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가수 중에서도 화려한 군무를 추는 아이돌이 있고 라이브 실력이 뛰어난 솔로 가수가 있듯 모두 천차만별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다양성을 생각해보면 비주얼을 무기로 삼는 디제이도 필요하고, 믹싱 스킬이 화려하거나 선곡이 죽이는 디제이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를 되돌아보면, 아이돌 문화가 막 태동할 때 생방송에서 립싱크하는 가수들의 무대에는 TV 화면에 립싱크 표시가 됐었지요. 립싱크 무대가 논란이 되면서 기성세대 시청자, 또는 음악 관련 평론가들이 많은 비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춤만 추는 가수가 댄서지 무슨 가수냐면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아이돌도 어떤 상품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이에 대한 논란 역시 잠식되었어요. 결국 '나는 가수다'와 같은 순수한 가창 실력에 의존한 프로그램도 등장했고, 이와 같은 현상은 '가수'라는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모 여성 디제이가 피리 춤을 추거나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기본적인 자질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디제이'라는 호칭을 쓰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 같습니다.” - DJ XXX(익명)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영원한 이인자, 박명수가 최근 디제이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며 국내의 디제이들은 마냥 웃지만은 못했을 것이다. 주로 모델, 패션 업계의 셀러브리티가 으레 관심을 보이는 클럽(또는 파티) 디제이는 어쩌면 대중들에게 너도나도 할 수 있는 ‘부업’, 내지는 ‘취미’ 정도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디제이는 클럽의 역사와 디지털의 발전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영토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턴테이블, 믹서, 그리고 21세기 디제이의 필수 장비가 된 랩톱을 번갈아 만지며,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디제이는 세계적으로 수많은 젊은이가 동경하는 삶이자 목표가 되었다.
디제이 신드롬은 곳곳에 있는 출처를 알기 힘든 디제이들만 봐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SNS를 둘러보라. 프로필에 버젓이 ‘DJ’라고 써놓은 이들의 계정에는 헤드폰을 끼고 믹서의 EQ를 정성스레 애무하는 사진들이 한가득 실려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디제이 부스에 오를 자격이 있는가? 디제이는 이제 차고도 넘치지만 화려한 믹싱 스킬과 세련된 선곡으로 관객을 주무르는 진짜 디제이는 아직도 손가락을 꼽는다. 어째서일까? VISLA는 최근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여성 디제이 논란을 시작으로 약 10년 차 경력의 중견 디제이, XXX와 디제이에 관련된 일문일답을 나눠보았다.
미디어의 힘을 새삼 느낀다. 최근 그 여성 디제이는 CF에도 출연했다.
그 기획사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모델 출신의 여성 디제이를 띄우려했지만, 아마도 성공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지금에 와서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문턱이 높은 모 회사의 행사에서도 음악을 플레이했다고 들었다.
맞다. 그 회사의 담당자와 대행사가 바뀌면서 행사 퀄리티도 떨어진 것 같다.
외국에서도 거짓 믹싱, 과장된 퍼포먼스로 몇몇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만약 외국이었다면 대놓고 욕먹을 한국 디제이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한국 정서상 그러지 못할 뿐이지.
그렇다면 좋은 디제이의 믹스셋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디지털이 디제이 장비에 도입되기 전, 오로지 LP로만 음악을 플레이하던 시절에는 라이브러리에서부터 차이가 많이 났다. 일명 ‘판싸움’이지. 그래서 예전 디제이들은 자기가 트는 곡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마커로 LP에 적힌 제목을 지우거나 테이프를 붙여놓는 문화가 있었다. 근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어졌다. Shazam이나 Soundhound로 모르는 곡이 나오면 찾아볼 수도 있고, 심지어 디제이들 셋의 트랙리스트만 정리해서 올라오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누구나 원하는 음원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질 수 있다 보니, 라이브러리가 큰 의미가 없어진 거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디제이의 색깔이다.
요즘 시대에 디제이들의 필살기라 하면 뭐가 있을까?
디지털 디제이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트랙들을 바로바로 틀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가 만든 리믹스, 오리지널 트랙을 틀고 남들과 차별화되는 스킬까지 가져야 필살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디깅(Digging)하나? 요새는 하루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음악들이 공개되고 있다.
주요 공식 릴리즈를 듣는 것은 가능하나 현재 공개되는 모든 음악을 다 들을 시간은 없다. 그래서 다른 디제이의 팟캐스트, 셋, 라디오를 듣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신용하는 디제이나 매체를 통해 선곡을 한번 거쳤다는 의미니까. 거기서 찾은 음악을 또 가지치기하다 보면 몇 시간이 훅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가?
음악을 듣는 시간은 하루에도 족히 몇 시간은 되지만, 정말 음악을 찾는 건 매일 한두 시간쯤 된다. 그러나 음악을 플레이하기 며칠 전부터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음악을 몇 초씩 끊어 들으면서 가려내는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음악 감상은 아니지 않나?
어쩔 수 없다. 히트곡이 하나만 나와도 수십 개의 리믹스가 올라온다. 음악 ‘감상’을 위해서라면 차근차근 들어보겠지만 감상이 아니라 플레이를 위해 음악을 찾는 과정이다 보니 원하는 사운드가 아닐 때는 빨리 넘겨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한곡을 틀고 다음 곡으로 넘기면서 디제이는 무슨 일을 하는가?
