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자라난 한국인으로 살다 보면, 그리고 특히 서울에서 지내다 보면 당연시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도시를 반으로 가로지르는 한강, 환승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골목마다 즐비한 다양한 카페, 24시 운영하는 수많은 음식점, 교회에 달린 빨간색 십자가 같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겠다. 특유의 풍경과 환경이 여타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도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쉽사리 할 수 있지만, 한 발짝만 이 밖으로 나가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하물며 국적이 ‘대한민국’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간극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밤에 클럽과 레이브를 즐기며 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곳에 기여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다. 음악을 트는 디제이뿐만 아니라 프로모터, 공간의 운영자, 기획자, 그리고 관객까지. 이곳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음악이다. 좋은 음악을 위해, 그리고 신(scene)을 유지하기 위해 분주히 애쓰는 동료 중에는 익숙해서 잊게 되는 순간이 많지만, 외국인인 경우들도 상당하다. 이들이 느끼는 서울살이는 어떨까? 또 그들의 관점에서 지금 이 음악 신은 어떻게 느껴질까? 물론 긴 시간, 이 도시에 체류하며 상당 부분 동화되었겠지만,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틈이 있지 않을까.
‘Linked – in Seoul’은 서울 로컬 클럽 신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4인의 외국인과 나눈 대화를 담는다. 어둑한 밤에 더욱 큰 에너지 분출하는 이들의 낮 일상이 궁금했던 터라, 해가 중천일 때 각자 애정하는 베뉴 정문으로 불러 간단한 사진도 촬영했다. 태양 빛 아래, 4인의 초연한 모습과 대화를 하단에서 살피자.
파올라 라프(Paola Laf, 이하 P) : 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프리랜서이다. 라디오 쇼 진행, 음악과 문화에 대한 글쓰기 등을 하고 있다.
고국을 떠나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시기가 어떻게 되나.
P: 원래 이탈리아 출신인데, 서울로 이사하기 전에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었다.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유럽의 봉쇄가 매우 엄격해져서 원격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때 몇 달 동안 이탈리아로 돌아갔었다. 2015년에 서울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고, 10대 때부터 한국 음악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더불어 일본 음악과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꿈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NTS 라디오에서 일하고 있었고, 내 직업에도 너무 만족해서 실제로 퇴사하고 런던을 떠날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원격근무를 시작하면서 직장을 떠나지 않고도 이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사에게 가능한지 물었고, 상사가 승낙했다. 그래서 2021년 8월에 서울로 이사를 왔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여기에 있다.
현재 일상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듣고 싶다.
P: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이 좀 엉망이다. 요즘은 주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아직은 밝힐 수 없지만, 이탈리아의 시청자들을 위해 한국 대중 문화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Sound Supply_Service라는 국내 음악 레이블 팀에 합류했다. 또 부업으로 몇 가지 라디오 쇼를 진행하고 가끔은 기사를 쓰고 있다.
클럽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 특히 서울의 로컬 신과 관련된 바가 있으면 설명 부탁한다.
P: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클럽 문화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5년, 22살 때 영국 런던으로 이사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전에도 클럽에 가본 적은 있지만 이탈리아에서 생활을 하면서 문화가 크게 주류와 상류층인 ‘클럽 키즈 (club kids)’와 더 많은 대안과 지하층인 ‘콘서트 키즈 (concert kids)’로 나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때는 클럽에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는 ‘콘서트 키즈’였다. 하지만, 런던으로 이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당시 이탈리아처럼 문화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았고(사실 이제는 이탈리아도 그렇지는 않다), 클럽은 가장 흥미로운 대안적인 사람들과 가장 흥미로운 대안 음악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러는 동시에 나는 케이팝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영국과 유럽에서 케이팝의 명성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한국 언더그라운드 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곳에 케이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영국 신보다 한국 신이 더 언더그라운드와 메인스트림 음악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 점을 좋아한다. 런던의 음악 신은 훌륭하지만, 가끔 너무 심각하게 느껴졌다. 한국 신의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더 미친 듯이 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사랑한다. 또한 한국의 특정 클럽 주변에 커뮤니티가 강하게 형성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데, 유럽에서는 그런 느낌이 이제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케이크샵이나 ACS에 가면 파티에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아는 친구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사실이 좋다.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 대부분은 클럽에서 만났다.
