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INSIDE : VISLA FM 오리지널 프로그램 ‘DEEP INSIDE’는 음악가, 레이블 또는 특정 장르나 경향의 음악을 심도깊게 다루는 플레이리스트 시리즈다.
민족의 대명절 설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 차마 거절하기 힘들지만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세뱃돈부터 풍성한 명절 음식까지. 뭐니 뭐니 해도 필자와 같은 자취생에겐 명절이 끝나고 남은 나물을 자취방에 가져와 비빔밥을 해 먹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다. 각 나물의 풍미를 살리면서도 한데 어우러지는 맛을 떠올리니, 생각나는 아티스트가 있었다. 바로 여러 장르를 맛있게 버무리는 전설의 영국 전자음악 프로듀서이자 베이시스트 스퀘어푸셔(squarepusher). 설 연휴가 끝나고 머지않아 공개될 앨범 [Dostrotime]의 발매를 맞아, 그의 발자취를 ‘VISLA FM DEEP INSIDE’ 시리즈를 통해 지금 당장 파헤쳐보자.
스퀘어푸셔(이하 톰)는 워프 레코즈(Warp Records) 전성기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전자음악 프로듀서로 애시드 테크노(acid techno), 드럼 앤 베이스(drum and bass), 드릴 앤 베이스(drill and bass), 프로그레시브 재즈(progressive jazz)를 주력으로 한 90년대 IDM 대표 아티스트로서 늘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톰은 1975년 영국의 첼름스퍼드에서 태어났다. 성당에 소속된 사립학교를 재학하며 오르간을 배우거나, 12살 때부터 드럼과 통기타를 독학했다. 또한 테이프 레코더, 스테레오, 스피커를 구매해 라디오에서 나오는 킹 크림슨(King Crimson)과 같은 밴드의 프로그레시브 록을 녹음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음악 세계에 발을 담가왔던 것(재즈 드러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악과 악기를 접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후에 참여한 인터뷰를 통해 허구로 밝혀졌다).
그러던 중 그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재즈 퓨전 기타리스트 거스리 고반(Guthrie Govan)을 만나, 미국의 스래시 메탈 밴드 메탈리카(Metallica)의 스타일을 차용한 밴드를 거스리와 결성하여 베이스 세션을 맡는다. 베이스를 선택한 이유는 음악의 리듬과 화성 요소를 연결하는 기본 악기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밝혔으며, 이는 추후 그의 음악 안에서 전자 음악의 요소와 베이스의 감각적인 프레이징을 보여주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후에 톰은 이스트 앵글래아와 런던의 지역 밴드에서 세션맨으로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던 찰나, 영국의 독립 레코드 레이블 스파이 마니아(Spymania)의 파운더 하디 핀(Hardy Finn)을 만나며 급작스러운 변화의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핀으로부터 하우스, 애시드, 하드코어 등의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일렉트로닉 음악을 해볼 것을 권유받고, 93년부터 애시드 테크노와 브레이크비트를 주력으로 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그의 본명 톰 젠킨슨으로 곡 “O’Brien”을 발매하거나 더 듀크 오브 해링게이(The Duke of Harringay)라는 다른 예명으로 스파이마니아를 통해 EP 앨범을 냈다. 이를 통해 런던 북부의 조지 로비(George Robey)라는 클럽에서 플레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후 영국의 해적라디오(Pirate Radio) Kiss FM을 통해 소개되며,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으로 알려진 리차드 디 제임스(Richard D. James)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 두 재야의 고수들은 서로의 실력을 금새 확인했고, 톰은 에이펙스 트윈이 설립한 레이블 레플렉스(Rephlex)에서 앨범을 내기로 동의했다. 처절한 무명 생활 끝에 한 줄기의 빛이 도래한 것이다.
