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류이치(Ryuichi Sakamoto)를 한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그의 행보가 너무나 다양하고 정체성 또한 다층적이다. 하지만 굳이 키워드를 고르자면 ‘변화’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에 매료된 사카모토의 음악 세계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때 드뷔시(Claude Debussy)와 라벨(Joseph Maurice Ravel)을 접하며 확장된다. 고전 음악뿐만 아니라 비틀즈(The Beatles),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등의 다양한 현대 음악 역시 사카모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고등학교 시절 접한 존 케이지(John Cage)의 음악은 후에 그가 고전적인 음악의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에 입학한 후에는 민속음악과 전자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1978년 결성된 YMO(Yellow Monkey Orchestra)의 활동으로도 이어진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YMO, 솔로 앨범, 다양한 영화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이어오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경력 후반부에는 소리 자체에 대한 탐구심이 강해져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된다. 눈 녹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북극으로 가거나, 쓰나미로 인해 고장난 피아노를 연주하는 식으로 말이다.
특정 스타일과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문화적 코드가 만들어내는 장벽을 해체하는 그의 실험적 태도는 솔로 앨범뿐만 아니라 영화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적용된다. 2018년 개봉한 영화 “Coda”에서는 “영화 음악을 만드는 건 다른 관점으로 일하는 것이다. 음악 자체로 보면 자유가 없지만 그런 불편함이 좋은 자극이 되고 전에 없던 새로운 가능성 발견하게 된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급을 고려했을 때 그의 유작이 영화 “괴물”의 OST라는 점은 굉장히 흥미롭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유작인 “괴물”의 OST는 투병 생활 중에 참여했기 때문에 총 7곡 중 2곡만 새로 작곡하고, 나머지 5곡은 자신의 과거 발매한 솔로 앨범에서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앨범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적 구성이 매우 흥미롭다. 과거의 조각들을 선택해 현재의 시공간에서 엮어내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는 이 앨범의 구성 방식은 마치 사카모토 류이치의 일대기를 담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1999년부터 2023년까지, “괴물” OST에 수록된 곡들과 그것을 담은 앨범을 발매된 시간순으로 소개하겠다.
1. “Aqua” – [BTTB]
세기말에 발매된 이 앨범은 ‘Back to the Basic’, 즉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BTTB]는 오직 피아노로만 이루어져 있고, 피아노의 가능성을 최대한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이 앨범을 만들기 위해 사카모토 류이치는 현 사이에 사물을 끼우면 소리가 변하는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를 준비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존 케이지가 고안한 장치로, 볼트와 고무지우개 등 다양한 사물을 이용해 소리를 변화시킨다. 사물의 크기와 물성에 따라 소리가 변화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언급한 사카모토는 결국에는 피아노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악기라고 말하며 피아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BTTB]의 수록 곡 중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Aqua”는 사카모토가 자신의 딸 미우를 위해작곡한 앨범의 커버 곡이다. 매우 부드럽고 단순한 화음이 두드러지는 이 곡은 마치 영화 전체를 따듯하게 감싸는 듯한 인상을 준다.
2. “Hibari”/“Hwit” – [Out of Noise]
앨범 [Out of Noise]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연을 융합한 실험적인 앨범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사용된 서양 고전 현악기인 비올(Viol)과 일본의 전통 악기인 쇼(Shō)를 사용하여 과거의 소리를 실험하고, 아이슬란드에서 녹음한 빙하가 녹는 소리를 사용하기도 해, 마치 음악과 노이즈 사이를 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앨범 수록곡 중 “괴물”에 사용된 곡은 첫 번째 트랙 “Hibari”와 두 번째 트랙 “Hwit”이다. 전체 앨범을 여는 곡인 “Hibari”는 즉흥적으로 연주한 피아노 소리를 반복시키며 미묘한 불협화음을 드러낸다. 그에 이어서 등장하는 “Hwit”은 앞서 언급한 비올을 사용하고 있으며, 악기 특성상 음색이 두드러지거나 튀지 않고 부드럽고 섬세하다.
3. “20220207”/“20220302” – [12]
[12]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71세 생일인 2023년 1월 17일에 발매된 아티스트의 생전 마지막 정규 앨범으로 이우환 작가가 제작한 드로잉을 앨범 아트로 쓰고 있다. 투병 생활 중에 일기를 쓰듯 작곡한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곡의 제목은 곡을 제작한 날짜로 정해졌다. 2021년 3월 10일에 시작되어 2022년 3월 4일에 끝나는 1년짜리 구성으로 된 이 앨범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한다. 괴물에 삽입된 “20220207”은 괴물의 시작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곡은 연주자, 즉 사카모토 류이치의 숨소리가 온전히 담겨 있어서 그의 존재와 음악적 수행성을 느낄 수 있다. “20220302”는 “괴물”의 가장 따듯한 장면 중 하나에 삽입된 곡으로, 반복과 침묵의 교차로 미묘한 불안감과 무언의 교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4. “괴물”을 위해 작곡한 “Monster 1”, “Monster 2”
“괴물”을 위해 작곡한 두 곡에 대해서 사카모토 류이치는 “괴물이라고 불릴 때면 누가 진짜 괴물인지 두리번거리지만, 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잡하기도 하고, 이 영화는 이 가시 돋친 질문을 돌파하려고 합니다. 이 복잡한 주제에 직면해서, 이 영화에는 어떤 음악이 제공되어야 할까요. 아이들의 진실 어린 감정이 저를 구원했고, 제 손가락을 피아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라고 전한다. 즉, 이 두 곡은 영화 “괴물”에 대한 사카모토 류이치만의 해석으로 읽힐 수도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영화 “코다”를 통해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좀 더 남기고 싶다”라고 밝힌 바가 있다. 현대 음악가의 새로운 활동 반경 제시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울리는 소리를 찾던 사람. 그의 마지막 작업을 감상하고 그것에 글을 남길 수 있는 것 또한 큰 행운이다.
Tracklist
1. 20220207
2. Monster 1
3. Hwit
4. Monster 2
5. 20220302
6. Hibari
7. Aqua
이미지 출처 | Discogs, Apple Music, The New York Times, sabukaru, IMDb, Pitchfork, The Vinyl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