Visla FM 뿐만 아니라 NTS, RadioRaheem 등, 다양한 도시의 로컬 라디오에 참여해 왔다. 베뉴에서 음악을 트는 것도 비슷한 목적이 있지만, 라디오를 통해 여러 음악을 소개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각 나라별로 라디오에서 느껴지는 차이도 있을까?
P: 물론 몇 번 틀어 본 적은 있지만, 스스로를 디제이 혹은 클럽 디제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클럽에서 트는 것보다 라디오에서 음악을 트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라디오는 클럽에서 트는 것보다 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장르를 틀 자유를 좀 더 느낄 수 있고, 사람들을 춤추게 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라디오를 통해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장면을 연결할 수 있다. 라디오는 나에게 멀리 있는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외국에 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음악 신의 연결점이 되는 것을 즐긴다. 또한 나는 다양한 종류의 라디오 쇼를 진행한 적이 있기도 하다. 말을 많이 하면서 노래를 소개하는 Radio Raheem의 모닝쇼를 진행한 적도 있고, NTS를 위해 주제나 장르를 중심으로 몇 가지 믹스를 만들기도 하는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나 자신과 나의 취향을 표현하는 믹스를 만들었다. 요즘은 두 개의 라디오 쇼를 진행하고 있다. 하나는 국내 Visla.fm 에서 월간 ‘아시다시피’라는 쇼를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Radio Alhara의 Practice라는 쇼이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언더그라운드 라디오는 NTS 라디오 형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Local scene을 대표하는 디제이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만큼 라디오가 위치한 도시에 기반해 더 다양한 장르가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라디오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공동체(local community)’를 육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만이 다른 라디오와 구별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이라고 여긴다.
클럽 튠이 아닌 음악에도 식견이 넓은 것으로 알고 있다. 본인이 가장 마음 가는 장르가 있을까? 또는 한국에서 더 퍼졌으면 하는 사운드가 있다면?
P: 클럽을 좋아하고, 클럽 음악도 좋아하지만, 다른 여러 장르도 좋아한다. 나에게는 음식과 같은 것이다. 한식, 이탈리아 음식, 일식 등을 골라 먹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댄스 음악, 앰비언트, 팝, 락, 힙합 등을 듣는다. 다른 나라의 다양한 음식을 좋아해서 한 종류의 음식에만 국한하고 싶지 않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 종류의 음악에만 국한하고 싶지 않다. 다른 종류의 음악이 각자 다른 순간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를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항상 “TOP 3” 리스트와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 특정한 장르보다는 음악에서 어떤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설명하는 게 어려운 부분이다. 내 음악 선곡을 보면 외부에서 봤을 때 이해하기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울에서 특정 음식을 찾기 힘든 것과 비슷하게 특정 장르의 음악을 다른 음악만큼 자주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장르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고, 다만 레게톤(Reggaeton)이나 덥(Dub) 같은 장르는 다른 도시에 비해 서울에 디제이와 관객이 적다고 생각하긴 한다.
제임스(James Gui, 이하 J): DJ Hotpot이자 ‘계택곤’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뉴욕 기반 디제이이자 음악 연구자로 과거와 동시대의 아시아 음악을 연결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고국을 떠나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시기가 어떻게 되나.
J: 표면적으로는 풍물이나 판소리 같은 한국 전통 타악을 배우기 위해 2021년 말, 뉴욕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원래는 대만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여행 제한 조치로 대만 비자를 신청할 수 없었고, 그래도 아시아에서 살고 싶었다. 한국이 비자 신청을 받는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에 문화예술 비자로 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성수의 허름한 고시원에서 격리 생활을 하다가 신촌 근처로 거처를 옮겼고, 나중에는 후암동과 해방촌의 경계에서 살게 되었다.
현재 일상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듣고 싶다.
J: 2023년 가을부터 뉴욕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방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서울을 몇 번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름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와 연구로 보내게 될 것 같다. 인터넷 브라우저 창에 항상 열려 있는 밴드캠프(Bandcamp) 탭이 많아서 그 탭을 다 보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클럽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 특히 서울의 로컬 신과 관련된 바가 있으면 설명 부탁한다.
