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무계 동계스포츠 애니메이션 “Ski Jumping Pairs” 이모저모

2009년, OST “Butterfly”와 함께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영화 “국가대표”를 기억하는가. 800만 관객을 동원했던 “국가대표” 덕에 당시 비인기 동계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외면받던 ‘스키점프’도 잠시나마 빛을 보는 듯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무렵 반에 한두 친구쯤은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듯한 요상한 점프 자세를 하고 있었을 테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높이. 인간의 날고 싶은 욕망을 투영한 스키점프는 하강시 몸을 최대한 웅크려 표면적을 줄이고, 비로소 공중에 몸을 내맡겼을 때는 발을 ‘V’자로 벌리고 몸을 숙여 양력을 최대로 한다. 이런 독특한 자세 덕에 스키점프는 한때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수차례 웃긴 몸동작으로 재현됐지만, 영화의 인기가 사그라들며 스키점프에 대한 애정 역시 점차 옅어져 갔다.

하지만 아시아 동계 스포츠의 강국이자 애니메이션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일본은 역시 뭔가 달라도 달랐다. 겨울 설산의 얼어붙은 공기처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봐야 하는 스키점프조차도 하나의 즐길 거리로 승화시킨 이가 등장한 것인데, 애니메이션 감독 마시마 리치로(Mashima Richiro)가 그 주인공이다.

마시마 리치로의 “Ski Jumping Pairs”는 스키점프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단, 우리가 흔히 아는 스키 점프와 다른 몇 가지가 있다면 스키 점프대에 선 선수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공중에서 다소 괴상한 자세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포옹, 발목 잡아 매달기는 그나마 쉬운 동작에 속할 정도로 윗몸일으키기, 노상방뇨 등 스키점프대 위에 선 듀오는 말 그대로 별의별 짓을 다 하며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보고 가는 편이 낫겠다.

애이콤 프로덕션이 발간했던 애니메이션 잡지 ‘애니메이툰(Animatoon)’의 2007년 1월 호(no.65)에서는 “Ski Jumping Pairs”의 DVD가 한국에서 판매되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라 전했지만, (자랑삼아 전하자면)필자는 긴 시간 마시마 리치로의 유산을 추적한 끝에 미개봉 풀 DVD 제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DVD의 눈 내리는 배경 속 흘러나오는 차분한 해설과 완벽한 부조화를 이루는 괴상스러운 포즈를 보고 있자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시마 리치로 그리고 그의 유산 “Ski Jumping Pairs”를 찬찬히 쫓은 결과를 공유하고자 하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신개념 동계 스포츠에 끌린다면 함께해봐도 좋을 것.


전설의 시작, “Ski Jumping Pairs” 단편 상영

마시마 리치로의 “Ski Jumping Pairs” 첫 단편은 2002년 그가 도쿄의 미술학교 디지털 할리우드에 재학할 당시 졸업작품 발표회에서 공개한 작품으로, 가상의 종목 ‘스키 점핑 페어’가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는 가정 하에 펼쳐지는 경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두 선수가 팀을 이뤄 기상천외한 자세의 스키점프를 한다는 전무후무한 콘셉트의 6분 분량 애니메이션은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마시마 리치로 역시 이를 직감이라도 한 듯 졸업작품 발표회 바로 다음날부터 추가적인 작업에 돌입해 총 6편의 단편을 완성했고, 이내 DVD로 제작된 “Ski Jumping Pairs”는 누계 50만 장을 돌파하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애니메이션계의 역사를 새로이 장식했다. 당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의 목소리” 판매수가 5만 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가히 경이로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후에 제작된 단편의 퍼포먼스는 전작보다 훨씬 강력한데, 동료 스키복에 들어가 캥거루가 되는 호주팀부터 태극권의 중국팀 그리고 공중에서 컬링 퍼포먼스를 선보인 노르웨이팀까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상상의 끝에 도달한 듯한 그의 작품이다.

이쯤 되면 이 황당무계한 동계 스포츠가 과연 어떻게 탄생했는지 의구심이 들 만도 하겠다. 어릴 적부터 스포츠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던 마시마 리치로는 스키점프 경기를 보던 중 문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길고 큰 스키를 혼자 타기 아깝지 않나?’ 2인조 코믹 듀오가 펼치는 전설적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스키 점핑 페어는 비거리와 퍼포먼스의 예술성에 점수를 매겨 합계로 순위를 결정한다는 규칙을 따르는데, 보통의 스키점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퍼포먼스 점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 즉, 극한의 운동 능력과 더불어 기발한 육체적 아이디어까지 요하는 스포츠가 바로 스키 점핑 페어인 것이다.

