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세계는 넓고 깊으며 취향은 각자 다양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이닐이 음악 감상을 위한 매개체가 아닌 수집 자체에 의미를 두는 오브제로 변모하면서, 평소에 즐겨 듣는 음반과 소장하고 싶은 바이닐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모습도 수집가 사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는 옥승철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커버에 연작처럼 전개된 밴드 아도이(ADOY)의 바이닐을 인테리어 오브제로서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 품귀 현상으로 중고 거래 가격이 정가의 10배씩 상승하기도 했다.

필자는 제품 디자인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이번 추천에서는 음악 자체보다는 음악이 주는 분위기와 바이닐의 형태적 디자인이 얼마나 조화로운지, 그리고 독창적인지를 중점으로 총 열네 장의 바이닐을 추천한다. 이미 소장 중인 경우 사진도 직접 찍어왔다.

물이 들어간 바이닐

01. The Marías – Submarine (2024)

아직 정식 발매 전인 바이닐을 한 장 추천한다. 2016년부터 LA에서 탄생한 인디 팝 밴드 더 마리아스(The Marías)의 두 번째 정규 앨범 [Submarine]이 온라인 주문 한정으로 물이 담긴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보컬 마리아 사도야(María Zardoya)의 목욕물을 넣었다는 마케팅과 함께. 해당 앨범은 5월 중으로 정식 발매된다고 한다. 지난 앨범 [Cinema]와 [Superclean]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성을 생각한다면 믿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혈액이 들어간 바이닐

02. The Flaming Lips – The Flaming Lips and Heady Fwends (2012)

다소 고어하지만 실제 사람의 혈액으로 채운 바이닐도 있다. 오클라호마 출신의 사이키델릭 록 밴드 더 플레이밍 립스(The Flaming Lips)의 ‘Fwends’ 시리즈 중 첫 번째 앨범인 [The Flaming Lips and Heady Fwends]가 바로 그 주인공. 바이닐 제작을 위한 혈액 샘플에는 앨범에 피쳐링을 했던 케샤(Ke$ha)와 밴드 네온 인디언(Neon Indian)의 멤버 알란 팔로모(Alan Palomo), 그리고 콜드플레이(Coldplay)의 크리스 마틴(Chris Martin)도 포함되어 있다. 이 바이닐을 구매한 컬렉터들에 의하면 실제 혈액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붉게 변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실물에 관한 후기를 구경할 수 있다.

얼음으로 만든 바이닐

03. Shout Out Louds – Blue Ice (2012)

얼음으로 만든 바이닐도 존재한다. 스웨덴의 인디 팝 밴드 샷 아웃 라우즈(Shout Out Louds)의 앨범 [Blue Ice]는 그 이름처럼 얼음으로 바이닐 제작에 도전했다. 당연히 대량 제작을 할 수는 없었지만, 시도 자체에 호평받았다. 이 역시 유튜브에서 실제로 재생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타 이펙터 페달 겸용 바이닐

04. Brother O’ Brother – Skin Walker (2022)

2022년 밴드 브라더 오 브라더(Brother O’ Brother)의 앨범 [Skin Walker]의 바이닐 레코드는 세계 최초 기타 이펙터 페달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단지 매우 두꺼운 크기로 바이닐 레코드를 제작하여 내부에 이펙트 페달을 위한 전자 장치들을 수용한 것이다. 오버드라이브와 부스트, 딜레이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바이닐의 센터 라벨에 파라미터를 조절할 수 있는 컨트롤 노브가 장착되었다.

톱날 바이닐

05. MSCHF x The Weeknd – “Vinyl Blade”(2022)

MSCHF가 위켄드(The Weeknd)와 협업하여 톱날 모양의 바이닐 레코드를 25장 한정으로 제작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턴테이블 위에서 훌륭하게 음악을 재생하지만, 톱날 모양인 만큼 실제 그라인더에도 부착이 가능하다고. 다만 실제 톱날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단단히 경고하며 실제로 사용할 시 심각한 부상 혹은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픽쳐 디스크

픽쳐 디스크(Picture Disk)는 바이닐 전체에 사진이나 그래픽 등이 인쇄가 된 방식으로 일반적인 형태의 바이닐보다 음질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검은색의 음반이 가장 음질이 고르고, 컬러 · 글리터 · 스플래터 · 픽쳐 디스크의 순서로 뒤로 갈수록 음질이 떨어진다. 제작 공정을 생각해 본다면, LP 압착 전 불순물이 많을수록 음질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듣기 위해서가 아닌 소장하기 위해서 바이닐을 사 모으는 시대에 그런 건 소장 기준에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06. Tyler, The Creator & Prophet – Peach Fuzz (2018)

5년 전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이하 타일러)와 프로펫(Prophet)이 발매한 곡 [Peach Fuzz]는 곡 제목처럼 바이닐도 복숭아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색상 전문 기업 팬톤(Phanton)이 발표한 2024년 올해의 컬러 또한 동명인 것을 보면, 타일러가 또 앞서 나갔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 노래는 타일러가 프로펫의 곡 [Wanna Be Your Man]을 듣고 감명 받아 타일러 버전으로 다시 손대서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 바이닐의 A 사이드에는 [Peach Fuzz], B 사이드에는 원곡 [Wanna Be Your Man]이 수록되어 있다. 레코드 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복숭아를 보며 타일러 특유의 독창적인 음악 전개 방식을 듣다 보면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2% 부족할 때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07. Glass Animals & Denzel Curry – Tokyo Drifting (2020)

복숭아가 싫다면 거대한 용과 모양의 바이닐도 있다! 실물 용과보다 커다란 크기 덕에 피지컬 음반이 주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사이키델릭 팝을 주로 다루는 영국의 록 밴드 글래스 애니멀스(Glass Animals)의 곡 위에 미국 래퍼 덴젤 커리(Denzel Curry)의 래핑이 더해진 곡 [Tokyo Drifting]이 담겨있다. 디자인만큼이나 음악도 톡톡 튄다. 뒷면에는 ‘sniff’라는 단어로 요란하게 채운 그래픽이 재미를 더해준다.