J: 2021년부터 뉴욕에서 디제잉을 시작하긴 했는데, 학부 시절에는 대학 라디오 디제이로만 활동했다. 그때는 주로 펑크, 인디, 실험적인 밴드 음악을 주로 플레이했고, 팬데믹 기간 동안 Club Matryoshka, Detroit techno, Chicago house와 같은 온라인 레이브를 접하게 되었다. 졸업 후 Datafruits.fm의 온라인 라디오 쇼를 진행했고, 당시 뉴욕에 살던 나는 2021년 여름에 나이트 라이프가 재개되면서 보사노바 시빅 클럽이나 무드링 같은 브루클린 클럽에 가기 시작했다. Pirate Studio에서 추천 보너스를 쌓고 함께 덱 앞에서 놀면서 친구인 NguyendowsXP와 함께 디제잉 하는 법을 배웠다. 아직도 따로 디제이 덱을 구입하진 않았고, 주로 클럽에서 틀거나 친구들의 셋업을 빌려 연습하고 있다. 서울은 오기 전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ACS에 관심이 있었고, 박다함과 헬리콥터 레코즈는 도쿄의 K/A/T/O MASSACRE와의 Quick Massacre 협업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 밴드 Ran Cap Duoi의 Zach이 김윤기를 소개해 줬는데, 그 덕분에 효도 앤 베이스와 함께 ACS 공연에 처음으로 게스트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었다. 그날 밤의 셋리스트는 아직도 갖고 있는 것 같다. 또 자가격리 해제 첫 주에 잡지를 찾다가 우주만물(Cosmos Wholesale)에서 우연히 박다함, 박은선 씨를 만났다. 지금은 문을 닫게 되어 유감이다. 마지막으로 서울 커뮤니티 라디오는 한국 생활의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더 와이어(The Wire) 매거진에 실릴 기사를 위해 운영진인 Rich와 인터뷰를 했고, 그곳에서 열린 하이퍼 팝 파티에서 노이의 무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 첫 주에 만난 사람들은 결국 내가 이 분야에 진출하고 서울에서의 전반적인 경험을 쌓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시아인이지만 한국계 ‘교포’가 아니고, 그렇지만 누구보다 한국의 음악에 대해 잘 알고, 그래서 한국인으로 오해받은 적도 많다. 그만큼 처음 당도했을 때부터 빠르게 서울 신에 흡수된 것처럼 느껴진다.
J: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글을 조금 아는 것 외에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다. 의사소통에 실패할 때마다 생기는 답답함이 너무 싫어서 한국어에 몰입하고 배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지금은 한국 사람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그게 웃기기도 하지만,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 전에 밴드캠프에 올린 글에 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썼는데, 여기에 링크하겠다. 한국 음악을 많이 안다는 점에 관해서는, 항상 스스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긴 한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기꺼이 많은 추천을 해준 한국 친구들 덕분이다.
현재는 학업을 위해 떠나 있다. 혹시 완전히 돌아올 예정이 있는지, 또는 서울에서 더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J: 완전히 돌아오고 싶지만, 학위 프로그램이 너무 길다. 내년에 1년 동안 집중적으로 어학연수를 하면서 한국어를 제대로 익히고 싶지만, 학위를 받기 전까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간헐적으로 방문할 계획이다. 10년 후에 한국에서 교수직을 맡게 될지 누가 알겠나(웃음). 하지만 서울에 있는 동안 신도시의 연례 파티, 은선씨의 을지로 젠트리피케이션 반대 행사 등 많은 기회를 얻었던 것 같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나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 준 현장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다. 언젠가는 아티스트, 뮤지션, 활동가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싶다. 최근 전주에 작은 신이 형성되고 있는 후로기오피스(froggy office)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사장님이 나보다 어려서 놀랐다!
마지(Maze, 이하 MZ): 통번역부터 콘텐츠 크리에이터, 바텐딩 등 다양하게 활동을 했었고, 최근에는 루키 프로듀서이자 디제이로 활동하고 있다.
고국을 떠나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시기가 어떻게 되나.
MZ: 나는 이란 출신이고, 2019년 9월에 어학연수로 처음 한국에 왔다. 그 전에 2016년부터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고, 이란에서 한국어와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조금씩 하면서 돈을 모았고 결국은 한국으로 유학 오기로 결정했다. 6개월 정도 살아보고 나니 한국에서 사는 게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아서 대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20년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현재는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다.
현재 일상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듣고 싶다.