비록 누군가는 해봤을 법한 아이디어지만 마시마 리치로의 ‘똘끼’ 섞은 액션과 귀여운 레트로 그래픽을 장착한 2인조 스키 듀오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화려하게 비상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나 획기적이었던 졸업작품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던 마시마는 이를 온라인에 업로드했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된다. 후에 영화제 출품에도 적극 나선 결과,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를 비롯한 전 세계 30개 이상의 영화제에 초청되는 기염을 토한다. 그 와중 도쿄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에이벡스(Avex)로부터 DVD 제작을 제의받고는 앞서 언급한 기록적인 판매고를 달성하기도 했다. 비록 무게는 두배가 되었지만 거리는 두 배, 아니 스무 배 이상은 나아간 마시마의 회심의 작품이 바로 “Ski Jumping Pairs”다.

상단의 첨부 영상은 DVD 1편 내 모든 플레이 장면을 담아둔 것으로, 보다 과감하고 기괴한(?) 마시마 리치로의 상상력을 맛보고 싶다면 나머지 DVD를 구입하는 걸 추천한다. DVD 1편이 스키 점핑 페어 경기에만 집중했다면, 2편에서는 민영방송의 두 앵커가 경기를 해설하는 콘셉트를 추가해 실사와 3D를 접못한 것이 눈에 띈다. 두 앵커는 경기 중계 전 약 10여 분간 잡담을 이어가는데 이는 마시마 리치로가 쓸데없는 소리를 잘하는 민영방송을 비꼬기 위해 삽입한 장면이라고. 아쉽게도 한글이나 영어 자막이 없어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한 편의 콩트를 보는 분위기를 자아내니 눈여겨봐도 좋겠다. 중계 마지막에 일본이 1위를 차지하지 아이처럼 좋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내심 귀엽다.

장편 영화로의 도약, “스키 점핑 페어 : 2006토리노로 가는 길”

보기 좋게 비상한 “Ski Jumping Pairs”는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스키 점핑 페어 : 2006토리노로 가는 길”로의 부드러운 착지에 성공한다. 물론 영화는 애니메이션처럼 주구장창 괴상한 스키점프만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니 안심하자. 대신 마시마 리치로가 택한 이야기는 ‘스키 점핑 페어가 어떻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는가’다.

영화는 백발의 물리학자 하라다 박사가 물체가 어는점 이하의 온도에서 충격이나 회전을 겪으면 세포분열을 한다는 ‘쭈쭈바 이론’과 두 개의 생물이 공기 저항을 덜 받는다는 ‘랑데뷰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스키 점핑 페어’라는 종목을 창안하며 시작한다. 이후 이를 올림픽 공식 종목으로 채택시키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하는 과정을 진지하게 담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지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한 것이 “스키 점핑 페어 : 2006토리노로 가는 길”의 진짜 매력(후술하겠지만 이 또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향일지도).

애니메이션에서 장편 다큐멘터리로 넘어가는 기로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2인조 듀오의 고공비행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였을 텐데, 마시마 리치로는 이 부분에서 아주 과감한 시도를 감행한다. 바로 본인이 제작했던 3D 애니메이션을 실사 다큐멘터리 중간에 그대로 가져다 쓴 것. 물론 약간의 질감을 보완하긴 했지만 그 누가 실사와 3D 그래픽을 섞을 생각을 하겠는가. 마시마는 이 부분을 두고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제대로 살린다면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마시마의 기발한 아이디어 덕에 단편에 이어 장편 역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도쿄 국제영화제 특별상 수상과 더불어 암스테르담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되기도 하는 등 일본을 넘어 국제적인 명성을 쌓으며 ‘스키 점핑 페어 덕후’들을 양산해 갔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종종 머나먼 이국 땅에서 판매하고 있는 DVD 몇 장을 이베이(Ebay), 아마존(Amazon)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현재 온라인 기사, 영화 소개 등에 남아 있는 “스키 점핑 페어 : 2006토리노로 가는 길”에 관한 내용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다 구체적인 추적이 불가능했다는 점에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즐기는 스키 점핑 페어, “Ski Jumping Pairs Reloaded

