앞에 은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 온 바 있다. 시간을 거슬러 1970년대 후반, 런던 남동부 키드브룩의 한 청소년 복싱클럽에 다니던 로빈슨 형제(James & Stewart Robinson bros.)는 훈련을 마친 후 체스를 두는 습관이 있었다. 링 위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날, 상대를 체크메이트로 완전히 K.O. 시키고픈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런 습관때문에 형제는 복싱클럽에서 너드로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3년간 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그들의 평범한 일과가 되었다. 형제가 운동 후 행해온 기묘한 패턴은 지역 언론의 관심을 끌며 이내 지역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영화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다: 곽남굉

이후 체스복싱은 1979년 대만 출신의 영화 감독 곽남굉 (Joseph Kuo)의 쿵후 영화 “The Mystery of Chessboxing(1979)”으로 다시 한번 나타나 대중에게 그 묵직한 존재감을 안긴다. 곽남굉은 1970~80년대 홍콩을 기반으로 한 무협 영화 거장으로, “The Mystery of Chessboxing”은 그런 그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작 중 하나이다. 체스복싱이라는 생경한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무술과 체스(극 중에는 기원이 같은 샹치가 체스를 대변한다)의 철학을 조화롭게 엮어낸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개성 있는 캐릭터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닌자 체크메이트(Ninja Checkmate)”라는 이름으로 배급된 영화는 개봉 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약 2년간 연장 상영되기도 하며 당시 영화가 끌었던 인기와 대중성을 직접 증명했다. 이소룡이 출연하지 않은 70년대 무협 영화로서는 인상적인 업적인 셈이다.

영화는 주인공 아파오가 그의 스승이자 샹치 마스터 치 수 틴에게서 샹치와 무술 권법을 배워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 고스트페이스 킬러를 무찌르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극 초반, 아파오는 무술을 익히고 싶어 하는 그에게 샹치를 가르치려는 치 수 틴에게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샹치와 쿵후 사이의 전략적 연관성을 깨우치고 성공적으로 고스트페이스 킬러를 격퇴하며 극의 대미를 장식한다.

극 중 “이 게임을 마스터하려면 매우 침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리한 눈, 느린 혀, 그리고 빠르게 보고 대처할 수 있는 마음과 위트가 함께 필요하다”라는 치수틴이 아파오에게 건넨 대사는 체스복싱의 진수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영화의 탄생 비화로 당시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곽남굉이 로빈슨 형제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접하게 되면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체스복싱, 모든 문화 장르를 섭렵하다: Wu-Tang Clan

한 형제의 반복되는 일과를 시초로 체스복싱은 소설과 만화로. 그리고 그 영향력은 행위예술과 영화로 연결되고, 이윽고 음악으로까지 파급된다. 힙합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데뷔 앨범 [Enter the Wu-Tang (1993)]을 잠시 살펴보자. 술과 마약, 섹스, 갱스터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던 힙합 신에 우탱 클랜은 앨범과 그룹의 아이덴티티에 기믹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며 나타났다. 그들은 주로 중국 무협영화 속 효과음이나 대사들을 샘플링하여 곡에 삽입하거나 극의 등장인물에 감정 이입한 채 가사를 쓰고 뱉으며 랩과 동양적인 색채를 융화시켰다. 그 결과 그룹과 멤버들의 이름, 앨범의 전 트랙이 모두 무협영화와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 이런 우탱의 새로운 시도는 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이내 신 속 새로운 파동의 주체가 되었다.

이들의 무협영화 샘플링 컬렉션에 곽남굉의 영화 또한 포함되어 “The Mystery of Chessboxing”은 음악으로 재구성되었다.

앨범의 여섯번 째 수록곡 “Da Mystery Of Chessboxin’”은 곽남굉의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와 약간의 변형을 가미한 것으로, 우 탱 멤버들의 랩 스킬을 체스와 무술의 예리함과 날렵함에 빗댄 곡이다. 멤버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이름 역시 영화 속 악당 ‘고스트페이스 킬러(Ghostface Killer)’에서 파생된 것.


새롭게 주목받는 체스복싱: E-스포츠로의 진출

체스복싱을 보다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제아무리 준프로급의 체스 실력을 갖춘 자라 해도 복싱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현저히 부족해져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말도 안 되는 자충수를 거듭하는 모습이 연출되기 때문. 그렇기에 체스복싱은 매우 매력적이고 까다로운 스포츠이다. 복싱 시합 후 체스로 라운드가 넘어가기 전에 스스로를 완전히 진정시키는 등 아드레날린 컨트롤이 관건이라고. 이런 엔터테이닝적 면모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리그로 끌어들인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라이브 스트리머들이다.