MZ: 평일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집중하고 있고, 틈틈이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고양이들이랑 작은 원룸에 살고 있는데 나름 외롭지 않고 괜찮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과 아기들(고양이들)이랑 시간 보내는 것이 나만의 힐링 시간이다. 주말에는 클럽에서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음악 작업을 하거나 이태원에 놀러 가거나 한다.
클럽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 특히 서울의 로컬 신과 관련된 바가 있으면 설명 부탁한다.
MZ: 코로나가 어느 정도 풀리고 나서 친구들이랑 피스틸하고 링에 자주 갔던 것 같다. 일반 클럽은 성적인 목적만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전까지는 클럽 문화를 별로 안 좋아했었다. 한국에서 처음 방문했던 클럽이 2019년 여름, 홍대 클럽 거리에 있는 어떤 클럽이었는데 솔직히 술이 제일 중심이었던 것 같다. 그때 문득, 만약 여기서 술을 안 팔았으면 아무도 이 공간에 관심 없었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항상 인간관계에서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의미 없고 얕은 대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에 다녔던 클럽들은 솔직히 그런 것들로 가득 찼던 것 같다. 외모, 자산, 술 같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임시적인 완화를 추구하는 것이 너무나 잘 눈에 보였다. 근데 반대로 ‘레이브’ 신에서는, 웃긴 얘기긴 하지만 내가 한국에 있으면서 쌓은 제일 깊은 관계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너무나 다른 두 가지의 공간들이 같은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이제는 거의 웃기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특히 피스틸 같은 공간에서는 무엇보다 음악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여서 그 점이 좋았다. 그 후 몇 개월 지난 후 구인 공고가 올라온 것을 보고 지원해서 피스틸이랑 케이크샵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년 정도 일하고 커뮤니티에도 어울리면서 이란에서 살았을 때랑 180도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 같다.
케이크샵에서 오랫동안 스태프로 일했고 현재는 아르가에서 일하고 있다. 클럽에서 스태프로 일할 때와 디제이로 참여하는 건 참 다른 기분일 것 같다.
MZ: 케이크샵은 내가 사랑하는 베뉴 중 한 곳인데, 역사로 따져도 10년이 넘는 클럽이다. 스태프로 일할 때는 솔직히 힘들 때가 없지는 않았는데, 대부분의 디제이가 스태프들을 존중해주고, 맛있는 것도 챙겨주고… 좋은 추억들이 많다. 특히 언급하자면 나는 케이크샵에서 Ligrye랑 7ip7o3님의 음악을 처음 듣고 디제잉에 관심이 생겼었다. 이들이 거의 내 롤모델이라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존경하고 있다. 앞으로, 디제이로 활동할 때 이분들과 같이, 좋은 마인드로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게 나의 바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미디 프로그램을 갖고 노는걸 즐겨 했다고 들었는데. 디제잉뿐만 아니라 프로듀싱에도 욕심이 있나? 프로듀서로 계획이 있다면?
MZ: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살고 싶은 인생이 나의 실제 상황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느꼈다. 알다시피 이란은 보수적인 나라이고, 동성애자인 나에게는 거의 감옥이랑 다름이 없었다. 특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가면을 쓰듯이 살았고, 유일하게 자유롭게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음악이였다. 그때는 거의 항상 하교하고 바로 컴퓨터에서 온라인 K-pop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특히 라니아(RaNia)라는 아이돌 그룹의 팬 사이트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때는 매주 친구들이랑 연습실 잡아서 댄스 커버를 해보기도 하고, 어학원에 등록해서 한국어도 배우면서 거의 4년 동안은 한국 유학이 꿈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취미들이 나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대처 방식이었달까. 그때 케이팝 리믹스도 자주 올리고 그랬는데, 당장은 돈이 안 되니까 거의 5~6년 동안 활동을 멈췄었다. 근데 돌이켜보니까 그때가 정말 행복했던 것 같다. 다시 그때처럼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요즘에 다시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 프로듀싱하고 디제잉은 둘 다 똑같이 나에게 중요한데, 요즘은 디제잉보다 프로듀싱에 시간 투자를 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아마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사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나라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져서 후회는 없다.
마리아나(Mariana, 이하 MA): 핸드포크 타투이스트이자 전통적인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고국을 떠나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시기가 어떻게 되나.
