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DELIGHT – 올여름 가장 많이 입은 티셔츠

EDITOR’S DELIGHT : 매 회 다른 즐거움, 관심에 관한 범주를 설정하고, 비즐라 매거진 에디터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등줄기에 시큰한 땀방울이 맺히는 여름날에는 아웃핏에 대한 고민이 한층 짙어진다. 다양한 외투와 레이어드를 활용한 변화구보다 티셔츠 한 장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가장 정직한 계절이기 때문. 더불어 세탁과 함께 늘고 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숙명은 또 하나의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과연 어떤 티셔츠가 올여름 VISLA 매거진 에디터들의 구원투수로 활약했을지, 함께 즐겨보자.


한예림 – DJay OSAMU by Molar

바야흐로 2년 전, 몰라(Molar) 스토어의 ‘즐겁다 티셔츠’를 발견하고 샵의 사이트를 탐방했던 적이 있다. 코믹한 텍스트들이 적힌 티셔츠를 보며 낄낄거리며 스크롤을 내리다가 한눈에 반해버린 티셔츠가 있었으니, 바로 다자이 오사무가 디제잉을 하는 모습이 프린팅 된 ‘디제이 오사무 티셔츠’였다. 처연한 눈빛으로 삶에 대해 사색하고 있는 듯한 다자이 오사무의 모습을 신중하게 믹싱하고 있는 디제이의 모습으로 뒤바꾼 센스에 크게 감동하여 즉시 구매 버튼을 눌렀다.

평상시 티셔츠를 잘 입지 않는 탓에 옷장에 편하게 입을 만한 것이 없어 곤혹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와중, 이 디제이 오사무 티셔츠를 구매한 이후에는 편안함과 사람들의 관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그저 폭소하는 사람과 어디서 구매했는지 구매처를 물어보는 사람들의 관심에 더 신이 나서 즐겨 입었던 디제이 오사무 티셔츠. 

지난 이 년간 수십 번 입어 어느덧 프린팅이 너덜 해지고 목 부분이 살짝 늘어났다. 모든 옷의 결말은 쓰레기통 행, 중고거래 행, 잠옷 행일 것이다. 특히 본인 몸에 맞는 편한 옷들은 잠옷 행이 될 확률이 높다. 디제이 오사무 티셔츠의 결말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나의 소중한 잠옷이 되었다. 밖에 입고 돌아다니는 티셔츠로써의 생명이 다 했을지언정 나의 잠자리까지 책임져주고 있는 디제이 오사무 티셔츠는 여전히 필자가 제일 많이 입는 티셔츠다.


오욱석 – 4WORTHDOING The Ceramic Flag T-Shirt

올여름 가장 자주 입은 티셔츠에 대한 고민. 보통은 매일 티셔츠를 한 장씩 갈아입기에 무엇 하나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렵다. 옷장에 티셔츠만 몇십 장이 있는 것 같은데, 매년 여름 10장 정도의 티셔츠를 구비해 외출 전 손에 집히는 대로 입는다. 기어코 하나를 꼽아 본다면, 4WD(4WORTHDOING)의 검정 티셔츠가 아닐까. 작년 여름쯤 구매했는데, 올해까지 잘 입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입고 있다.