사실 마시마 리치로는 아주 치밀한 인간이다. “Ski Jumping Pairs”의 단편 제작 당시부터 ‘스키 점핑 페어’라는 세계관을 염두에 뒀던 그는 이를 지속적으로 신문, 책 등 여러 미디어를 통해 노출시키며 더 큰 세계를 꿈꿨다. 그리고 그의 계산은 아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영화, CF를 넘어 결국에는 게임계까지 그의 작품에 매료됐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애초에 3D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 “Ski Jumping Pairs”이기에 게임으로의 전환은 장편 영화로의 변신보다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Ski Jumping Pairs”는 2006년 3월 16일, 플레이 스테이션 2(Play Station 2) 버전의 게임 “Ski Jumping Pairs Reloaded”로 재탄생했다. 26개국에서 온 28 팀의 선수가 등장하는 게임은 토너먼트, 대결 및 훈련 모드를 제공하며 플레이어가 2라운드에 걸쳐 경쟁하는 토너먼트 모드가 게임의 메인 콘셉트라 할 수 있다. 한편, 일종의 스토리 모드와 같이 진행되는 대결 모드는 플레이어가 다른 상대와 경쟁하며 포인트를 쌓은 후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잠금 해제하는 식의 진행 방식을 택해 다양성을 더했다.

게임의 조작은 기존 리듬게임 방식을 차용했는데, 선수들이 활강하는 동안 화면 양쪽에서 내려오는 버튼 표시를 보며 정확한 타이밍에 해당 버튼을 누르는 비교적 간단한 조작법을 취했다. 애니메이션이 게임으로 넘어오며 그래픽 구현에 있어 조금 단순해진 감이 있지만, 게임 내 이식된 듀오의 다채로운 몸짓을 보면 원작의 콘셉트를 꽤나 충실히 유지한 모습이다. 비록 다이내믹한 PS2 게임은 아닐지라도,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해설과 함께하는 이 황당한 스포츠 게임은 분명 레트로 게임 마니아들에게는 매혹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을 것.


TMI

  1. 2006 토리노 올림픽을 테마로 한 만큼 세계 각국의 2인조 스키점프 듀오가 경기에 참여하는데 마시마 리치로는 한국팀도 빼놓지 않았다. DVD 1편에는 ‘김광회’, ‘천상민’의 이름으로 참가하는 두 선수가 등장하는데, 직접적인 경기 영상은 없지만 9위에 랭크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망하긴 이르다. DVD 2편에 들어서면 드디어 ‘이용준’, ‘배병헌’이라 불리는 노란색 슈트를 입은 한국팀 듀오가 등장하니 말이다. 이들은 ‘아빠다리’를 하고 옆으로 눕는 퍼포먼스로 웃음을 선사한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두 캐릭터의 성을 바꾸면 ‘배용준’과 ‘이병헌’이 된다. 그렇다. 마시마 리치로는 장난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이다.
  2. 핀란드 영화계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는 일본 영화계와 끊임없는 교류를 이어온 감독으로, 일본 내에서도 그에 대한 아낌없는 지지와 사랑을 보내는 이들이 꽤나 많다. 마시마 리치로 감독도 그들 중 한 사람으로, “Ski Jumping Pairs” 속 핀란드 듀오를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와 그의 친형 ‘미카 카우리스마키(Mika Kaurismaki)’로 등장시키며 두 영화감독 형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단순히 이름을 차용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첫 영상물의 첫 선수로 등장시키는가 하면, 경기에서도 핀란드팀이 1위를 기록하는 것으로 설정하며 둘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두 번째 영상에서는 볼링공을 출발 전 떨어뜨리며 실격당하는 모습으로 연출, 카우리스마키 형제의 영화를 대표하는 ‘유머’를 놓치지 않았다. 카우리스마키 형제는 마시마 리치로의 세계에서 키도 몸무게도 똑같은(185cm, 72kg) 쌍둥이로 등장하는데 두 사람 모두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이다.
  3. 현재는 이용할 수 없지만 라인(Line) 스토어의 이모티콘으로 ‘Ski Jumping Pairs BIG’가 출시되기도 했다.
  4. 마시마 리치로는 2002 부천국제대학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통해 “Ski Jumping Pairs”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게 된다. 이후 장편 영화 “스키 점핑 페어 : 2006토리노로 가는 길”을 완성한 마시마 리치로는 2006년 11월 중앙극장에서 열리는 ‘애니임팩트’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한국을 찾았으며, 이후 2011년에도 한국만화진흥원이 주최하는 ‘애니매니아 영화제’ 제1회에 “시네마경마” 시리즈로 참가하기도 했다. DVD 1편 부록에서 부천국제영화제를 찾은 마시마와 그가 담은 2000년대 초반 서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 “Ski Jumping Pairs”의 풀 DVD는 총 8장의 DVD와 한 권의 가이드북으로 구성됐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8장의 DVD 중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수 있는 DVD는 1, 2, 8편에 불과하다는 사실. 나머지 DVD는 공 CD로 구성됐으며 DVD 패키지에는 원하는 영상을 마음껏 담으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이미지 출처 | 씨네21, psxdatacenter,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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