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드레스코드 : 치카노

치카노

이태원의 멕시칸을 기억하는가. 헐렁한 디키즈 팬츠를 입은 민머리 무리를 보며 괜스레 어깨를 움츠렸던 기억은 없는지. 소위 치카노(Chicano)라 불리던 그들의 옷차림은 타코벨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태원과 홍대 등지에서 짙은 멕시칸의 냄새를 풍겼다. 비교적 구하기 쉽고, 저렴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드레스코드 덕분에 큰 이질감이 들지도 않았다. 무지 티셔츠와 디키즈, 나이키 코르테즈라면 누구나 치카노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을 하나 더하자면 머리를 밀 수 있는 용기 정도. 2000년 초반부터 중반까지 거리 곳곳을 누비던 그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번화가를 메운 에이셉 라키(Asap Rocky) 속에서 릴 랍(Lil Rob)을 만난다면 그때처럼 덜컥 겁이 날까. 아니,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더 크게 들 것 같다. 어쩌면 과거로의 회귀하는 최근의 동향 속에서 치카노 역시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고 있을는지 모른다.

 

릴랍

 치카노 스타일의 래퍼 릴 랍

치카노는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겐 이미 치카노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치카노 이전에 촐로(Cholo)라는 단어가 존재했다. 라틴 아메리칸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던 촐로는 지금 치카노 문화의 아버지 격으로, 치카노를 논할 때 우선으로 설명해야 할 대상이다. 20세기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많은 멕시칸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는데, 당시 그들의 패션은 파추코 스타일이라는 넓은 통의 팬츠와 기다란 체인, 드레스 슈즈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차림을 통상 주트 수트(Zoot Suit)라고 불렸으며, 상당히 과장된 그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치카노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통 넓은 바지와 흰 셔츠는 파추코와 치카노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수 있는 공통분모다.

파추코

형형색색의 주트 수트를 입은 파추코 – 넓은 통의 바지와 길게 늘어뜨린 체인이 인상적이다.

이후 그들의 정착이 안정화될 때쯤, 촐로의 2세들은 멕시코와 미국이 반쯤 섞인 메히카노로 정의되었다. 지금의 치카노는 메히카노가 줄여진 축약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 처음 사용된 치카노라는 표현은 백인 지주들이 멕시칸 노동자를 부를 때 쓰는 비하적 표현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멕시코 민족의 긍지를 표현하는 자주적 단어로 사용한다.

치카노라고 한다면 으레 패션으로 그 범위를 한정 짓는데, 사실 치카노는 멕시칸 전체를 아우르는 하위문화로 이해해야 옳다. 미술과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로 그 영역을 구축한 치카노 문화는 문학에서 가장 큰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치에 관련된 운동, 행사의 선동적인 글이 그 바탕이 되었다. 지금의 치카노 패션이란 그들의 거친 문화 속에서 파생된 치카노 갱스터 스타일을 정형화한 것으로 극 초반의 치카노 패션을 보고 싶다면, 치카노 힙합의 창시자 키드 프로스트(Kid Frost)를 참고하면 좋다.

치카노 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키드 프로스트의 “LA RAZA NEW” 뮤직 비디오

위 뮤직비디오를 감상해보자. 현재의 치카노 스타일보다는 파추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의 음악은 대체로 멕시칸 청년에 대한 이야기와 빈민가 치카노 갱스터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후 릴 랍(Lil Rob), 싸이프레스 힐(Cypress Hill)과 같은 뮤지션이 지금의 치카노 스타일과 부합하는 의류를 입고 나왔다. 치카노 문화의 구심점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남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드러내는, 특유의 마초이즘을 풍기는 문화 색은 낯선 타국에 정착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쯤 지나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본격적인 치카노 스타일을 구현하자면, 단연 워크웨어를 빼놓을 수 없다. 잔뜩 풀을 먹인, 빳빳하다 못해 단단한 디키즈와 벤 데이비스의 치노 팬츠는 어떻게 그들의 상징적 아이템이 되었을까. 사실, 디키즈와 벤 데이비스가 애초부터 치카노의 유니폼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주로 착용하는 치노 팬츠의 기원은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카노 갱이 생겨날 무렵, 많은 양의 군복 하의가 시장에 유입되었는데, 그 단단하고 거친 재질의 군복 하의는 꽤 저렴하기까지 했다. ‘치카노갱’이 부를 축적하지 못한 시기였으니 어쩌면 그들에 안성맞춤인 옷이었을 터. 하지만 그 수요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치카노는 그와 유사한 디키즈, 벤 데이비스와 같은 워크웨어를 선호하게 되었고, 현재 일부는 리바이스사의 501모델을 착용하기도 한다.