MA: 한국으로 온 것이 혼자서 해외에 간 것도 처음이고, 다른 나라로 간 것도 처음이었다. 원래는 어학원을 몇 학기 다니고 다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2024년 5월이면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5년이 된다. 삶은 예측할 수 없어서 미래가 아무리 걱정되더라도 여전히 이곳을 사랑한다. 첫사랑, 진정한 우정, 부끄러움, 성취에 대한 자부심 등 청춘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서울에서 경험했고 지금의 나로 서서히 성숙해 가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 고국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안전과 수용성 때문이었다.
현재 일상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듣고 싶다.
MA: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개선하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 중이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아직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어떤 취미를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시켜야 할지와 같은 것들이다. 항상 수익을 위해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면 때로는 온전히 그 경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 훗날 후회 없이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 이 땅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 외에도, 타투를 하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재미는 이곳에 오기 전에도 나의 열정이 향하는 곳이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재능 있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시도하고 또 할 수 있을지 매번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클럽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 특히 서울의 로컬 신과 관련된 바가 있으면 설명 부탁한다.
MA: 서울에 오기 전에도 음악과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도 없었고 또 밤에 혼자 외출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오면서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 오니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며 벽에만 갇혀 있지 말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물론 외로웠지만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금까지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무언가를 얻을 모든 기회에 열려 있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이 혼자 사는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얄팍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람을 이용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인연은 진심이었고, 모든 만남을 진심으로 즐겼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외출하는 것이 성적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배운 것을 실제로 연습하면서 반에 있는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빨리 언어를 배우기도 했다.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다 보면 ‘어딜가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본인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는 게 있나?
MA: 스스로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곳에 머무르는 일이 드물기도 하고, 가끔은 무언가를 놓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기 때문일 수도, 격렬한 ADHD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기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한다고 해서 잃는 것은 없으니까. 새롭게 좋아하는 디제이를 발견하거나 삶의 방식을 바꿀 가장 우연한 만남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것에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살아있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요즘 내가 즐기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발견했다. 예를 들면, 2019년 금요일 새벽 5시에 무작정 들렀던 클럽 볼노스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중 하나이다. 친구 중 한 명이 데리고 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강렬한 스트로보 조명과 어둡고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내가 좋아하지만 이전에 방문했던 다른 어떤 공연장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었다. 그날 이후로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파티의 에너지를 계속 이어가며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공간의 주인, 직원, 단골손님들로부터 항상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단순한 손님이라는 느낌에서 커뮤니티에 대한 소속감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포스터도 가끔 만드는걸 봤고, 프로모터 역할 역시 여러 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창작자로써, 그리고 레이버로써 지금의 서울 신에 대한 소감이 어떤지 궁금하다.
MA: 이벤트의 공간이나 구조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군중의 변화가 눈에 띈다. 안타깝게도 팬데믹이 레이브 현장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연장, 아티스트, 고객,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하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서울 나이트 라이프의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생겼다. 또한, 지금은 예전에 비해 새로운 인맥을 쌓는 것이 조금 더 어려워졌다. 솔직히 그 시절의 기억은 백일몽처럼 느껴진다. 요즘에 느끼는 점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파티나 장소를 찾을 수 있다. 틈새 숨겨진 이벤트부터 창고 레이브까지. 그러나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요즘에는 더 이상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급진적인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물론 한 분야에 몇 년 이상 종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왠지 모르게 지루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현실은 이러하고, 현재 신에 대한 불만이 너무 강하다면 더 나은 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결국 그 당시에는 그저 평범한 방문객이었던 사람 중 일부는 현장에 기여하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내가 2022년에 처음으로 홍보 플라이어를 제작하게 된 것처럼. 그 이후에 나의 스타일과 본인의 비전이 맞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기 시작했고,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크리에이터의 시대에도 아날로그 아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은 혼자서 이벤트를 만드는 것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 중이다.
요즘 눈에 띄는 이벤트를 추천해야 한다면, 볼노스트에서 진행된는 “DEB”, “통곡의 밤”, “환락”, “트랜센던스”, “마인드노마드” 등이 있을 것이다. 좀 더 하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P.T.S.D.”는 요즘 음악적으로 가장 미친 파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Quick-Die”를 진심으로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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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aola Laf, James Gui, Maze, Mariana
Photographer | 한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