세일 기간 중 정가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구매해 뽕을 뺄 대로 뺀 것 같다. 하고 많은 티셔츠 중 왜 이것을 자주 입었을까. 사실, 처음부터 이 티셔츠를 즐겨 입었던 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난 여름에 입을 티셔츠를 선정한 뒤 나름 아껴 입는데, 예컨대 세탁한 옷을 건조기에 넣고 돌리지 않고, 굳이 발코니에서 말린다. 꼴값이다. 티셔츠마다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건조기에 넣고 건조한 티셔츠가 심하게 수축해 기장이 배꼽 겨우 아래까지 당도하는 걸 경험한 이후로는 매번 이 귀찮은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나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지켜왔다고 생각했으나 어느 날엔가 깜빡하고 요 티셔츠를 건조기에 돌려버렸다. 자책해도 늦은 일, 이제는 꼼짝없이 또 하나의 티셔츠가 잠옷으로 전락하겠구나 아쉬워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입어보니 조금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던 기장이 내 키에 꼭 맞게 줄었더라. 주로 품이 넉넉한 티셔츠를 선호해 그에 비례하는 기장이 다소 부담스러웠는데, 이 티셔츠는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딱 좋았다. 이후 길이가 길어 손대지 않았던 티셔츠 몇 장을 실험 삼아 건조기에 돌렸는데, 대부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오직 이 티셔츠만이 살아남았다. 여전히 미스터리다.


장재혁 – IRISH and PROUD

올여름은 단연코 이 녀석과 함께였다. 이끼로 뒤덮인 버려진 성 사진부터 그 주위를 둘러싼 세잎클로버와 귀여운 털북숭이 캐릭터 그래픽 그리고 그 주위를 감싼 은색 글리터까지, 요즘 티셔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진과 그래픽의 조화는 물론,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초록색으로 싱그러움을 더한 ‘IRISH and PROUD’ 티셔츠.

지난 5월 종로구 빈티지숍 코젤 앤 앤츠(Kozel n Ants)에서 구매한 이 아이는 땀의 흔적으로 착각할 만한 누리끼리한 컬러와 목과 소매에 들어간 남색 시보리 그리고 가슴팍의 녹색 그래픽의 조화가 아주 맛깔나는 친구다. 청바지에도, 군복바지에도, 심지어는 반바지, 삐삐 롱스타킹 양말의 조합과도 이질감 없이 녹아드는 매력을 지녔기에 사무실에서도, 바닷가에서도 그 존재감을 여실히 뽐내는 게 참 바람직하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올여름 이 티셔츠를 유독 많이 입게 된 데에는 이 친구가 지닌 통기성에 있다. 사실 면이 삭은 것인지, 원래 이렇게 얇은 녀석인지 분간이 어렵다. 뭐, 아무렴 어떠랴 시원하면 됐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언제 구멍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곧 이 친구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또한 여름 반팔 티셔츠의 숙명 아니겠나.

반팔 티셔츠는 숱한 세탁기와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렇기에 제 아무리 탄탄한 녀석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한 시즌, 길게는 두 시즌 입고 나면 처량한 자태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디자이너 브랜드의 반팔 티셔츠를 구입한 경험도 몇 있으나, 목이 늘어날까 두려워 매번 세탁소에 가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빨지 않고 버티다 결국 누렁이 티셔츠가 되는 꼴을 목격하는 것만큼 허탈할 때가 없다. 그렇기에 ‘IRISH and PROUD’ 티셔츠는 더욱 착하다.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한 빈티지 티셔츠이거니와, 이미 약간의 얼룩이 묻어 있는 채로 구입했기에 더욱 못되게 입을 수 있다. 언젠가 보내줄 날이 온다 해도 가슴팍의 그래픽 만은 살려둘 생각이다. 가위로 대충 오려내어 무지 티셔츠에 덧댄 뒤 보라색 실로 꿰매도 꽤 멋진 티셔츠가 새로 탄생할 것만 같다.

문득 이 티셔츠를 입고 이태원의 할머니 술집을 갔을 때 미셸이라는 외국인이 아이리쉬라는 포인트에 웃음을 짓던 기억이 떠오른다.