단순히 워크웨어 브랜드의 치노 팬츠를 착용한다고 해서 치카노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카키색과 검은색, 감색, 갈색의 치노를 착용하는 것과 같은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고. 이런 치카노갱의 드레스코드에 관한 재밌는 사실은 디키즈 역시 갱이 자사의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에 착안해 이를 이용한 프로모션을 펼친다는 것이다. 이제는 갱웨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치카노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브랜드 다수는 그 남성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특수한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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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노를 전면에 내세운 디키즈 카탈로그

워크팬츠와 워크셔츠의 조합도 치카노의 주요한 패션코드 중 하나지만, 역시 흰색 슬리브리스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치카노가 입은 흰색 슬리브리스는 흰색 슬리브리스가 아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단순한 옷가지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Wife Beater shirt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아내를 때리는 셔츠라는 뜻의 기원은 1986년 방영된 미국의 인기 드라마 ‘Cops’에서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대부분이 항상 이런 유형의 상의를 입고 있던 것에서 착안해 탄생한 대명사다. 실질적 이름은 흰 민소매 셔츠겠지만, 거친 치카노갱에게 흰색 슬리브리스 셔츠라는 말은 너무 심심하지 않나. 어쨌든 이 치카노갱은 이 아내를 구타하는 셔츠의 때를 타게 해서는 안 되며, 방금 산 듯한 깔끔함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무지 티셔츠와 플란넬 셔츠의 조합은 치카노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된다. ‘치카노의 플란넬 셔츠 입는 법’은 맨 위의 단추 하나만을 잠그는 것이다. 그 외 아래의 단추는 모두 채워지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 플란넬에 담긴 체크무늬 역시 선명한 것일수록 좋다.

 촐로 스타일
하얀색 무지 티셔츠에 맨 윗 단추만을 채운다.

모든 패션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인 신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굵은 나이키 스우시가 인상적인 코르테즈는 치카노 패션의 결정적인 키워드다. 치카노 그래픽에 인생을 쏟은 치카노의 대부 미스터 카툰(Mr. Cartoon) 역시 코르테즈 모델의 협업을 진행했고, 실제 대부분의 치카노 갱은 코르테즈를 사랑한다. 이외 검정색 컨버스 등의 단순하고 간결한 디자인의 스니커를 착용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스테이시 아담스의 드레스 슈즈를 착용하기도 한다. 나이키, 컨버스 같은 스니커와 드레스 슈즈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앞서 언급한 주트 수트를 생각한다면, 과거의 복장이 일정 부분 그대로 옮겨 왔음을 알 수 있다. 동글동글한 외형의 스니커, 코르테즈를 신는 갱의 모습은 왠지 귀여운 인상을 주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 이어져온 치카노와 코르테즈의 관계는 코르테즈의 이미지조차 바꿔놓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얀 무릎 양말 아래 위치한 깔끔한 운동화는 갱이라고 하기엔 너무 귀엽지만, 그 멋이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복장이 그만큼 스타일리쉬했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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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카툰과 나이키 코르테즈의 협업

Locs 선글라스 역시 빼놓기엔 섭섭하다. 기성품과 토이 선글라스의 중간쯤에 있는 이 브랜드는 눈동자만을 가리기 위해 태어난 듯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겠느냐만, 보잉 선글라스를 쓴 치카노는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에 반다나 두건을 매거나 브림햇을 쓰는 것도 치카노 액세서리의 한 부분이다. 이쯤 되면 지금의 치카노 스타일은 주트 수트의 현대화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치카노의 첫 시작 역시 상당히 민족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탄생했기에, ‘갱’이라는 한 단어로 치카노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섣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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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s의 선글라스를 착용한 치카노

치카노 스타일은 분명 건너간 유행이다. 본토에서조차 치카노 스타일을 찾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 됐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치카노족’은 세계 여러 곳에 분포 중이다. 가까운 일본과 동남아시아 쪽은 여전히 활발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흐름은 오랜 시간 이어지고 있다. 특히 태국 방콕의 치카노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들은 실제 갱이 아니라 각자의 본업을 유지하며 동호회의 성격을 가지고 활동한다. 일본 역시 치카노 스타일을 커뮤니티화, 꾸준히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치카노 문화가 한순간의 유행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은 무척 아쉽지만, 언젠가 다시 한 번 반짝이는 민머리에 디키즈를 걸친 치카노 갱을 만나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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