08. Vince Guaraldi – It’s The Great Pumpkin, Charlie Brown (2021)

핼러윈을 위한 호박 바이닐도 존재한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계를 주름잡았던 빈스 과랄디(Vince Guaraldi)가 1966년 애니메이션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를 위해 작곡한 재즈곡들이 2021년 호박 모양으로 새롭게 발매되었다. 일명 ‘스누피 LP 시리즈’로 유명한 빈스 과랄디의 바이닐은 크리스마스 버전도 유명하지만, 다른 음반에는 잘 없는 이 호박 모양에 소장 욕구가 더 자극된다. 핼러윈 분위기에 즐거움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이 독특한 바이닐은 물리적인 한계로 싱글 곡이 수록된 경우가 많은데, 이 음반의 경우 여러 곡이 수록되어 있어 길게 감상할 수 있다.

09. Elvis Presley – Blue Christmas (2013)

핼러윈에 이어 크리스마스를 위한 바이닐도 추천한다. 그 주인공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크리스마스 한정 버전 바이닐. “Santa Claus…”라는 곡이 수록된 초록색 버전도 있지만, “Blue Christmas”가 수록된 흰색 버전이 깔끔해서 인테리어 효과가 좋다. 또한 음반 가운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흑백 초상과도 잘 어울린다.

10. Guns N’ Roses – Paradise City (1989)

‘총’ 모양의 건즈 앤 로지즈(Guns N’ Roses) 바이닐이라니, 더 이상의 구매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더군다나 [Paradise City]는 건즈 앤 로지즈의 1987년 데뷔 앨범 [Appetite for Destruction]에 수록된 여섯 번째 곡으로 유일하게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곡이었다. 빌보드 핫 100에서 5위에 진입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전문 평론가들의 무수한 칭찬을 받았다. 건즈 앤 로지즈 음반을 하나쯤 소장하고 싶다면, 바로 이 음반을 추천한다.

11. QUEEN – I’m Going Slightly Mad (1991)

명불허전 최고의 영국 록 밴드 퀸(QUEEN)에게도 픽쳐 디스크가 있다. 싱글곡 [I’m Going Slightly Mad]가 담긴 괴생명체 그림의 바이닐. 이미 퀸의 음반을 CD로 전부 다 가지고 있다면, LP는 독특한 것만 골라서 소장하는 것도 방법이다.

12. The Beatles – Love Me Do (2013)

퀸에게 크리쳐 바이닐이 있다면, 비틀즈에게는 사과 모양의 바이닐이 있다. 비틀즈 전집을 이미 CD로 갖고 있다면, 추가로 이 바이닐을 수집해 보자. 비틀즈와 사과가 주는 상징성이 어떤 스타일의 인테리어이든 공간을 안정적으로 꾸며 줄 것이다. 홍사과와 청사과, 두 가지 색상이 있다.

13. Richard Sanderson – 愛のファンタジー (Reality) (영화 La Boum OST) (1980)

바이닐을 수집하다 보면 하트 모양은 다른 모양에 비해서는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편이다. 여러 뮤지션의 하트 바이닐이 존재하지만, 그중 영화 “라붐(La Boum)”의 OST 바이닐을 추천한다. 일본에서 특별 발매된 이 바이닐은 영화의 주인공인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가 중앙에 프린트되어 있어 복고풍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커버에는 1980년대 일본 전성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분위기의 일러스트레이션이 프린트되어 있어서 더욱 특별하다. 총 세 가지 색상이 있으니 전부 모아보는 것도 소장에 재미를 더할 수 있다. 수록된 노래는 모두 동일하다.

스플래터 바이닐

스플래터는 말 그대로 물감이 튀긴 것 같은 질감을 두 가지 다른 색상의 원료로 보여주는 제작 기법이다. 요즘에는 한정판 버전을 위한 디자인으로 여러 아티스트의 음반에서 정말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법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음반 하나를 추천한다.

14. Ryuichi Sakamoto – Music for Film (2022)

사카모토 류이치가 별세하기 직전 해인 2022년에 제작된 그의 영화 음악을 모아 놓은 바이닐 [Music for Film]의 한정반은 딥 블루와 블랙 색상이 혼합된 스플래터로 제작되었다. 그의 섬세하면서도 서글픈 곡조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기에 마지막 추천으로 꼽았다.

이외에도 야광이나 투명한 소재의 바이닐도 많지만, 음악 컨셉과 딱 맞아떨어지는 디자인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했다. 이 기사에서 추천하는 바이닐과 음악은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니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나만의 바이닐 디자인 컬렉션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듣기에 별로였던 음악이 뮤직비디오를 보고 좋아질 수도 있는 것처럼, 바이닐 디자인이 맘에 든다면 음악적 취향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수집하는 입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부가적인 즐거움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미지 출처｜김밥 레코즈, themarias.us, Stone Throw Records, Rare Vinyl, Jazz Shop, Midland Records, Discogs, Very English and Rolling St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