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을 맞아 돌아온 컬트 영화 추천 시리즈. 앞선 ‘신년 맞이 컬트 영화 추천 5작‘에서도 설명했듯이 컬트 영화는 특정 장르를 지칭하는 게 아닌, 대중들이 많이 알고 있지 않으나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일부 비주류 관객 층에게 사랑을 받는 영화를 일컫는다. 이번에는 긴 러닝 타임을 버티기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최단 2분 30초짜리부터 최장 21분까지의 단편 실험 영화들을 가져왔다. 당장 볼 수 있는 것들이 대다수이니 호기심이 간다면 바로 재생 버튼을 클릭해 보자.
1. 악어의 거리 (Street of Crocodiles, 1986)
퀘이 형제(Quay Brothers)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20년도 즈음 한국에서도 개인전을 한 바 있지만, 아마 그들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퀘이 형제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오랜 우상이기도, 애니메이션계 거장 얀 슈반크마이에르(Jan Svankmajer)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한 훌륭한 감독 형제다. 두 형제는 스톱 모션 퍼펫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무대 디자인, 뮤직비디오, 광고와 다큐멘터리,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쳐왔다.
“악어의 거리”는 21분 분량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칸 영화제 단편 경쟁작에 올라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폴란드의 카프카라 불리는 브루노 슐츠(Bruno Schulz)의 동명 단편 소설이 원작으로 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요한 밤 오래된 박물관, 관리인이 오래된 키네토스코프[1]에 침을 떨어뜨리자 그 속에 있던 기이한 인형들과 재단사가 깨어난다. 인형들은 상자를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재단사를 방해한다. 악몽 같은 세계에서 재단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악어의 거리”는 단 한 줄의 대사 없이 이미지만으로 미궁담을 보여준다.
환영들의 불온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곳이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악몽 같은 세계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하는 절망적이고 몽환적인 원작의 내용을 잘 살렸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여타의 작품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으나, 퀘이 형제만의 독창적인 비주얼의 퍼펫들과 오브제, 세트 디자인은 “악어의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학.
2. 아트만 (Atman, 1975)
“아트만[2]”에는 내러티브가 없다. 이미지가 곧 내용이다. 본 영화는 일본의 실험 영화 대가인 마츠모토 토시오(Toshio Matsumoto) 감독이 프레임과 프레임을 붙일 때 생성되는 마찰 운동인 몽타주를 실험한 영상으로, 한야[3] 가면을 쓴 채로 홀로 앉아있는 인물을 러닝 타임 11분 내내 조명한다. 짧은 영상들이 교차 편집되다가 나중엔 스톱모션처럼 사진들이 반복된다. 초반에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인물을 구심점으로 회전하는 것에 그쳤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물리적으로 인물과의 거리를 좁혔다 늘리며 회전한다. ‘아트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리듬에, 귀가 찢길 듯 실험적인 전자 음악이 겹쳐지니, 바람을 맞으며 머리칼을 휘날리는 한야 가면의 으스스한 아우라에 절로 눈을 내리깔게 된다.
마츠모토 토시오 감독이 직접 그린 위의 콘티를 참고해 보자. 48점의 촬영 포인트와 더불어 인물과의 거리, 컬러 필터의 조합 등의 정보가 그려져 있고, 그래프 콘티에는 편집의 순서가 프레임 단위로 기재되어 있다. 단순하게 줌 인 줌 아웃을 반복하는 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아트만”의 모든 장면들이 그의 치밀한 계획 하에 찍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짧은 영상에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3. 어리석은 (Absurda, 2007)
2007년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여 ‘영화관’하면 떠오르는 느낌을 주제로 역대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 35명이 3분짜리 스케치 33편을 찍어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중 필자의 선택은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어리석은”.
“인랜드 엠파이어”,”멀홀랜드 드라이브”와 같은 전작들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꿈과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해온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세계관을 집약시켜 보여주는 “어리석은”. 영사기의 빛을 자르는 가위, 춤추는 댄서, 비명소리, 상처투성이 얼굴, 난도질하는 소리 그리고 영화관. 맥락 없는 조합이 이리저리 뒤엉켜 의식의 흐름처럼 흐르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감각을 안겨준다. 데이비드 린치에게 영화관은 그저 현실의 그림자일 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영사하는 공간이다. ‘서사 없음, 논리 없음’이 주제인 “어리석은”. 악몽을 2d인 스크린에 포착하려는 데이비드 린치의 또 다른 시도.
