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ght It! / 2023. Jan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였던 2023년의 1월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목표한 곳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할 때.

2023년의 출발점에서 VISLA 편집부원은 과연 어떤 소비로 신년의 문을 열었을까. 새로운 커버와 함께 시작된 2023년의 첫 ‘Bought It’을 지금 당장 확인해보자.


서재덕 / 에디터 – Venta Luftwäscher Gmbh LW 25 전동링

최근 자취를 시작했다. 단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완벽한 자취 생활을 영위 중인데, 그것은 먼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먼지로부터 와서 다시 먼지로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먼지에 저절로 건강이 심히 염려됐다. 원체 깔끔 떠는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먼지의 출처를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쌓여가는 걱정과 청소포 만큼이나 코딱지도 쌓이는 중이니 어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본가의 창고에 안 쓰는 공기 청정기를 봤던 기억이 나 그 길로 본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20여 년도 더 된 벤타(Venta)사의 에어워셔(Air Washer), 구체적으로는 LW 25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나의 건강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나 같은 길거리 출신의 자취 생활에 럭셔리가 별첨 수프처럼 가미되는 격이라 필히 가져가야만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음에 20년이라는 세월의 풍파를 너무 세게 맞아 버린 나머지 고무 소재의 전동링이 찢겨 있던 것이다. 이에 따른 소음과 기능에 문제가 발생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벤타 코리아 고객 지원 센터에 문의해본 결과 이 노장 에어워셔를 위한 부품이 여전히 존재했다. 부품 비용 4,000원에 배송비 3,000원, 총 7,000원이라는 국밥 한 그릇에 준하는 금액으로 누리게 된 ‘럭셔리 헬시 라이프’(Luxury Healthy Life)는 길거리 출신인 나로서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 연휴가 겹쳐 조금 길어진 배송 기간 탓에 호화스러운 생활은 상도동 길거리에 빨리 찾아오지 못했고, 그 영겁의 시간 동안 노장 에어워셔를 몇 번이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 줄 모르겠다. 디테일을 향한 독일 디자인의 고집에 감탄하고 싶었지만 오지 않는 전동링과 만남 이후를 상상하기에도 사실 벅찼다.

일주일을 조금 넘겨 도착한 전동링과 만났다. 베르테르와 같은 삶을 청산하기 위해 부품을 재빨리 교체하고 에어워셔를 작동시켜 본다. 방을 가득히 채우던 먼지들이 조용히 물에 씻겨 시원한 공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격함에 감복한 나머지 나의 노장 벤타의 모터처럼 뉴진스(New Jeans)의 “OMG” 안무를 조용히 혼자 춰본다. 맑아진 실내 대기질만큼 몸은 맑아졌고, 정신은 선명하게 움직여진다. 어쩌면 이 작은 부품을 통해 경험한 것은 금입택 같은 자취 생활이 아닌 인간사였을 수도. 그래 맞다. 이것과 처음 만난 시기의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독야청청 에어워셔야. 변한 건 달력의 숫자와 나 자신뿐이구나’. 그렇다. 이것은 21세기에 맞게 개량된 소나무 같은 것.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 20년 전의 모습을 유지하는 공기 청정기와 달리 몸과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도 예전 내 모습을 찾기 어려워진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무엇이 변했고 어떻게 변했는가?’라는 질문에 기억 속에 젊었던 부모님의 초상과 달리 주름과 흰머리가 자연스러워지신 부모님과 놀이터가 아닌 취업 전선에서 뛰어든 친구들이 그 대답일 수 있으나, 어릴 적 순수함을 조금씩 잃어가며 연륜과 성숙이라는 핑계를 대는 내 자신이 질문의 정답일 수도.

‘좋을 때다!’라는 제법 꼰대 같은 탄식 섞인 감탄이 내 방의 먼지로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우리 인생에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 다만 그 당시에는 그때가 좋은지 모를 뿐. 마치 노후되어 찢어진 전동링 때문에 필터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마음의 먼지를 거르지 못해 현재에 불평하며 뒤를 계속 돌아보며 추억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우리 자신이었기에 매 순간 좋았을 시간의 흐름에 먼지가 내려앉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굳은살이 낄 때로 껴버린 채 찢어진 마음을 안고 먼지 가득한 어른 세계 속에서 그 좋은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먼지를 털고 작은 부품 하나 교체만 해도 공기 청정기는 20년 전 모습 그대로 완벽히 작동하였다. 언젠가 그리워할 이 시간과 사람들을 더 선명히 사랑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마음속 작은 부품 하나 신속하게 교체해보는 것은 어떨까? 단돈 7,000원에 나의 LW 25가 물탱크 너머로 보여준 지혜로 잠시나마 상도동 하이데거가 되어 본다.


