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본 만화책이 있지만, 내 취향은 역시 당장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시대 배경 역시 최대한 현대적이면 좋겠다. 이러한 연유로 좋아하게 된 작가가 몇 명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역시 적어도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팔이 고무처럼 늘어나는 모습이나 도심 한복판에 좀비가 나타나는 장면을 실제로 목격할 리 만무하지만, 후자의 경우 좀 더 와 닿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취향에 더불어 극적인 현실묘사는 그 한 권을 집어 든 순간 나의 시간을 순식간에 워프시킨다. 집중해서 보고 있는 만화책의 등장인물이 그레고리(Gregory)의 배낭을 메고 있거나, 리복(Reebok)의 하이테크 운동화 퓨리(Fury)를 착용한 모습은 확실히 반갑다. 만화를 즐겨본다면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후루야 미노루(Furuya Minoru), 하나자와 켄고(Hanazawa Kengo), 모치즈키 미네타로(mochizuki minetaro)를 소개한다.
첫 작품은 후루야 미노루의 시가테라(シガテラ). 시가테라는 유독 어류에서 나타나는 식중독의 총칭이다. 원문을 일어로 밝힌 이유는 이 식중독의 발원지가 동경이기 때문, 후루야 미노루는 시가테라라는 제목의 만화를 통해 평범한 10대의 성장기를 그려낸다. 제목부터 짙은 왜색의 느낌이 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질병 시가테라는 시대 구분 없이 자신과 세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10대의 모습부터 통증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시가테라, 두더지, 가장 최근의 솔티니스까지 비슷한 흐름의 다작으로 유명한 후루야 미노루지만, 역시 후루야 미노루를 대표하는 작품은 ‘엽기만화’로 잘 알려진 ‘이나중 탁구부’일 것이다. 학창시절 스포츠를 좋아했으나 축구부, 야구부에 들어갈 근성이 없어 탁구부를 선택했다는 후루야 미노루는 그 유쾌함을 자신의 만화 곳곳에 섞어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스토리로 독자를 즐겁게 한다. 그 작품 여기저기서 만나볼 수 있는 디테일은 특유의 꼼꼼한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나 역시 학창시절 그의 만화책을 보며 작가의 패션 감각에 감탄한 적이 여러 번이다. 다양한 스타일로 이야기에 힘을 싣는 만화의 패션 디테일을 탐구해보자.
작화 중 등장하는 나이키(Nike)의 코르테즈 빈티지 모델이나 버킷햇은 유니크한 아이템은 아니지만, 소위 ‘니뽄삘’이라는 말로 통했던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유행과 닮았다. 현실의 유행을 극에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교복만을 입고 나오는 여타 만화보다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나이키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빈티지 스니커를 대표하는 운동화 중 하나인 코르테즈는 1972년 첫 출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플라이니트(Flyknit) 기술을 첨가한 신제품도 발매되었지만, 코르테즈라하면 나일론 소재의 바디를 갖춘 위 사진의 모델이 가장 멋스럽다. 곳곳에 스웨이드를 첨가한 코르테즈의 단순한 매력은 최근의 하이테크 슈즈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특별한 기능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모자람 없이 채운 스우시와 가벼운 착용감은 계속해서 코르테즈를 찾게 만드는 이유다.
위 언급했던 ‘니뽄삘’의 완성은 버킷햇이 아니었을까. 나이키 로고가 깔끔하게 박음질 된 버킷햇은 2000년 초반 일본 청소년들의 의복 문화를 담아내기에 최적의 아이템이었을 것이다. 나이키 외 다양한 스포츠 브랜드의 버킷햇은 지금 스트리트 브랜드에서 전개하는 제품과는 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주인공뿐 아니라 작중 큰 의미 없는 주변 인물에게도 브랜드 의류를 부여한다. 작중 BVCA는 RVCA를 참고한 것처럼 보인다.
RVCA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서핑 브랜드다. 이외 스케이트보드 기반의 의류를 생산하기도 한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좋은 디자인의 의류를 제작했지만, 2010년 거대 서핑 브랜드 빌라봉(BILLABONG)에 흡수되며 예전과 같은 신선한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언뜻 일본 브랜드로 착각할 수 있지만, 카부(KAVU)는 1993년 미국 시애틀에 기반을 둔 아웃도어 브랜드다. 동양적인 디자인 덕분인지 아시아권, 특히 일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제작 시 친환경적 소재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캐주얼한 디자인으로 아웃도어를 넘어 다양한 스포츠 활동에 적합한 디자인을 통해 일상에서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의류를 만든다. 국내에 소개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패션 브랜드의 영역에 침입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브랜드이다.
