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 표시 #3 – Rominimal

“Less is more.” – 로버트 브라우닝


9분 40초의 트랙이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을까? 귀를 간지럽히는 가벼운 드럼 머신이 큰 줄기를 잡고, 입술을 오므렸다가 퐁 터트리는 듯한 사운드. 다섯 가지 음으로 이루어진 멜로디는 산뜻하지만 귀에 진득하게 남는다. 1분 35초부터 특유의 ‘쿵치타치’ 비트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4분부터 슬그머니 등장하는 전자음만이 후반부까지 아른하게 울린다. 그게 전부다. 브레이크 다운은 있을지언정 엄청난 클라이맥스는 없다. 마치 평양냉면 국물을 들이켰을 때처럼 심심하지만 은은한 맛이 우러난다.

타 장르 리스너에게 전자음악을 들려준 적이 있는 독자라면 ‘너무 반복적이다’라는 평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반복적’이라는 단어는 마치 ‘지루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클래식, 팝, 일렉트로닉, 심지어 의식에 쓰이는 제의 음악까지 장르를 막론하고 반복은 음악의 핵심 요소다.

미니멀리즘 음악을 발전시킨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1965년 작품, ‘It’s Gonna Rain”을 들어보면 ‘비가 온다’는 문장은 이내 그 기의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음성적 기표가 된다. “음악의 명료함은 반복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고 했던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반복되는 음악적 요소에서 쾌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터.

미니멀리즘의 축 끝에 있는 전자음악이 앰비언트라면, 보다 댄서블한 장르에는 로미니멀(Rominimal)이 있다. ‘Ro-‘라는 접두사가 붙는 이유는 동유럽 국가, 루마니아에서 확립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수도 부쿠레슈티(Bucharest)에 위치한 클럽 ‘게스트하우스(Club Guesthouse)’는 신(scene)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3일, 클럽 ‘게스트하우스’는 12주년을 맞이하여 프라슬레아(Praslea), 캡(Cap), 디제이 마쓰다(DJ Masda)가 플레잉하는 성대한 축하의 밤이 열렸다.

루마니아에서 불어온 미니멀의 바람은 한국 신에도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서울의 파티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는 ‘앤티도트’에 함께 한 디제이 게스쿠(Gescu)는 로미니멀 신의 인물 중 한 명이다. 또한 부산의 클럽 ‘아웃풋(Output)’에는 디제이 다이렉트(Direkt)가 내한하기도 하였으며, 오는 5월 27일부터 열릴 페스티벌 ‘에어하우스’에는 라두(Rhadoo), 헤로돗(Herodot), 덥틸(Dubtil), 베라(Vera) 등 로미니멀의 빅 네임이 내한하여 아시아 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루마니아는 어떻게 독자적인 신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로미니멀이란 어떤 장르일까.


로미니멀의 탄생

루마니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독재 시기를 겪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는 공산주의 독재자로서 서구 문화를 철저히 금지시켰다. 서구 음악은 외교관이나 승무원 등이 해외에서 몰래 구해온 음반으로만 접할 수 있었다. 음악은 복제된 해적판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은밀하게 퍼져나갔고, “당신이 더 폴리스(The Police) 음반을 가지고 있다면 이웃집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농담이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소위 ‘빽판’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해적판 LP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1989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차우셰스쿠의 아성이 무너진 뒤에도 루마니아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척박한 토양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든 파이오니아는 존재하는 법.

1980년대 이비자의 여름이 영국에 애시드 하우스 신을 촉발했듯이 2000년대 중반 이비자의 여름은 루마니아 출신의 라두(Rhadoo)와 페트레 인스피레스쿠(Petre Inspirescu, 이하 페드로)를 DC10 나이트클럽으로 인도했다. DC10은 이미 사람들이 한바탕 놀고 오는 애프터 클럽으로 낮은 템포의 BPM을 가진 덥, 미니멀 사운드가 주를 이루었다.