오욱석 / 에디터 – Manebu Boo Mid

지난 2022년을 되돌아보며, 작년 한해 가장 잘 신었던 신발을 꼽아보자면, 단연 클락스 왈라비(Clarks Wallabee)다. 로우 타입의 베이지 컬러를 구해 정말 잘 신었는데, 더울 때나 추울 때나, (1)출근할 때, (2)가까운 자리에 친구를 만나러 갈 때, (3)정중한 태도로 격식 있는 자리에 갈 때 등등 전천후 적지적시의 신발이 되어줬다.

내가 이 신발을 왜 그리 자주 신었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니 편안한 착화감은 물론이요, 캐주얼과 포멀을 넘나드는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브랜드의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겸손함이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또한, 크레페 소재의 아웃솔이 주는 쫀쫀함이 신을 때마다 즐거운 기분을 들게 했다.

신발을 그리 아껴 신지도 않거니와 이렇게 오랜 시간, 그리고 빈번하게 신었으니 그 상태가 급속도로 낡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밑창은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탔고, 갑피 역시 군데군데 얼룩이 져 (3)번의 상황에서 착용하기 어렵게 됐다.

그간 마음 족하게 애용했으니 한 켤레를 하나 더 사기로 결정하고, 최저가의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똑같은 신발은 한 켤레 더, 그것도 그리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서 사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잘 신어놓고서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그렇게 살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이전부터 봐둔 마네부(Manebu)의 부 미드(Boo Mid) 모델을 한 켤레 샀다. 모 패션 브랜드에서 촬영용으로 사용한 제품을 번개장터에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는데, 보다시피 갑피는 모카신 형태지만, 아웃솔로 러버솔을 채택, 왠지 하이브리한 느낌의 왈라비랄까. 행여나 안 맞을까 걱정했던 사이즈도 잘 적당했고, 신었을 때의 감촉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왜인지 왈라비만큼 손이 안 간다. 구매 후 지금까지 딱 두 번 신었을 뿐. 심지어, 이걸 사고도 왈라비를 더욱 많이 신고 나갔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신발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복숭아뼈 직전 편안하게 떨어지는 탑라인의 높이 하며, 적당히 도톰한 어퍼의 두께 등등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한 왈라비의 또 다른 장점이 보인다. 뭐든 좋다고 느꼈던 것에는 분명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는 걸 새삼 배우며, 후회스러운 소비 기록을 여기에 남겨본다.

아, 왈라비 살 걸…….


황선웅 / 에디터 – MG 에피온 스페셜 코팅 & MG 윙건담 프로토 제로

지난 12월, 우연히 건담베이스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건담 프라모델 조립을 2023년 새 취미로 시작했다. 첫 시작은 HG 시난주였다. 조립할 때 발휘되는 집중력과 즐거움, 그리고 완성된 기체의 멋진 자태가 주는 뿌듯함에 시난주를 조립한 다음 날 곧바로 라이벌 기체인 HG 유니콘 건담까지 구매하여 격투 장면을 재현하여 전시했다.

그리고 올해 나의 첫 소비는 ‘에피온 건담 스페셜 코팅’과 ‘윙건담 프로토 제로’를 묶음으로 구매한 것. 1월 초에 구매하여 1월 중순에 총 4일에 걸쳐 두 기체의 조립을 완성해 신발장 위에 전시해둔 상황이다. 사진 우측에 빨간색으로 번쩍이는 녀석이 ‘에피온 건담’이고 좌측의 흰색이 ‘윙건담’인데, 사실 에피온에 더욱 애정이 가는 편.

건담 시리즈에 관심이 없었고, 시난주 HG로 시작했지만, 건담 조립을 단발적인 흥미에서 지속할 수 있는 취미로 흥미를 더욱 돋운 녀석은 에피온이었다. 건담베이스에서 처음 본 순간 심장이 멎었달까… 정말이지 첫눈에 반했다. 오버하며 번쩍이는 빨간색 코팅이나 방패에 절지류를 연상시키는 촉수까지 좀 과한 기체 디자인에 취향이 갈릴 수도, 또 딱 봐도 악당같이 생겼지만, 내 눈에는 너무 멋졌다.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중고나라에 검색해보니 쉽게 매물을 찾을 수 있길래 얼른 주웠다.

