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서울 곳곳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얼굴 그림. 어뜻보면 특정 누군가의 얼굴 같기도, 달리 보면 기분 나쁜 귀신의 형상 같기도 한 형태에 일부 시민들은 불쾌감을 표했으며, 심지어는 어느 방송사의 추적 프로그램에서는 그 실체를 쫓기도 했다.
그렇다, ‘MUGSHOT’ 시리즈의 7번째 주인공이 바로 그 섬뜩한 얼굴 그림의 주인, SSIVIVIV다. 비록 많은 이들이 그를 기괴한 얼굴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사실 그 너머에 보다 깊고 어쩌면 순수한 모습까지 숨기고 있는 그. 페인터, 프로듀서로 꾸준히 작업을 통해 본인을 꾸준히 가다듬어 온 그와 대화를 나눴다. 평소 그의 정체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어본 이라면 즐겁게 음미해 보자.
당신은 누구인가.
테크노 음악 프로듀서이자 페인터로 활동하고 있는 SSIVIVIV다.
활동명이 특이하다. 어떻게 읽으면 되나.
‘션’이라 부르면 된다. 주변에서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노이지헤드(noizzzhead)’라고 부르기도 한다. 읽기 힘든 글자라 사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무엇을 뜻하는 이름인가.
원래는 ‘ᛋᛋIVIVIV’라고 써야 더 정확하다. 북유럽 룬 문자 중 S를 뜻하는 ‘ᛋ’를 사용한 것인데 이게 번개, 에너지를 뜻한다. 또한 인간에 내재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나타내기 위해 ‘ᛋ’를 두 개 연달아 붙여 사용했다. 한 가지 의미를 더하자면 헤르메스의 지팡이에 있는 뱀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 역시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니까.
‘IVIVIV’ 같은 경우는 숫자 4를 로마 숫자로 표현한 것인데, ‘죽을 사(死)’를 뜻하는 건 아니고 한때 숫자 4가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오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이것저것 찾아보다 여호와의 이름을 로마자로 ‘YHWH·YHVH·JHWH·JHVH’로 표기한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여기에도 4가 반복적으로 들어가 사용하게 됐다. 복잡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나 자신이 그냥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그림 공부를 한 건지.
미국에서 2년간 학교를 다니다 현재는 휴학 중이다. 일러스트를 공부했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학교를 목적 없이 다닌 편이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봐야지’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
서울을 좀 돌아다녔다면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오싹한 얼굴 그림의 주인공이다. 뉴스에 나와 화제가 된 적 있고, 심지어는 한 추적 프로그램에서는 한 전문가가 말하길, “그림의 주인이 본인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추고 싶어 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작 장본인은 어떤 심정인가.
얼굴을 그리고 다닐 당시에는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유명해지고,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었다. 속된 말로 ‘어그로’를 끌었던 거다. 그때는 확실히 어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자신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더라. 그걸 인지하기 시작하니 조금 부담이 되긴 했다. 사실 경찰한테 몇 번 잡히기도 했고.
나중에는 얼굴 그림을 카피해서 자신이 주인인 양 그리고 다닌 사람도 있던 걸로 알고 있다.
나도 놀랐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비슷하더라. 가끔 공권력에 잡혔을 때, 내가 안 그렸는데 잡혔나 싶기도 하더라.
지금도 계속 얼굴 그림을 곳곳에 남기고 있나.
요즘에는 잘 그리지 않는 편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이 얼굴을 그린 사람의 정체는 뭐지? 이 사람 누군지 알았다’ 이 정도에서 끝나니까 허무하더라.
아까 말한 뉴스나 추적 프로그램의 댓글을 보면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더라. 그래서 심심할 때 일부러 그런 반응을 찾아보기도 했다. 한 여성 카페에서는 이상한 논리로 날 신랄하게 까더라. 그것도 재밌었지.
사람들의 반응을 처음 접한 게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주위에서 ‘이거 너 아니야?’하면서 보여줬는데 그림 게시물이 공유도 많이 되고 댓글도 꽤 달렸었다.. 반응이 다 제각각이라 보는 맛이 있었다. 욕하는 댓글들이 재밌긴 하지 않나.
얼굴 그림이 부조리 속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얼굴을 만들 때 어떤 특정 누군가나 어떤 캐릭터를 염두에 두었는지.
미국에서 한국으로 막 돌아오려 할 때쯤 그렸던 캐릭터가 있다. 전신의 형태를 갖춘 캐릭터였는데, 당시에는 마를린 맨슨(Marilyn Manson)에 빠져 있을 때여서 그 영향도 디자인에 묻어난 것 같다.
얼굴 그림 이외의 본인의 페인팅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해 달라. 물속에 잠기거나 불에 타는 것 같은 기괴한 생명체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은데, 어떤 종류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가.
얼굴 그림은 나를 나타내는 시그니처에 불과하다. 순전히 내 유희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메인 작업은 아니다. 내가 더 잘하고 싶고, 평생 하고 싶고, 더 깊게 연구하고 싶은 작업은 전시에서도 선보였던 페인팅 작업들이다.
