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혹은 시작. 후련하지만 어딘가 아쉽고, 지긋지긋하지만 벌써부터 그리운 졸업 시즌이 찾아왔다. 졸업생 모두가 졸업을 위해 수학하던 학문의 최종 결과물을 제출했을 테다. 누군가는 학술 논문으로, 또 누군가는 졸업 작품으로. 형식은 다를지라도 졸업 작품은 다년간의 배움으로 쌓인 기량을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결과물이다. 그만큼 모두가 자신의 성과를 멋지게 세상에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여기,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졸업 작품 영화가 있다. 대학생 수준이라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영화를 향한 애정과 고민, 그리고 각오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졸업 작품으로 남기에는 아쉽다. 열정과 패기 넘치는 대학생 시절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인상적인 졸업 작품 영화 4선을 소개한다.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 임지은 / HD / 23min 50sec / 2013
영화학도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4년간 비싼 등록금을 내며 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경험하고, 꿈꿔왔는데 도대체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감독도 똑같은 고민을 했었나 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창작자의 고민이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고스란히 녹아있다. 말 그대로, 감독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낀 작품. 임지은 감독의 성결대학교 2013년도 졸업작품,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다.
주인공 ‘진지한’의 졸업 영화 촬영장. 지한은 4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연출 기술을 모두 쏟아부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현장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주변 스태프들과의 의견 충돌이 생기면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란 무엇인지 혼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 구원처럼 등장한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영화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책 ‘영화의 이해’ 저자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netti). 자네티는 지한의 컷마다 끼어들어, 촬영, 스토리, 편집, 음향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 세계적인 영화학 교수 자네티와 함께 한 한국의 영화학도는 과연 걸작을 만들 수 있을까. 영화 이론서의 저자가 촬영장에 나타난다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기획과 내용 자체도 흥미롭지만, 대학생이 했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섭외력이 더욱 눈길을 끈다. 대학생 감독의 졸업작품에 무려 봉준호 감독과 최동훈 감독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들 또한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책을 보고 영화를 배웠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 이 정도 섭외력이면 진짜 루이스 자네티까지 섭외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루이스 자네티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네티 역을 맡은 배우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인데, 바로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과 같은 한국 영화 200편을 번역한 영화 평론가 달시 파켓(Darcy Paquet)이다.
2. 용서받지 못한 자 – 연출. 윤종빈 / HD / 141min / 2005
“그러면 도와줄 수가 없어.”
군필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명장면.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영화가 사실 대학생이 만든 졸업작품이라면, 그리고 저기 맞고 있는 어리바리한 이등병이 이 작품의 감독이라면 믿겠는가? 졸업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윤종빈 감독의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
군대 안에서 행해지는 무언의 폭력과 불합리한 위계질서를 파헤친 내용으로, 군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내 폭력 문제를 다루며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폭압을 비판한다. 기술적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민속지에 그치지 않고 한국 근대사에 대한 중대한 알레고리를 호소력 높은 이야기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줬다. 2000년대 군대 특유의 분위기를 리얼리티 있게 담아내 그 당시의 군생활을 경험한 남성들의 전폭적인 동감을 이끌어냈고, 제59회 칸 국제영화제에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초청되었을 만큼 평단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의 작품성만큼 제작과정 또한 흥미롭다. 윤종빈 감독의 개인 돈 5백만 원을 포함해 총제작비 2천만 원이 들어간 초저예산 영화로 감독과 대학 선후배 사이인 아마추어급 스태프와 배우들이 전원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덮어두고 싶어 할 정신적 상처에서 고통만이 아니라 웃음까지 건져 올린다는 점인데, 그건 아마추어라고 믿기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런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배우 하정우의 몫이 크다. 연극을 통해 접하게 된 하정우의 연기에 반한 윤종빈 감독이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 섭외를 했고, 대학 선배인 하정우는 촬영 현장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흔쾌히 출연을 결심했다.
또 하나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하는데, 이번 건은 스케일이 좀 크다. 윤종빈 감독은 제작비 절감과 리얼리티를 위해 영화를 군부대 안에서 촬영하기로 한다. 영화 촬영 협조를 받기 위해 감독은 육군 본부에 선후임병간의 우정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며 가짜 시나리오를 전달한 것. 하지만 허락받은 내용이 아닌 군부대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이에 육군은 윤종빈 감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했다. 감독은 처벌받아야 한다면 받겠다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지만, 달리 찍을 방법이 없었다”라고 이유를 말했다. 찍을 방법이 없지만, 꼭 찍어야 했던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렇게 해서라도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어야 했을까.
한 대학생의 거침없는 패기로 만들어진 영화는 군대의 부조리함을 경험한 이들에겐 아픈 기억을, 미래의 세대에겐 안타까운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되풀이되는 폭력과 부조리한 괴롭힘이 재생산되며 변하지 않고자 했던 사람조차 변하게 만들어버린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졸업영화에 대한 편견과 한계를 깨버린 가치 있는 작품이다.
3. 유월 – 이병윤(BEFF) / DCP / 25 min / 2018
지금 젊은 세대에게 졸업영화 하면, 아마 이 작품 “유월”부터 떠올리지 않을까. 유튜브 조회수 630만 회를 기록하고 있는 이병윤 감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졸업작품 말이다.
움직임에서 찾아낸 기쁨을 통해, 학생과 선생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잃어버린 자아를 다시 일깨우는 댄스 필름. ‘집단무용증(a.k.a. 댄스바이러스)’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춤과 연기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인트로에 습관처럼 누르던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감독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이게 영화가 맞는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2019년도에 진행된 수많은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몸짓으로 소통하는 이 영화는 춤의 본질인 ‘기쁨’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자유와 기쁨의 표현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 짓게 만드는, 스텍타클과 내러티브의 균형을 흥미롭게 맞춘 작품.
4. 매미 – 윤대원 / 17 min / 2021
한국의 단편 영화 중 이렇게 날 것에 가까우면서 감각적인 은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윤대원 감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졸업작품 “매미”는 남산 소월길에서 몸을 파는 트랜스젠더 ‘창현’에게 낯선 듯 낯익은 손님이 찾아오며 시작되는데, 육체에 갇힌 성 정체성에 대한 내용을 그리고 있다.
성매매를 목적으로 도로변에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지칭하는 은어, 매미. 영화는 창현의 기이한 하룻밤을 땅속에서 유충의 형태로 긴 시간을 살다 밖으로 나와 허물을 찢고 성충으로 변하는 매미의 성장 과정에 빗댔다. 어쩌면 매미의 허물처럼 육체는 그저 껍데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매미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상징성이 날카롭다.
미스터리함이 가득한 영화 “매미”는 논리적인 설명이나 설득적인 내용 없이 감각적으로 흐른다. 이러한 연출력을 인정받아 칸영화제의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한국 영화사 최초로 2등 상을 수상했다. 짧은 러닝타임 속 호흡의 디자인이 직관적이고 미학적이다. 분명 기존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하고도 강렬한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Indie Story Film, Chungeorahm Film, Central Park Films, Rainbow Factory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