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가 멀다 하고 쉴새 없이 몰아치는 신제품 드롭. 어느새 지겹다 못해 피곤해진 스니커 신(Scene)이지만, 근 몇 년간 조금 낯선 외형의 일본발 슈즈가 스니커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국내에서도 몇몇 발 빠른 멋쟁이들이 일찌감치 이를 뽐내더니, 최근 뉴진스(NewJeans)의 뮤직비디오를 필두로 좀 더 본격적으로 그 모습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그 이름하여 그라운즈(Grounds). 크다 못해 괴랄할 만큼 부푼 밑창이 정녕 이게 신발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지만, 디테일을 하나둘 뜯어보다 보면 어느새 그 밑창처럼 통통 튀는 매력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그라운즈는 독보적 감각으로 현 일본 패션 신을 휘어잡고 있는 디자이너 미키오 사카베(Mikio Sakabe)가 일본의 인터넷 쇼핑몰 DMM과 함께 시작한 ‘기디 업(GIDDY UP)’에 뿌리를 둔다. 신발 전문 브랜드 기디 업은 3D 프린터를 사용한 풋웨어 컬렉션으로 2019년 파리 패션위크에 출사표를 던졌다. 테크놀로지를 패션에 적용한다는 일념 하에 미래적이고 실험적인 실루엣을 선보이고자 했던 미키오는 “이랴”라는 뜻의 브랜드 이름답게, 인간 본연의 걸음걸이를 가속화할 것 같은 신발 라인을 연이어 선보였다. 스프링을 매단 듯한 플라스틱 쿠션의 피스를 제외하면, 여러 룩에 등장한 투명한 에어 밑창의 피스가 지금의 그라운드를 떠올리게 한다. 미키오 역시 해당 실루엣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탓일까. 미키오는 2019년 8월, 기디 업을 ‘그라운즈’라는 이름의 새로운 풋웨어 브랜드로 탈바꿈한다. 당시 브랜드가 지니고 있던 콘셉트인 “LEAP GRAVITY”, 그러니까 중력을 거스르고 도약한다는 메시지를 보다 쉽게 전달하고자 한 것인데, 그라운즈의 에어가 대지와 우주 사이에 자리 잡은 구름을 닮은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일 테다.
브랜드를 전개함에 있어 ‘새로운 인간상’, 즉 ‘떠다니는 인간’을 재현하고자 미키오는 이를 위해 슈즈의 아웃솔을 무지막지하게 팽창시키는 대신, 투명하고도 가벼운 소재를 택해 무거운 이미지를 지웠다. “신발이 독특하다면 사람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본다. 기능성만 강조한 운동화는 지루하지 않나. 신발은 의복과 다르게 건축적 요소를 포함한다. 얼굴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땅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품이다”라고 전한 뉴미디어와의 인터뷰는 독특한 실루엣을 구현하고자 한 미키오의 청사진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미키오의 평소 행색처럼, 평범한 차림에도 그라운즈 슈즈 하나면 미래적이면서도 귀여운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었기에, 비정상적으로 크기를 부풀린 에어가 패션 신을 사로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새로운 명패를 내걸고 하라주쿠를 넘어 전 세계적로 빠르게 퍼져나간 그라운즈의 시그니처 모델이라 하면 단연 ‘JEWELRY’다. 누군가는 나이키의 최고 히트작 중 하나인, 에어 베이퍼 맥스(Air Vaper Max)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그라운즈의 에어가 주는 존재감은 실루엣과 컬러에서 베이퍼 맥스와는 확연한 차이를 만든다(실제 착용감 역시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라운즈의 에어 밑창은 보기보다 단단한 편). ‘JEWELRY’라는 이름답게 형형색색의 보석 장신구를 보는 듯한 컬러감을 밑창과 어퍼에 부여하며 다양한 모델을 만들어낸 그라운즈인데, ‘JEWELRY’에서 깃을 세운 듯한 ‘BREED’, 공기의 흐름을 재현한 듯한 ‘INTERSTELLAR’, 양말 형태의 ‘LACE’ 모델, 에어 밑창을 더욱 부풀린 ‘MOOPIE’ 그리고 최근에는 슈즈의 실루엣을 활용한 가방 ‘LACE KNIT CLUTCH BAG’까지 출시하며 그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소재에 있어서도 단순 니트뿐만 아니라 가죽, 스웨이드, 캔버스, 방수 패딩 등을 사용하며 더욱 다채로운 변주를 가한 모습. 더욱이 이름 꽤나 날리는 패션 브랜드, 아티스트와 조화롭게 호흡하며 또 한 번의 혁신적 실루엣을 만들어냈으니, 이 역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Mikio Sakabe/JennyFox