더 설명하다간 영화 러닝타임보다 말이 길어져 버릴 수 있겠다. 2분 만에 섬찟한 공포를 선사해 줄 “어리석은”을 아래에서 직접 감상해 보자.
4. 작은 영혼 (Duszyczka, 2019)
강둑에 시체 한 구가 놓여있다. 썩어가는 장기에서 영혼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영혼은 시체를 떠나 사후세계처럼 보이는 숲으로 여행을 떠난다. 제72회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경쟁부문에서 3위를 수상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폴란드 출신 감독 바바라 루픽(Barbara Rupik)의 작품이다. 작은 영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볼 수 있는 사후세계 풍경은 마치 르네상스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정원’의 지옥 부분을 연상케 한다.
구더기에 파먹힌 말의 시체에서도 영혼 하나가 등장한다. 작은 영혼은 이 말의 영혼을 타고 강둑을 따라간다. 아름다운 빨간 불빛을 쫓아가는 작은 영혼이 당도한 곳에는 윙윙 거리는 파리 떼와 엉킨 머리카락, 축축하고 불그스름한 피부 가죽, 수 십 개의 핀셋 등 아브젝션적인 소재로 표현된 악마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감독은 악마들의 하찮고(?) 고어스러운 비주얼을 하나씩 비추며 지옥을 상세히 설명한다. 으스스한 오르간 소리도 이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한몫을 더한다. 종국에 작은 영혼은 자신이 떠나온 곳, 시체에게로 되돌아가지만 이미 그것의 살가죽은 부패하여 뼈만 남아있다.
평면적인 캔버스 위 클레이와 페인팅을 통해 ‘육탈하게 될 우리의 신체’와 ‘내세’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작은 영혼”. 영화를 보고 나면 동유럽 애니메이션 특유의 어둡고 기이한 분위기와 영화 내내 흐르는 중세 유럽 바로크 풍 멜로디가 머릿속에 맴돌 것.
5. 유령 (GHOST, 1984)
일본의 실험 영화감독 이토 타카시(Takashi Itoh). 그의 영화의 대표적 특징을 꼽자면 장노출과 타임랩스를 이용한 사진 기술, 스톱모션으로 애니메이션 효과를 만드는 것 등이 있다. 이런 특징으로 보아하니 아까 본 영화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이토 타카시는 “아트만”의 감독 마츠모토 토시오의 제자다. 그는 학부생 시절 “아트만”에 영향을 받아 단편 영화 “Noh”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이토 타카시의 “Ghost”는 으스스한 빈 건물의 풍경을 장노출된 사진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가 사라지고 무언갈 노려보는 눈알이 스톱모션화되어 화면 이리저리 뒤흔들리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자판기의 불빛, 소화전의 불빛, 건물을 지배하는 빨간 불빛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빛은 길게 노출되어 유령이 화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듯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 카메라의 흐름은 좌우로 안정적으로 흐르되 카메라 앞에 보이는 것들은 정신없이 번쩍거린다. 조명과 모델을 수없이 고쳐 잡았을 감독의 노고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
사진과 영상 매체를 오가며 그만의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이토 타카시 감독. 과거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는 마츠모토 토시오와 이토 타카시의 작품들을 묶어 기획전을 한 적도 있다. 콩 심은 데에 콩 난 제자 이토 타카시의 재기 넘치는 초반 작업물 “Ghost”를 아래에서 확인해 보자.
[1] 에디슨이 만든 영화 장치. 관람객 혼자서 장치 속의 영화를 들여다보는 형태.
[2] 영혼과 정신을 포함한 자기존재. 고유한 자아, ‘진아’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
[3] 일본 전통 가면극에서 유래한 귀녀
이미지출처 │MUBI, IMDb, Postwar Japan Moving Image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