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Pages: Fragment Design 밖 후지와라 히로시의 발자취, ‘The Shadow Of the Official Artworks’

지금의 일본 서브컬처 신(Scene)을 건설했다고 일컬어지는 후지와라 히로시(Hiroshi Fujiwara). 패션은 물론, 음악과 예술 등 문화가 닿을 수 있는 분야라면 어디에서든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고, 그가 하위문화 위에서 걸어온 긴 시간만큼 무수한 작업물을 만나볼 수 있다. 후지와라 히로시라는 인물을 떠올릴 때 그의 또 다른 자아와도 같은 프라그먼트 디자인(Fragment Design)이 가장 먼저 생각나겠지만, 그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선구안과 재능을 뽐내며, 긴 자취를 남겼다.

오늘 소개하는 페이지는 일본의 하위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출판사 모’디자인(mo’design)에서 2003년 출간한 ‘Hiroshi Fujiwara: The Shadow Of the Official Artworks’로 후지와라 히로시의 초기 작업을 망라하고 있다. 20년도 더 지난 옛날, 단 999권만 발매되었기에 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을 것. 프라그먼트 디자인이라는 이름 바깥에서 펼쳐졌던 그의 활약을 천천히 살펴보자.


GOODENOUGH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 그 당시의 유행이 다시금 불어옴과 동시에 후지와라 히로시가 런칭한 첫 패션 레이블 굿이너프(GOODENOUGH)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다. 1990년 설립, 일본 최초의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중 하나로 알려진 굿이너프는 지금 카브엠트(Cavempt)를 운영 중인 디자이너 스케이팅(Sk8thing)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토루 아이(Toru Eye)까지 합세했다.

당시 후지와라 히로시는 런던과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세계 곳곳에 포진한 든든한 인맥을 통해 패션과 하위문화 전반에 걸쳐 일본 내 누구보다 빠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앞서 소개한 ‘아사얀(Asayan)’이나 보물섬(Takarajima)과 같은 잡지를 통해 소개했고, 그로 인해 브랜드 전개 이전 이미 그를 추종하는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와라 히로시는 굿이너프라는 브랜드 뒤에 자신을 감췄다. 본인의 이름이 브랜드를 수식하는 순간, 후지와라 히로시의 팬만이 브랜드에 접근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옷의 본질이 가려진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히 제한된 판매처를 통해 매우 적은 수량으로 발매되는 굿이너프의 컬렉션은 매번 빠르게 품절됐으며, 희소성을 강조한 판매 방식은 추후 언더커버(UNDERCOVER)와 베이프(A Bathing Ape)의 설립자 타카하시 준(Jun Takahashi)과 니고(NIGO)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초창기 티셔츠 정도를 선보이던 굿이너프는 재킷과 팬츠 등 다양한 의류를 아우르며, 진짜 컬렉션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리조네이트 굿이너프(RESONATE GOODENOUGH)라는 레이블을 추가, 2013년에는 프레피 룩을 테마로 한 굿이너프 아이비(GOODENOUGH IVY)까지 전개해 그 세를 키웠으나 회사가 커질수록 후지와라 히로시의 흥미는 점차 떨어졌고, 2017년 공식적으로 브랜드 종료를 선언했다. 굿이너프의 끝은 후지와라 히로시가 프라그먼트 디자인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회사가 커질수록 많은 사람을 고용해야 했고,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차라리, 독립적인 오퍼레이터로 활동하는 게 더 낫겠다고 느꼈죠. 그래서 모든 걸 끝낸 후 혼자, 혹은 한두 명의 적은 인원과 일하며, 내 아이디어를 다른 회사에 판매하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되기로 결정했어요.”

ELECTRIC COTTAGE

굿이너프와 함께 지금의 후지와라 히로시를 있게 한 주요한 브랜드가 몇 개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일렉트릭 코티지(Electric Cottage)’로 지금 스트리트웨어 신 속 인증 마크와도 같은 프라그먼트 디자인 선더볼트 로고의 시발점이 된 브랜드이기도 하다.

언젠가 스투시(Stüssy)의 창립자 숀 스투시(Shawn Stussy)가 후지와라 히로시에게 일본은 마치 전기로 이루어진 오두막 같다고 말했고, 여기에 영감받아 1994년 일렉트릭 코티지라는 브랜드가 시작된다. 이게 두 개의 번개로 이루어진 선더볼트 로고가 쓰인 최초의 사례로. 브랜드의 힌트를 제공한 스투시와의 협력은 물론, 나이키(Nike), 버튼(Burton)과의 협업으로 그 이름을 알렸다. 일렉트릭 코티지는 후지와라 히로시가 문을 열었던 편집 스토어 레디 메이드(Ready Made)가 문을 닫은 2000년 막을 내렸으며, 2002년 다시 잠깐 부활했다가 1년이 지난 2003년 프라그먼트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레일드(Grailed)나 일본 야후 옥션, 메루카리에서 종종 현재까지 남아있는 일렉트릭 코티지 제품을 찾아볼 수 있다. 일렉트릭 코티지의 그래픽을 둘러싼 ‘모어어바웃레스(MoreAboutLess)’, ‘피네스(Finess)’ 그래픽은 당시 후지와라 히로시가 전개하던 프로젝트성 브랜드로 이 또한 레디 메이드의 종료와 동시에 사라졌다.

