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떠올릴 때 곧바로 따라오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건 그것만이 영국의 유일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가 아니라는 것. 바로 영국에서 손수 핸드 프린팅한 제품만을 취급하는 또 다른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낸시(nancy)가 있으니 말이다.
혹시 런던을 여행하다 슈프림 스토어를 들른 경험이 있다면, 낸시의 창립자 역시 스케이터인 샘 휴스(Sam Hughes)를 만나본 적 있을지 모르겠다. 현재 슈프림 런던 매장의 매니저로도 근무하고 있는 그는 금주를 하는 동안 지루함을 느껴 낸시를 창립했다. 그렇게 2019년 첫발을 디딘 낸시는 현재 인스타그램 5,000 팔로워를 앞둔 작지만 강한 브랜드다.
APPAREL by nancy
스케이터를 위한 브랜드여서일까, 낸시의 컬렉션은 화려하지 않다. 다른 말로 기본에 충실하다. 가벼운 반소매 티셔츠와 데님과 카고 팬츠를 비롯한 바지, 롱슬리브 티셔츠와 후디 등 평상시에도 부담 없이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이루어졌다. 알차게 구성된 낸시의 제품군은 언뜻 ‘스케이트 컬처에 스스로를 한정하며 더 넓은 가능성의 탐색을 스스로 저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할지도.
하지만, 그런 의심을 거둬도 좋겠다. 낸시의 관심사는 스케이트보드를 비롯한 서브컬처 전반으로 뻗어나간다. 낸시의 그래픽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은 펑크, 그런지, 히피 등 다양한 하위문화를 포용한다. 지난 2023년 7월 공개된 티셔츠의 그래픽 중, 중세 성과 기사, 괴물 주위에 피가 흘러나오는 일러스트는 스크롤을 무심히 내리던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고어한 무드를 자아내며 악마적인 이미지를 가진 하드/메탈 록의 그래픽 문법을 연상케 하는 해당 시즌 비주얼은 일러스트레이터 잭 사바트(Jack Sabbat)와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슷한 시기, 피스(Peace) 사인이 프린팅된 티셔츠는 일견 힙합 신(Scene)을 떠올리게 한다. 2022년 5월 공개한 룩북에서는 키치한 그래픽을 담은 티셔츠를 선보이며 어둡거나 그런지한 분위기뿐 아니라 경쾌한 이미지까지도 다룰 수 있는 낸시의 저력을 선보였다. 이 역시 타투이스트로 활동하는 션 케네디(Sean Kennedy)의 도움으로 완성됐다. 같은 시즌, 또 다른 타투이스트 캐쉬 프랜시스(Cash Frances)와의 협업으로 걸리쉬하고 키치한 분위기의 티셔츠 역시 발매하며 적극적으로 브랜드의 영역을 넓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2020년 폴라로이드로 공개된 이미지 속 모델은 히피 문화에서 유래한 타이다이 기법을 사용한 티셔츠를 착용하고 있다. 그들은 사실 그 예전부터 한 서브컬처 신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쳐왔다. 제품군을 한눈에 훑어보고 낸시의 영역에 대해 가진 의구심은 이렇게 오만한 선입견으로 판명났다.
낸시의 서브컬처 향유는 단순 그래픽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제작 방법에서도 펑크 문화에서 시작된 D.I.Y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 실제로 낸시 브랜드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HAND SCREEN PRINTED IN THE U.K.’라는 문구가 적혀있을 만큼 작업 과정이 수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특히, 브랜드의 초기 소셜미디어 게시물에서는 머신 혹은 핸드 소잉과 스크린 프린팅을 담당한 이들의 크레딧까지 공개함으로써 D.I.Y 작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이에 더해 한때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패치를 따로 발매하며 낸시의 팬이 직접 원하는 의상이나 위치에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이 D.I.Y를 추구하는 만큼, 구매자 역시 그 문화를 체험하기를 독려한 셈.
SKATEBOARDING VIDEO by Nancy
여러 문화의 미감을 섞었다 할지언정, 낸시의 뿌리는 스케이트보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젝트가 있다. 비정기적이지만 꾸준히 공개하는 스케이트보드 비디오가 그것. 위험천만하고 아슬해 보이는 묘기를 선보이며 감탄을 자아내는 타 브랜드와의 비디오는 다르게 낸시는 있는 그대로의 스케이터를 보여준다.
영상 속, 런던을 활보하는 스케이터는 부딪히고, 넘어지고, 구른다. 저 멀리서부터 보드를 타고 달리다가 도로의 기물에 올라서려 하지만 이내 중심을 잃기도, 도로 중간의 경사진 벽면에 올라가 보드를 타고 내려오려다가 다치기도 한다. 똑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면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보기 좋게 실패하는 모습에 서로 깔깔대며 웃다가도 성공하는 순간 크게 환호하는 동료의 모습은 마음 한편을 강하게 흔든다.
유명 스케이터의 성공담이 아닌, 우리가 직접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상은 그야말로 러프하다. 날것의 느낌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그들은 하위문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보여주는 것. 멋지고 화려하게 꾸민 모습 말고, 우리는 이렇다며 보여주는 행위. 꼭 멋진 기술에 성공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대해 부끄러움이라던가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단 한 톨도 없이, 이내 묵묵히 일어나 저 멀리 달아난 스케이트보드를 주우러 간다. 그리고 다시 도전한다. 타인의 시선은 괘념치 않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더 잘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지향하는 스케이트보드 신, 더 나아가 서브컬처의 본모습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 na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