황선웅 – 돌풍 86

여름옷은 골고루 돌려입는 편이라 특별히 자주 입은 티셔츠는 없으나, 유독 애정하는 녀석은 있다. 바로 ‘돌풍 86′ 티셔츠. 2019년 여름에 웝트에서 진행한 ’86 BABIES’ 행사에서 직접 구매한 당일부터 최근까지 착용했으니 어언 나와는 4년째 함께하는 중이다. 구매할 당시에는 논채리의 그림이 멋지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이 녀석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2020년 여름이다. 고향에 이 티셔츠를 착용하고 친구를 만났을 때인데, 그때 ‘어디서 태권도장 티셔츠를 구해 입고 왔냐?’라고 묻는 친구의 한마디로부터 큰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한글 그래픽이 친숙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돌풍 86’이라는 문구의 티셔츠는 도장, 혹은 체육관의 단체 티셔츠로 보일 수도 있겠더라. 이젠 태권도장 단체 티셔츠를 외출복으로 착용하는 괴짜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싶을 때 염두하는 티셔츠. 구매 후 4년 동안 외출복으로, 비여름기엔 잠옷으로 활용하며 백설기같이 하햫던 흰옷은 어느덧 시멘트처럼 칙칙하게 색이 바랬지만, 아마 내년에도 함께할 것 같다.


박진우 – Football Cafe

“올여름 가장 자주 입은 티셔츠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두 개가 떠올랐다. 불행하게도 그중 한 개는 무지 티셔츠라 딱히 할 말이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머지 한 개의 티셔츠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자주 입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집에 있을 때만 입는 티셔츠기 때문이다.

면 반팔티의 세계는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세부적인 것을 따지고 들어가면 너무나 복잡하다(안 그런 것이 어딨겠냐만). 면의 두께감이나 티셔츠의 모양에 따라 (그래픽은 둘째 치고) 손이 가느냐 안 가느냐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심지어 나처럼 살집이 좀 있는 타입이라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사이즈나 핏이 자신의 몸과 안 맞을 가능성이 높고, 입었을 때 살이 많아 여백이 좁아져 쉽게 불편하고, 얇은 티셔츠의 경우 상대적으로 편하지만 젖꼭지 이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쿨한 사람이라면 “왓에버”하면서 넘길 수 있겠지만 난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 마냥 편하기만 한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각자가 선호하는 핏에 대한 중요도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엔, 호불호 판단이 순간적으로 결정 나는 편이다. 그 상황은 매우 급한 출근 시에 발생한다. 일찍 일어나 미리 준비하는 편이 아니어서 시간이 매우 촉박한데, 옷을 찾으려고 행거를 체크할 때 불편한 티셔츠에는 (본능적으로) 손이 가지 않는다. 수십 장의 티셔츠가 있지만 그중 선택되는 것은 10퍼센트에 채 못 미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소인배 같이 디테일한 생각들을 둘째칠 수 있는 상황은 집에 혼자 있을 때의 생활복, 잠옷 용도의 티셔츠이다(누군가는 집에 있을 때조차도 예쁘고 멋지게 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기준에 가장 적합한 티셔츠는 2011년도에 해외사이트에서 구매한 ‘nowhere fc’의 카페(cafe)인 ‘football cafe’의 굿즈 티셔츠다(현재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이 티셔츠를 처음 배송받았을 때 실망이 컸다. 매우 얇고 흐느적거리는 재질의, 목도 이미 늘어나있는 듯한 티셔츠였기 때문이다. 젖꼭지 이슈 뿐 아니라 없어뵘까지 발생하는 티셔츠. 디자이너가 이탈리아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마르고 키가 큰 백인들이 입었을 때나 스무스하게 어울리는 그런 느낌. 그리하여 이 티셔츠는 거의 10년간 옷장에서 방치되다가 어느 날 집에서 한번 입었는데 너무 편했다. 사실 노란색 말고 하늘색도 있는데 그 2개를 번갈아가면서 홈 티셔츠로 착용 중이다. 집에서 다 벗고 있지 않는다면, 집에서 단추 달린 잠옷을 입고 있는 타입이 아니라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가장 많이 입는 티셔츠는 아마 집에서 입는 티셔츠가 아닐까… 아마 다른 에디터들은 멋진 티셔츠를 자랑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을까?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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