근 몇 년 새 레깅스와 슈즈의 다채로운 조합이 꽤나 유행인 듯한데, 그라운즈는 단연 이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그 매력은 디자이너 미키오 사카베 그가 운영하고 있는 동명의 브랜드와의 협업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브랜드 미키오 사카베(MIKIO SAKABE)는 2006년 미키오가 그의 아내이자 대만 디자이너 슈 젠팡(Shueh Jen-Fang)과 설립한 브랜드로, 환상의 세계에 존재할 법한 소녀를 내세워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그러나 어딘가 차가운 이미지의 컬렉션을 선보여왔다. 컬렉션 내에도 그라운즈와의 협업 제품이 꾸준히 등장해 왔는데, 그라운즈의 대표 모델 ‘JEWELRY’에 리본, 레이스를 더하거나 발레 슈즈 형태 변형한 것이 대표적. 이외에도 기존 그라운드에서 선보이던 에어보다 한층 부푼 실루엣 등의 제품으로 가녀린 소녀가 마치 외계에서 온 듯한 이질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공이 둘이면 어딘가 삐걱거리기 마련이지만,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결과물이기에, 그 조화로움은 여타 패션 브랜드의 협업을 쉬이 능가한다. 미키오의 아내 슈 젠팡 역시 자신의 브랜드 제니팍스(Jennyfax)를 통해 그라운즈와 활발한 협업을 진행 중에 있으니 백문이 불여일견,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실루엣을 직접 감상해 보자. 눈으로 좇기만 해도 소녀들의 판타지 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이들의 캠페인은 분명 시간을 들여 감상할 가치가 있을 것(특히 로타 볼코바와 함께한 제니팍스의 컬렉션은 께름칙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일품).
Walter Van Beirendonck
물론, 그라운즈의 독보적인 실루엣은 타브랜드와의 공존에 있어서도 탁월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특히, 전위적 실루엣을 가진 브랜드라면 더욱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뽐내는데, 아방가르드함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월터 반 베이렌동크의 20 AW 컬렉션 ‘WALTER ABOUT RIGHTS’에 등장한 우악스러운 결과물을 마주하면 납득이 갈 테다. 해당 컬렉션에는 거대한 스파이크로 어깨를 감싼 재킷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와 결을 맞춰 제작된 것이 스파이크 스니커다. 앞꿈치에 2개, 뒤꿈치에 1개, 바깥쪽을 따라 3개, 총 6개의 스파이크를 부착한 스니커는 공격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귀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는 분명 순수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라운즈의 에어백(혹은 전구) 같은 밑창이 크게 한몫했을 것. 텅에는 월터 반 베이렌동크의 캐릭터를 삽입해 더욱 아이 같은 매력을 살렸다. 컬러는 화이트, 블랙, 레드 총 세 가지. 빨간색을 이용해 특유의 판타지를 그려온 두 브랜드기에 더욱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또한 어릴 적부터 월터 반 베이렌동크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밝힌 미키오였으니, 운명처럼 이뤄진 협업이 그에게는 더욱 뜻깊겠다.
Bernard Willhelm
마지막으로 독일의 패션 디자이너 버나드 윌헴과의 조화로운 협업도 빼놓을 수 없겠다. 지난해 그라운즈가 공개한 버나드 윌헴과의 두 번째 협업 컬렉션은 덴마크 페로 제도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테마로 동화적인 매력을 뽐냈다. 회색빛 도시 그리고 그 불빛이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까마득한 야생. 핸드 니트 부츠와 퍼프 발레 슈즈, 풍성한 장식이 잔뜩 달린 시그니처 스니커 등으로 구성된 협업 컬렉션은 두 곳의 지리적 생태를 반영하듯 미래적 동시에 마구간의 포근함을 담았다. 더욱 두꺼워진 갑피와 섬세한 수공예의 버블 니트 패턴, 굵직한 슈레이스는 지루할 틈 없이 스타일에 변주를 가하는 두 브랜드의 창의력을 여실히 증명한다. 최근 발매된 컬렉션이니 만큼 현재 그라운즈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비록 현재까지 그라운즈의 국내 소비자 중 대다수는 여성인 듯 하지만(대개는 후르츠 매거진에서 볼법한 차림의 홍대 거리의 소녀들에게 좀 더 인기가 있는 듯 보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종종 그라운즈의 매력에 빠진 남성들 역시 목격되는 만큼 남다른 실루엣의 스니커를 찾고 있었다면 분명 탁월한 선택지가 될 듯하다. 행여나 조금 과하다 생각되더라도 괜찮다. 인간의 걸음걸음마다 즐거움을 전한다는 철학 아래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전하는 것이 그라운즈이니 말이다.
GROUNDS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GROUNDS 공식 웹사이트
이미지 출처 | GROUNDS, MIKIO SAKA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