초반에는 캔버스 위에 마커를 사용해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런데 한 2년 전부터 그 방식에 있어서 한계가 느껴지더라. 그래서 다시 유화나 아크릴을 이용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더 풍부한 표현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재료를 바꾸면서 더욱 나다운 색이 나오게 된 것 같다. 그동안은 내게 영향을 줬던 아티스트의 색이 강하게 묻어났다면 이제는 그걸 좀 걷어내고 내가 추구하는 작업물이 드러나는 거지.
특별히 표현하고 싶은 바가 있는 걸까?
일상.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본능적인 일상. 일상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별 의미가 없지 않나.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둔 거라 할 수 있다. 형상만 조금 기괴해 보일 뿐이지,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했을 뿐이다.
그림 속 기괴한 형상은 어디서 영감을 얻은 것인지.
최근 작업 위주로 말하자면 어릴 적 기억이 많은 영향을 준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해상도 낮고 불투명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 그 관점에서 바라본 강렬한 이미지들을 표현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는 기계 그리고 성적인 에너지가 그렇다. 둘의 조화가 생뚱맞기도 하지만 그만큼 흐릿한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해 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일리 있는 것 같다.
그림이 꽤 크다. 완성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요즘엔 손이 빨라져서 2, 3개월 정도 걸리는 편인데, 최근 작업은 조금 더 힘을 주고 있어 그것보다는 오래 걸리는 것 같다.
페인팅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정말 뻔한 얘기지만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일단 외국 갤러리에 내 그림을 걸고 싶다. 무엇보다 나라는 장르를 사람들한테 내보이고 싶다.
한편 음악 활동도 하고 있다. 음악을 할 때의 SSIVIVIV은 어떤 인물인가.
딱히 장르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 지나가다 듣던 음악들을 가지고 내키는대 로 만들고 있다. 2년 전에 냈던 첫 번째 EP는 록, 펑크, 인더스트리얼, 고스적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댄스 음악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내 취향이 대중적이고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쪽으로 바뀌었다. 내 원래 색을 유지하며 타협을 하려다 보니 그것에 딱 맞는 장르가 테크노여서 현재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있다.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게 하는 동기, 원동력이 무엇인가.
앨범을 만들 당시의 심리 상태를 반영해 이야기를 만든다. 첫 EP 같은 경우에는 내가 꽤 어려운 시기에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어두운 부분이 묻어난다.
앞으로 나올 음악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앨범의 테마라든지.
요즘에는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내려놓은 상태다.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일단 만들어 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테마라 하면, 그림에서도 표현하고 있는 어릴 적 느낀 기묘한 느낌들? 아주 어릴 때 전자상가나 게임을 하다가 테크노를 접하게 됐는데 거기서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8월에 나올 앨범에서는 그런 느낌을 사운드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림과 음악이 기묘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받았다. 음악과 그림을 꿰뚫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나.
통합을 하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떤 목적이 있다기보다 단순히 내 만족감이 먼저다. 음악과 그림을 꾸준히 하다 보니 깊어지고, 입맛도 까다로워지고, 눈높이도 달라지더라. 작업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 주위 사람들이 내 음악과 그림이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해 줬는데 오히려 나는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 와서야 조금씩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요즘 가장 빠져 있는 게 있다면?
딱히 없는 것 같다. 원래는 복싱에 빠져 있었다. 7년 정도 하기도 했고 행정상으로도 프로 복서다. 근데 스파링도 지겹게 했고 뭔가 시간도 너무 많이 낭비한 것 같고 최근에는 머리도 조금 안 좋아진 것 같아서 요즘엔 흥이 좀 떨어졌지. 그냥 소소한 일상을 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쉴 때는 뭘 하며 지내는 편인가.
쉬는 시간과 작업하는 시간이 구분이 돼 있지는 않다. 작업하거나 친구를 보거나 멍 때리면서 쉬거나.
SSIVIVIV의 믿음, SSIVIVIV이 믿고 사는 한 가지가 있다면?
희망이란 걸 놓으면 안 되는 것 같다. 어릴 때도 그렇고 살면서 안 좋은 상황이 많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이 있을지언정, 만화에서 봤던 것처럼 권선징악 혹은 결국에는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이를 먹고 현실에 부딪히면서 이런 의미가 퇴색돼가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나아질 거야, 영원한 건 없으니까. 나쁜 것도 영원하지 않아, 이 또한 지나가는 거야” 이런 마인드가 필요하지 싶다.
앞으로 뭔가 해보고 싶으신 일 혹은 계획하고 있는 재밌는 일이 있는지.
일단 8월에 앨범이 나온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정말 그림 전시를 하고 싶다. 좀 웃기기는 하지만 일도 찾고 싶고. 음악도 전시도 잘 됐으면 좋겠다.
Editor | 장재혁
Photograpy | 김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