MUSIC

많은 이가 알다시피 후지와라 히로시의 영향력은 패션에만 그치지 않았다. 80년대 DJ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 이후 타카기 칸(Kan Takagi)과 타이니 펑스(Tiny Panx)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했고, 이를 메이저 포스(Major Force)라는 레이블로 발전시켜, 본인의 음악적 역량을 확장해나갔다. 이 시기 그의 솔로 정규 앨범을 완성했는데, 그게 바로 1994년 발매된 [Nothing Much Better To Do]다.

이후 1998년에는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망키(Mankey)가 디자인한 EP [Flowers]를 냈고, 1998년 일본의 가수 겸 배우 코이즈미 쿄코(Kyôko Koizumi)와 [89-99 Collection]을, 1년 뒤인 1999년에는 싱어송라이터 엘리(Ellie)와 [Marchin’ Round The World]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작업했다. 후지와라 히로시는 최근까지도 앨범을 발매하거나 라이브 공연을 하는 등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또 다른 영감을 전달하고 있다.

“펑크에는 ‘정신’이 있어요. 조금 이상한 걸 하거나, 대중적인 걸 조롱하는 그런 태도 같은 거요. 힙합은 이미 존재하는 걸 재구성하는 샘플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이런 게 음악뿐만 아니라 패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SNEAKER

후지와라 히로시의 수많은 프로젝트 중 아마 프라그먼트 디자인 다음으로 유명할 나이키의 HTM 프로젝트. 후지와라 히로시를 포함, 나이키의 스니커 디자이너였던 팅커 햇필드(Tinker Hatfield), 나이키 CEO 마크 파커(Mark Parker)의 이름을 딴 HTM은 충성도 높은 스우시 컬렉터에게 스니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작품의 반열에 이르렀다. 나이키와 뭔가 함께한다면 뭘 하고 싶냐는 마크 파커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HTM은 단순히 클래식 스니커의 디자인을 업데이트하는 게 아닌, 새로운 비전으로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실험의 장으로 기능했다.

프리미엄 레더로 에어 포스 1(Air Force 1)을 제작해 럭셔리 스니커라는 개념을 도입했으며, 과거 스니커 신을 떠들썩하게 한 우븐, 나이키의 핵심 기술 중 하나인 플라이니트(Flyknit)를 최초로 선보인 일종의 실험실(Lab)이기도 하다. 마크 파커가 나이키를 떠남에 따라 더 이상의 HTM을 기대할 수 없지만, 그들이 선보였던 ‘진보한’ 스우시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사실, 후지와라 히로시는 HTM 이전부터 나이키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여기서 HTM 이전 나이키와의 협력을 살펴볼 수 있는데, 나이키 에어목(Air Moc)과 에어 우븐(Air Wooven), 에어 줌 세이즈믹(Air Zoom Seismic)과 같은 모델의 컬러웨이를 제안했다. 또한, 2002년에는 오랜 시간 나이키의 PR을 맡아온 광고사 와이든 앤 케네디(Wieden+Kennedy)의 롯폰기 오피스 오픈을 기념하는 에어 포스 1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HTM은 이미 존재하는 걸 가지고 업데이트하는 게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를 최초로 발표하는 팀입니다.”

나이키 밖에도 2000년대 초반 일본 내 적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던 그라비스 라이벌(Gravis Rival) 모델을 바탕으로 한 굿이너프 협업 모델을 두 차례 디자인하기도 했으며, 초창기 비즈빔(visvim)의 로퍼 모델 톰블리(Twombly)의 콘셉트와 디자인을 진행, 여기에서도 인솔에 굿이너프의 로고를 슬쩍 숨겨두었다.

ETC

후지와라 히로시가 영화 “스내치”와 “스파이더맨”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패션과 음악 외에도 후지와라 히로시의 손길이 닿은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후지와라 히로시의 디렉팅으로 전개된 요시다 포터(Yoshida Porter)의 의류 라인 헤드 포터 플러스(Head Porter Plus)의 재킷을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협업했으며, 둘이 함께 마틴(Martin)의 어쿠스틱 기타를 커스텀하기도 했다.

본 아카이브 북이 발행된 시기가 2003년,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쉬지 않고 결과물을 내왔으니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야말로 후지와라 히로시 커리어의 작은 조각 정도일 테다. 60을 넘긴 나이에 지금까지도 하위문화를 다루는 각종 패션 매체에서 하루가 멀게 회자되는 인물이 몇이나 있을지. 마지막으로 지금껏 남긴 작업을 함축하는 후지와라 히로시의 짧은 한마디로 이 글을 마쳐본다.

“저는 그 어떤 철학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와 내 친구들이 있었을 뿐이죠.”


이미지 출처 | Damp 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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