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뭐니 뭐니 해도 운동이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모두의 염원이지 않나. 개중에도 복싱은 꽤 괜찮은 선택이다. 샌드백을 두들기는데 온정신을 쏟다 보면 헐떡이는 숨과는 반대로, 잡념이 말끔히 사라진 명료한 정신을 갖게 되니 말이다.
복싱은 심신의 수련을 차치하더라도 그 매력적 의상과 아이템으로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패션 컬렉션을 통해 그 매력을 전해왔다. 하이엔드 패션 하우스에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색으로 다채롭게 환생한 복서 쇼츠를 주축으로 최근 존 로렌스 설리반(JOHN LAWRENCE SULLIVAN)과 에버라스트(EVERLAST)가 합심해 완성한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포함한 협업 컬렉션과 여성의 분노를 복싱으로 승화한 sample.cm의 신개념 복싱기어는 다채로운 복싱 장비를 패션 아이템으로 탈바꿈했다.
허나 복싱을 주제로 한 역대 패션 컬렉션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시즌이 있으니 바로 베를린 기반의 패션 레이블 블레스(BLESS)의 마흔 번째 컬렉션 ‘N°40 Whatwasitagain’이 그렇다. 10 AW 시즌 공개된 해당 컬렉션은 그간 전시 형태를 차용, 기발한 패션쇼를 선보여온 블레스의 정체성을 복싱에 이식해 유쾌한 분위기 속에 풀어냈다.
복싱을 테마로 한 컬렉션이라면 한껏 무게를 잡은 워킹 혹은 실제 복싱을 하는 듯한 모션의 쇼가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블레스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일명 ‘워크아웃컴퓨터(workoutcomputer)’를 쇼에 이용했다. 워크아웃컴퓨터란 단어 그대로 고루한 사무실 업무에 시달리는 이들의 건강한 육체 활동을 독려하기 위한 도구로, 키보드 입력을 샌드백을 치는 행위로 대체한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스탠딩 샌드백이 모니터를 둘러싸고 있으며, 각 샌드백에는 서로 다른 알파벳과 숫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타격했을 때 해당 문자가 모니터에 표시되게 되는 원리. 워크아웃컴퓨터는 블레스를 이끄는 두 디자이너 이네스 카(Ines Kaag)와 데지레 하이스(Desiree Heiss)가 ‘2014 이스탄불 디자인 비엔날레’를 통해 선보이며 그 존재를 세상에 다시금 알렸다. 데지레 하이스는 워크아웃컴퓨터에 관해 “개인적으로 근무가 끝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쳤으면 좋겠다. 워크아웃컴퓨터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과 운동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설명을 남기기도 했다.
‘N°40 Whatwasitagain’는 어쩌면 두 디자이너의 창의적 도약을 위한 시험 무대였을지 모르겠다. 이스탄불 비엔날레에 훨씬 앞서 펼쳐진 컬렉션의 워크아웃컴퓨터는 보다 다채로운 패턴, 컬러로 무장한 모습인데, 모델들의 톡톡 튀는 움직임과 전위적인 의상 못지않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패션을 넘어 창의적 경험을 선사하는 블레스의 쇼에서 감초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N°40 Whatwasitagain’에 등장한 의상을 자세히 뜯어보면 안감에서 레인 케이프를 빼낼 수 있는 케이프 재킷을 시작으로, 칼라를 드레이프 스카프로 탈바꿈한 재킷, 어깨 패드를 포함한 숄, 에람하이믹스(Eramhighmix) 슈즈 등 전반적으로 니트 소재를 중심으로 한 포근한 겨울 의상이 컬렉션을 채웠다. 복싱을 주제로 한만큼 겉감을 니트로 감싼 가죽 글러브 ‘Boxknit’역시 눈길을 끈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해당 컬렉션의 주인공이라면 한 쌍의 글러브 속 숨겨진 트렌치코트 ‘Twotrenchbox’. 컬렉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 글러브의 손목 부분에 숨겨진 안감을 꺼내면 등장하는 트렌치코트의 실루엣은 마치 챔피언이 링 위에 오르기 전 착용하는 가운을 연상케 한다.
‘N°40 Whatwasitagain’을 담아낸 영상의 진짜 매력이라 함은 전문 복서가 아닌 일반 모델들의 엉성한 복싱 자세라 할 수 있다. 사무실에서의 피로 회복을 목적으로 한 워크아웃컴퓨터를 활용했기에 그들의 모습이 되려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다가온다. 영상 속 모델들은 프랑스어로 ‘너’를 뜻하는 ‘Tu’를 시작으로, 목욕가운(Peignoir), 알팔파(La luzerne), 사랑에 빠지다(Amoureuse)를 샌드백을 타격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완성해 간다. 이탈리어어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폭풍(Tempesta), 고통의(Di dolore), 사창가(Bordello) 등 다소 무작위적이면서도 발칙한 단어를 조합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한 사람이 펀치를 이어갈 때마다 뒤의 동료들이 입을 모아 알파벳을 외치는 모습 또한 인상적인데, 해당 모습이 평화로운 하와이풍의 음악 혹은 사이키델릭한 전자음악과 교차되며 복싱 특유의 힘찬 에너지를 배가했다.
1995년 ‘블레스’라는 비정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패션을 넘어 하나의 예술적 행보를 이어온 블레스. 찌뿌둥한 어깨와 편평해진 뇌에 새로운 자극을 얻고 싶다면 ‘N°40 Whatwasitagain’와 함께 새로운 활력을 찾아봐도 좋을 것.
이미지 출처 | BLESS, IS MENTAL, Studio Manuel Rai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