당시 많은 디제이들이 디지털 셋업으로 넘어가고 있던 과도기였기에 이비자의 레코드숍은 중고 판으로 넘쳐났다. 라두와 페드로는 그곳에서 바이닐을 잔뜩 사들고 부쿠레슈티로 돌아와 파티를 열었다. 루마니아의 느슨한 법망으로 인해 파티는 48시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다. 이처럼 호흡이 긴 파티에서는 폭발적인 기승전결을 통한 카타르시스보다는 점진적으로 구축한 내러티브에서 배어 나오는 그루브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단순한 요소만을 제한적으로 이용해 미묘한 변화로 극대의 쾌감을 끌어내는 음악, 로미니멀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로미니멀의 특징

캡(Cap)

로미니멀은 ‘미니멀 테크노’ 혹은 ‘마이크로 하우스’라고 불리는 전자음악의 하위 장르에 속한다. 전형적인 킥 드럼, 하이햇, 드럼머신보다는 짧은 샘플 혹은 작고 가벼운 소리의 비트를 사용하여 테크노나 하우스와 비교하면 확연히 가벼운 느낌을 준다.

믹싱 시에는 길고 부드러운 트랜지션을 추구하여 턴테이블과 로터리 믹서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셋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CDJ의 디지털 셋업과 페이더 믹서를 함께 사용한다. 각 트랙에서 특정 요소만을 뽑아내 플레잉하는 경우가 많아 CDJ는 2덱을 넘어 4덱까지 갖추기도 한다.

또한 플레이 타임이 긴 편이다. 일반적으로 믹스셋이 2시간 이내인 것에 반해 로미니멀 믹스셋은 기본적으로 2시간에서 4시간을 넘어가는 경우도 부지기수. 이는 페스티벌에서 더욱 두드러져서 지난 2015년의 썬웨이브즈에서 디제이 마르코 카롤라(Marco Carola)는 24시간을 연속으로 플레잉했을 정도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이비자 신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 된 로미니멀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미니멀 헤드(Minimal Heads)를 양산하고 있다. 로미니멀의 대표적인 페스티벌과 아티스트를 알아보며 이 매력적인 장르를 탐구해 보자.

로미니멀 페스티벌

Sunwaves

‘썬웨이브즈(Sunwaves)’는 2007년에 시작하여 2023년에 30회를 맞이한 대표적인 로미니멀 페스티벌이다. 루마니아 동쪽의 흑해를 끼고 있는 마마야(Mamaia) 해변에서 주로 5월과 8월에 두 번씩 열리며, 전 세계에서 온 50,000명 이상의 레이버들이 참여한다. 코로나 시기에는 24시간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페스티벌을 대체하였다. 최근에는 탄자니아, 두바이 등 타국에서 추가로 개최하기도 했다.

썬웨이브즈는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한 5~6일 동안의 긴 페스티벌로, 주최 측의 설명에 따르면 ‘불꽃놀이, 화려한 조명, 스모크 머신, 메인스트림 음악’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이곳에는 목요일부터 화요일까지 5일 밤낮으로 음악이 멈추지 않는다. 그마저도 부족한 디제이와 레이버를 위한 애프터 파티는 덤. 썬웨이브즈의 상징과도 같은 펑션 원(Funktion One) 스피커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여러 클럽 및 페스티벌의 사운드시스템으로 채택되었다.

Holiday Mood

세자르(Cezar) & 라레쉬(Raresh)

‘홀리데이 무드(Holiday Mood)’는 2017년에 시작한 페스티벌로, 루마니아 근교 도시 브라소브(Brașov) 근교의 발레아 체르불리(Valea Cerbului) 강에서 열린다. 매년 여름에는 야외 페스티벌을, 겨울에는 실내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지난 4월에는 루마니아의 다른 페스티벌 피크닉 포닉(Picnic Fonic)과 콜라보하여 웨어하우스 레이브를 선보였다. 썬웨이브즈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홀리데이 무드 역시 24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 음악을 선보인다.

Mioritmic

‘미오리트믹(Mioritmic)’은 2016년부터 시작하였으며, 루마니아 서북부에 위치한 도시 클루지나포카(Cluj-Napoca)에서 매년 10월에 3일 동안 열린다. 루마니아의 페스티벌 중에서도 소규모의 로컬 페스티벌이지만 알짜배기의 라인업을 선보인다. 코로나로 인해 2020년부터 개최가 미루어져 올해 10월에서야 돌아올 예정이라고.