라이브 스트리머의 토너먼트전 주최: Ludwig Ahgren

라이브 스트리밍 시청자들 사이에서 체스복싱이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타던 도중, 루드윅 아그렌(Ludwig Ahgren)이라는 한 라이브 스트리머가 주최한 체스복싱 자선경기가 화제가 되면서 체스복싱의 E-스포츠화는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었다.

2022년 12월 11일 LA에서 주최된 “모걸 체스복싱 챔피언십(Mogul Chessboxing Campionship)”은 KSI, Jake Paul 등 여러 인기 스트리머가 참여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방송 전부터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활기차고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E-스포츠 특성상 경기는 기존 11라운드에서 7라운드로 감축하고 약 3분가량의 체스와 1분 30초간의 복싱 라운드를 진행하는 변형된 규칙을 인가했다.


E-스포츠로서의 체스복싱 속 특칙

체스복싱이 E-스포츠로 변모되며 나타난 특이점도 있다. 체스 두는 방법을 모르는 스트리머 겸 선수들을 위해 닌텐도 대전 격투 게임 ‘슈퍼 스매시브라더스’로 대결을 겨룰 수 있도록 ‘스매시 복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것. 더 이상 ‘체스’복싱이라 정식 간주하기 어렵지만, 참가자 전원이 라이브 스트리머일뿐더러 상당수가 체스와 복싱 두 분야에서 다 아마추어였기에 E-스포츠의 엔터테이닝적 특성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 이것이 ‘진짜’ 체스복싱인지 논제를 던지거나 게임이 얼마나 정석대로 치러져야 할지는 크게 난제가 되지는 않았다.

경기는 10,000명의 실 관람객과 유료 스트리밍으로 수익을 창출하기보다는 역대 시청자 수 기록을 경신하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라 방송은 무료 생중계로 방영되었다. 그 결과 ‘모걸 챔피언십’은 5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청자 수를 기록하며 역대 최대 규모의 체스복싱 이벤트로 달성하게 되었다. 성공적으로 첫 리그를 마치며 루드윅은 2022년 올해의 콘텐츠 크리에이터 부문 게임 어워드 수상 및 올해의 스트리머로 선정되며 스스로의 커리어와 한 스포츠 종목의 부흥이라는 성과까지 한번에 도출하게 된다.

하지만 체스복싱이 E-스포츠로서 큰 이목을 끌면서 우려의 목소리 역시 면치 못하고 있다. 두뇌를 활용하고 정신적 싸움이 필수 불가결한 체스게임과 머리를 맞을 확률이 다분히 높은 육체적 싸움에 동시에 놓이게 한 다음, 빠르게 반복되는 라운드 속에서 연출되는 자극적인 장면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유해하다는 의견. 그럼에도 전략적인 게임 플레이, 물리적 폭력, 과장된 해설과 기믹으로 똘똘 뭉친 체스복싱은 기존 E-스포츠가 가진 특이점과 매우 유사하여 평소 E-스포츠 스트리밍에 친숙한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켜 여전히 스트리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가는 추세.


즐길 줄 아는 무림고수들

‘전위예술’이라는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장르로 예술로서의 본격적 시작을 통고한 체스복싱. 이내 그 매력을 알아본 이들이 제각각 다양한 문화 장르로 재구성해오며 체스복싱은 여러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그 토대를 단단히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 본인의 감정과 욕망에 솔직할 줄 아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최근 E-스포츠의 정점을 달리는 체스복싱을 보며 ‘터무니없고 바보 같은’ 스포츠라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질을 흐트러뜨리지 않되 엔터테이닝적 면모를 추구, 즉 즐거움에 중점을 두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그들이 평소 삶을 대하는 자세와 어느 정도 동일하게 여길 수 있겠다. 누구보다 터무니없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 남들이 생소한 종목에 거부감을 느끼고 설사 조롱할지언정, 스스로 즐거움을 느낀 분야에 마음을 다하는 이들이 진정 순도 높게 삶을 즐길 줄 아는 유쾌한 인간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Wikipedia, Chessbase, Nintendo, IMDb, Ludwig Ahg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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