에피온이 뭐 하는 놈인지 모를 정도로 난 건담 시리즈에 무지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단순히 멋진 녀석을 조립하고, 전시하고 싶은 욕구가 크다. 그래서 내가 볼 때 멋있는 것들 위주로 수집하고 조립할 생각이다. 그런데 혼자는 쓸쓸할 테니까, 멋진 녀석과 함께 놀아줄 라이벌 기체까지 고려하여 두 개를 세트로 함께 모아갈 예정. 악역도 선역이 있어야 악역일 수 있고 라이벌이 형성되지 않나. 이번에 윙건담 프로토 제로를 묶음으로 구매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단, HG는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자동차 커뮤니티에 ‘아반때를 살 바엔 돈을 더 보태서 소나타를 산다’라는 ‘그돈씨’가 나에게 건담으로 적용되었다. HG를 살 바에는 돈 조금만 더 보태서 RG나 MG 일반판을 사는 게 더 나아 보이더라.


장재혁 / 에디터 – KIPLING 백팩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지난 수년간 홀로 힘겹게 이어온 백팩 찾기의 여정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학생 때부터 등 뒤를 든든하게 책임져주던 잔스포츠(JANSPORT)를 드디어 내던질 수 있게 됐으니 과연 상쾌한 신년 소비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2023년, 필자의 동반자가 될 가방은 보다시피 귀여운 고릴라 키링과 함께 2000년대 숱한 여학생의 학창 시절을 함께한 키플링(kipling)이다.

두고두고 들고 다닐 완벽한 백팩을 찾기 위해 해외 편집숍 사이트를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만, 우아한 자태로 고민할 시간도 없이 구매 버튼을 클릭하게 만드는 의류 제품군과는 달리 백팩이라 하면 모두 큼지막한 로고 혹은 부담스러운 디테일로 한숨을 자아내기 일쑤였다. 백팩이라는 제품의 특성상 ‘데일리룩’에 소리 없이 스며들면서도 그 존재감을 은은히 뿜어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조신하면서도, 조금은 깜찍한 아이템의 존재를 찾기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더라. 

그런 필자의 눈에 들어온 구세주 같은 브랜드가 바로 키플링이다. 여러 액세서리를 달아봐도 결국 ‘학생’같은 느낌을 지우기 쉽지 않던 잔스포츠와는 달리, 조금은 노티나는 디자인과 고릴라라는 필살기를 겸비한(사실 키플링 백팩이 가진 매력의 7할 이상을 이 고릴라 키링이 담당하고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키플링의 백팩은 데일리 아이템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키플링의 ‘근본’이라 하면 민트, 빨강, 남색이겠지만 추억보다 편함을 택한 필자를 용서하길 바란다.

앞서 언급했듯 필자의 학창 시절 키플링은 보통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템이었다(나무위키의 우스갯 소리에 따르면 “유럽에서 키플링 가방을 멘 사람은 한국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재까지도 이 시대 어머니들의 장바구니 그리고 심지어는 직장인들의 데일리 백팩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실로 엊그제는 번듯한 슈트 차림에 체크무늬 키플링 백팩을 멘 직장인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이유라 함은 단연 고릴라 키링이 풍기는 절대적으로 깜찍한 아우라와 이리저리 굴려도 망가지지 않는 튼튼함에 있을 것이다. 몇 년을 써도 망가지지 않을 것 같은 볼드한 지퍼, 낙하산 재료로도 사용된다는 질기디질긴 바디. 어떤 면에서 봐도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1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키플링 정품을 산다는 일에는 고릴라의 표정처럼, 약간의 억울함?을 느껴 중고 시장을 이용, 3만 원이라는 저렴한 소비에 성공했다.

종종 버스를 기다리며 고릴라의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다른 손에 붙였다가를 반복하곤 하는데, 오래 묵은 숙제를 해결한 탓일까, 이게 꽤 즐겁다. 시간도 잘 가고. 여기까지 읽고 키플링을 추억하게 된 이가 있다면, 지금 바로 중고 어플을 켜보는 건 어떨까.
 


Editor│오욱석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