톰은 런던의 첼시 예술 디자인 대학에 재학 중에 학자금 대출을 ‘영끌’하여 구입한 중고 Akai S950 샘플러, 두 대의 드럼 머신, 믹서 및 DAT 레코더로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장비들로 만든 40개의 트랙을 에이펙스 트윈에게 보냈으나, 톰의 모험심과 독창성으로 보완되는 것 이상으로 앨범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2곡의 앨범으로 편집한다. 이때 처음으로 스퀘어푸셔라는 이름으로 1996년에 첫 정규앨범 [Feed Me Weird Things]를 발매한다. 민첩하면서도 재치 있는 재즈풍의 프렛리스 베이스 변주와 강렬한 브레이크비트의 융합은 독창적인 사운드를 제공한다. 특히 해당 앨범의 트랙 “Theme From Ernest Borgine”은 당시 루크 바이버트(Luke Vibert)가 처음 선보인 매우 불규칙적이면서 거친 질감의 드럼 라인이 돋보이는 드릴 앤 베이스(Drill n Bass) 장르의 용어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추후 브레이크 코어(Break Core)로까지 발전시킨 기념비적인 곡이다. 각설하고 돌아와, 에이펙스 트윈은 앨범을 편집할 때 라이너 노트에 톰을 이와 같이 묘사했다.
“리처드 로저스와 줄리 앤드류스는 우리에게 사운드 오브 뮤직을 주었고, 존 케이지와 사이먼은 우리에게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제공했으며, 이제 스퀘어푸셔는 우리에게 사운드 오브 사운드를 선사할 것이다.”
Richard D. James
[Feed Me Weird Things]라는 걸작을 발매하며 신(scene)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퀘어푸셔는 리스너들의 열띤 호평에 부응하듯 곧바로 EP 앨범 [Port Rhombus]을 발매했는데, 이는 전자음악 명가 워프 레코즈(Warp Records)에서 스퀘어푸셔의 첫 번째 작업이다. 학자금 대출을 ‘영끌’하면서까지 장비를 구입했던, 궁핍했던 작업 환경을 뒤로 하고 한층 더 풍부하고 탄탄해진 작업물을 선보였다. 타이틀 트랙 “Port Rhombus”에서 일렉트릭 피아노의 재지한 연출과 난립하는 하이햇부터 라이브 베이스 연주 샘플링이 돋보이는 “Problem Child”까지. RPG 게임 무과금 만렙 유저에게 캐시템이 주어지면 얼마나 무서운 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Port Rhombus]는 단순히 예고에 불과했다. 가장 스퀘어푸셔다운 앨범이자 IDM 앨범의 클래식으로 여전히 평가받는, [Hard Normal Daddy]를 이듬해 발표한 것. [Hard Normal Daddy]는 비디오 게임 사운드트랙을 연상케 하는 IDM 앨범으로, 이전까지 타 아티스트들이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재즈 선율과 컴퓨터 비트의 조화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음악 오프닝 트랙 “Coopers World”는 전체적으로 빠른 비트와 경쾌한 키보드 그루브, 펑키한 기타 라인으로 구성됐다. 다음 트랙인 “Beep Street”는 청자로 하여금 마치 우주 공간에서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앨범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비트와 난립하는 드럼 및 베이스가 어우러져 경쾌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드릴 앤 베이스, 프로그레시브 재즈, IDM 등의 정수를 뽑아 압축한 것이 특징으로, 스퀘어푸셔 특유의 장르 간 미묘하고 완벽한 밸런스를 맞추는 스타일이 가장 돋보이는 마스터 피스인 것. 비평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웹진, 피치포크(Pitchfork)에서 [Hard Normal Daddy]를 역대 최고의 IDM 앨범 50개 중 24위에 등재할 정도.
이처럼 장르 간의 믹스 앤 매치를 주 무기로 청각적 카타르시스를 청자들에게 경험하게 했던 스퀘어푸셔. 그의 다채로운 커리어는 전자음악을 통해 예술적인 표현의 폭을 확장시키는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증명해 왔다. 음악적 역량을 초기 앨범에 대부분 ‘몰빵’한 퇴물이 되었다는 평도 더러 있지만, 그가 90년대에 보여준 종횡무진한 행보를 부정하긴 어려울 터. 스퀘어푸셔의 독보적인 창의성과 정수가 담긴 VISLA FM DEEP INSIDE : SQUAREPUSHER의 플레이리스트를 청취하며, 머지않아 힘찬 복귀를 알릴 그의 앨범 [Dostrotime]을 기다려보자.
에디터 │ 차의강
이미지 출처 | WARP Records, e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