다음에 어떤 곡을 틀지 정하고 비트매칭(Beat-Matching)을 한 뒤,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곡을 전환한다. 미리 셋을 짰거나 준비한 루틴을 하는 경우도 있고 즉석에서 생각난 대로 할 때도 있다.
영국의 DJ Ellaskins 비트매칭 연습 튜토리얼 영상
즉석에서 플레이 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지 않나?
선곡도 신경 쓰면서 분위기를 자연스레 이끌다 보면 미리 짠 대로 트는 것이 더 비효율적일 때가 많다. 여러 가지 변수가 있어서 어느 정도는 고려해야 하지만 평소에 연습이 되어있고 곡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면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한국 디제이들은 믹스셋 앨범을 잘 내지 않는 것 같다.
시간 투자 대비 피드백이 적어서다.
모든 음원을 구매하나?
아이튠즈나 비트포트에서 정식 음원을 사서 트는 게 올바른 방법이긴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디제이가 모든 음원을 구매하지는 않는다.
정식 루트를 통해 구매하지 않는 음원은 음질이 낮아서 선호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신중히 선택하고 음원을 골라내는 것이 디제이의 기본 자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디제이는 기본적으로 현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최고의 음질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간혹 디제이 중에는 Wav 파일(무 손실 음원)이 아니면 아예 틀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음질의 차이가 큰가?
대형 클럽, 페스티벌처럼 사운드시스템의 규모가 커질수록 티가 많이 난다.
기업 행사에서 디제이를 초빙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우는 어떤가. 아티스트로 존중받고 있나.
좋게 생각하면 아티스트지만 그냥 배경 음악 정도로 생각하는 곳도 있더라. 천차만별이다.
디제이의 퍼포먼스에 대해 부정적인가?
아니다. 디제잉을 하면서 퍼포먼스까지 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전제조건은 믹싱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믹싱을 잘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믹싱의 기초는 두 곡의 박자를 똑같이 맞추는 비트매칭(Beat-Matching)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A에서 B로 넘어갈 때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A의 보컬이 나오고 있을 때 B의 보컬이 함께 믹스되지 않는 것? 이런 부분에서 틀린다는 것은 기본이 돼있지 않는 거다. 가수로 치면 음정, 박자를 무시하고 노래를 부르는 셈이지.
영국의 음악 플랫폼, 보일러 룸(Boiler Room)의 경우는 디제이의 믹스를 한 큐로 녹화하는 프로그램이라서 더욱 신중해야 할 것 같다. 디제이들에게 부담되는 방식의 편집 아닌가?
물론이다. 그런 프로그램은 디제이의 믹싱을 여과 없이 보여줘서 디제이에게 자극과 부담을 동시에 안겨줄 것이다. 한국의 MIXMIX TV 역시 마찬가지다.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MIXMIX TV가 처음 주목을 받다가 지금은 잠시 주춤한 상태인 것 같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디제이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한국에는 이런 프로그램의 소비층이 많지 않다. 클럽에 신선한 음악을 들으러 간다는 말은 적어도 한국의 일부 베뉴를 제외하면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크 숍(Cakeshop)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MIXMIX TV 39: DJ Conan @Opium Studio
한국의 대형 클럽에서 디제이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케이크 숍을 포함, 일부 작은 클럽을 제외한 모든 클럽이 아마 그러할 것이다. 제일 많이 들었던 표현은 쉽게 틀어달라는 말이다. 해외 유명 디제이가 부스에 올랐다가 30분 만에 끌려 나오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사장의 말은 절대적이다. 한번은 게스트 디제이로 일렉트로닉 클럽에서 셋 중간에 힙합을 틀었는데, 플로어의 반응이 좋았다. 그런데 사장이 오더니 VIP들이 이 음악을 안 좋아하니까 일찍 내려오라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대형 클럽의 경우, VIP 한 명이 일반 입장객 100명 값을 하니까. VIP 테이블 하나가 소규모의 클럽 하루 매출보다도 더 나올 수 있을 정도니 그들의 입장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형 클럽은 다른 클럽보다 더 많은 페이를 지급하는가?
레지던트 디제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진 않다. 큰 차이 없다.
그런데 파티 디제이들은 레지던트 디제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자기 음악, 스타일을 보여주기 힘드니까. 그들의 노력도 십분 이해하지만 아무래도 디제이들 사이에서 많이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디제이가 전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나?
전업으로 삼는 디제이는 몇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전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대형 클럽의 레지던트 디제이를 하는 것이다. 적어도 두 군데에 몸담고 있으면 대기업 사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다. 그다음은 행사를 많이 뛰는 디제이다. 그런데 행사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후자의 경우를 택한 디제이는 국내에서 아마도 열 명 내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밥그릇 싸움이 존재한다.
한국 디제이 신은 성장했다고 보는가?
올해로 11년째 디제이를 하고 있는데 양적으론 많이 성장하였다. 대중의 인식도 좋아졌지만, 정작 대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진행 ㅣ 최장민
텍스트/편집 ㅣ 권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