로미니멀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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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페드로, 라레쉬, 라두

디트로이트 테크노의 뿌리에 벨빌 쓰리(The Belleville Three)가 있다면 로미니멀에는 알피알 사운드시스템(RPR Soundsystem)이 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디제이, 리카르도 비야로보스(Ricardo Villalobos)는 2006년의 부쿠레슈티 공연 도중 라레쉬(Raresh)라는 젊은 아티스트를 발굴한다. 라레쉬는 리카르도와 친해져 함께 파티를 하며 자신만의 ‘루마니안 하우스’ 스타일을 개발했다. 여기에 라두(Rhadoo), 페드로(Petre Inspirescu)가 합류하여 셋은 알피알을 결성했다.

특히 라두는 클럽의 공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티스트들이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중시하여 동명의 레코드 레이블을 함께 결성했으며, 이는 루마니아 신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번 에어하우스의 클로징에서는 라두의 유서 깊은 셀렉션을 확인할 수 있을 것.

DJ 셋은 하나의 심상을 달성하기 위한 트랙의 퍼즐과도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조각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림 전체를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퍼즐의 조각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여기, 우리가 그 잃어버린 조각을 들고 왔습니다. [a:rpia:r]의 목적은 라디오나 TV를 장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은 차트가 아니라 댄스플로어와 클럽에서의 순수한 느낌과 감각입니다.

[a:rpia:r] 레코드 레이블 소개글 중에서

Herodot

헤로돗(Herodot)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한 로미니멀 신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아티스트와 레이버 모두에게 존경받는 디제이다. 그는 클럽 게스트하우스의 대표이자 우나님(Unanim) 레코드 레이블의 오너이며 뛰어난 사운드 엔지니어기도 하다.

그러나 웹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믹스셋뿐, 그에 대한 정보는 극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음악만으로 쌓은 헤로돗의 명성은 이미 루마니아를 넘어 해외에서도 자자하다. 30번째 썬웨이브즈의 공연을 마치고 내한하는 그의 햇살 같은 바이브를 에어하우스에서 느껴보자.

Dubtil

수수께끼에 뒤덮인 디제이, 덥틸(Dubtil)은 언제나 차분하고 진지한 태도로 리스너에게 최면적 사운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는 2008년에 바락(Barac)과 함께 노이 도이(Noi Doi)라는 듀오로 활동하였으나 현재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프로듀싱에도 두각을 나타내어 최근 자신만의 레이블 ‘인프리퀀트(Infrequent)’를 설립하였다.

대다수의 로미니멀 아티스트는 썬웨이브즈를 주최하는 에이전시 ‘썬라이즈(Sunrise)’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는 알피알, 헤로돗, 덥틸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라(Alexandra), 아라푸(Arapu), 캡(Cap), 댄 안드레이(Dan Andrei), 미하이(Mihigh), 프라슬레아(Praslea), 프리쿠(Priku), 셉(Sepp), 수시우(Suciu) 등이 속해있다. 이들은 모두 로미니멀 신의 주요 인물이지만 믹스셋 이외에는 마땅한 정보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SNS를 통한 파티 홍보, 에고가 넘쳐흐르는 디제이가 가득한 요즘, 비교적 베일에 싸인 로미니멀 신이 특별한 빛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루마니아 출신이 아니지만 로미니멀 파티 라인업에 자주 등장하는 아티스트로는 리카르도 비야로보스(Ricardo Villalobos), 짚(ZIP), 소냐 무니어(Sonja Moonear), 마르코 카롤라(Marco Carola), 티니(tINI), 블라다(Vlada), 베라(Vera) 등의 미니멀 디제이들이 있다.

블라다(Vlada)

호흡이 긴 로미니멀은 인내심을 가지고 즐길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디제이의 인도를 받아 섬세한 비트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플로우에 올라타 비로소 로미니멀의 달콤한 과실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 궤를 달리하며 반복되는 비트는 크라우드 사이의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연결감을 형성한다. 어디서부터 트랙이 바뀌는지 이음새조차 찾을 수 없는 트랜지션은 리스너를 시공간이 사라지는 몰입의 세계로 초대한다.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서도 자생적인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꿋꿋하게 자라났고, 마침내 태양의 꽃은 아름답게 활짝 피었다.

Club Guesthouse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Sunwaves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Holiday Mood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Mioritmic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이미지 출처 | Club Guesthouse, Mandragora/Film Desk, Ibiza Spotlight, Sunwaves, Holiday Mood, Mioritmic, Played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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