칼하트(Carhartt)의 스테디셀러 비니와 그레고리(Gregory)의 로고가 선명한 티셔츠, 이미 일본에서 좋은 인기를 구가했던 챔피온(Champion)의 의류 역시 등장한다.
워크웨어의 대명사 칼하트(Carhartt)의 비니. 최근 WIP 라인의 대단한 인기와 함께 국내 번화가 어디에서든 칼하트를 보는 게 어렵지 않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칼하트는 조금 부진한 느낌이지만 칼하트의 비니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칼하트의 역사와 함께 꾸준히 걸어온 칼하트 비니는 칼하트의 매력적인 로고와 부드러운 피팅감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이다. 다양한 컬러 전개와 변하지 않는 품질로 칼하트라고 할 때 비니를 가장 먼저 떠오르게 할 정도로 다양한 제품군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꼭 시가테라가 아니더라도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을 보다 보면 챔피온(Champion)의 의류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듯한 브랜드 챔피온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어센틱 브랜드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에 챔피온 재팬(Champion Japan)이라는 독자적인 라인은 국민 브랜드가 되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좋은 품질로 타 브랜드와의 협업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동양인의 신체를 고려한 챔피온 재팬 그 나름의 디자인 역시 훌륭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 그레고리의 기본 로고티 역시 후루야 미노루의 개인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아이템 중 하나다. 일본인들 자체가 워낙 아웃도어 기반의 브랜드를 좋아하지만, 그중 그레고리는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단골 아이템이다. 과장되게 표현한 주인공의 얼굴과 세밀히 묘사된 그레고리의 티셔츠는 꽤 재미있는 조합을 만들어 낸다. 1977년 처음 시작된 그레고리는 외부 프레임 배낭을 시작으로 내부 프레임 배낭까지, 액티브 서스펜션 기능 외 6가지 특허 기술을 가지고 있는 그레고리는 아웃도어 배낭의 명품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디자인과 기능으로 현재는 아웃도어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유서 깊은 브랜드이다. 그 단순한 로고만으로 큰 신뢰를 주며 전 세계에 걸쳐 많은 팬을 양성하고 있다.
나이키의 에어포스 1 모델과 반스(Vans)의 하프캡(Halfcab), 정밀하게 묘사된 하프캡이 인상적이다.
나이키 최고의 스테디셀러 에어포스1 로우 모델이다. 흰색 에어포스1이다. 최초의 에어가 들어간 농구화 에어 포스1은 그간 러닝화를 중심으로 운동화 제작을 했던 나이키에서 에어 쿠션을 농구화에 적용, 그 첫 성공을 알린 기념비적인 신발이다. 흰색 외에 다양한 컬러링, 아웃솔의 변화로 팔색조와 같은 매력으로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모델이 발매되었지만 역시 에어포스1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제품은 순백색의 에어포스1 White/White 모델이지 않을까.
반스(Vans)를 대표하는 스케이트보드 스니커 하프캡(Half Cab)은 레전드 스케이터 스티브 카발레로(Steve Caballero)로부터 시작되었다. 하프캡의 전신은 반스와 카발레로가 협력한 스티브 카발레로 시그니처 스니커 카발레로(Caballero)라는 모델로 당시 발매된 카발레로는 그 특유의 내구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하이탑으로 제작된 탓에 발목을 주로 사용하는 스케이터들의 특성 상 신발의 발목 부분을 제거한 뒤 신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영감을 받은 카발레로는 반스에 발목 부분을 제거한 로우탑 모델을 제안하게 되는데, 이후 두 번째로 제작된 제품이 지금의 하프캡이다. 국내에서는 특유의 투박함 때문에 반스의 다양한 제품군 중에서도 비주류 취급을 받고 있지만, 슈프림(Supreme), 허프(Huf), 칼하트(Carhartt)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스니커 중 하나다.
지금까지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 시가테라에 등장한 패션 아이템에 대해 알아보았다. 시가테라 외에도 후루야 미노루는 그 작화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가며 다양한 아이템을 등장시킨다. 과장된 인물 묘사와 함께 세밀히 묘사된 패션 아이템의 그림은 확실한 몰입을 보장하는 것 같다. 크게 대중적인 작가는 아니지만,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은 당신에게 더 큰 재미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하나자와 켄고,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작품을 통해 만화 속 패션을 계속해 탐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