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ystal Castles의 혼돈 속 아름다운 사운드를 돌아보며

짙은 스모키 화장과 퇴폐적인 복장으로 강렬한 라이브를 선보인 앨리스 글래스(Alice Glass), 그녀가 속했던 캐나다 출신의 전자음악 밴드 크리스탈 캐슬(Crystal Castles). 크리스탈 캐슬은 밴드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보컬 앨리스 글래스가 탈퇴하기 전까지 전자음악계의 이단아로 불리며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크리스탈 캐슬은 프로듀서 이든 캐스(Ethan Kath)와 보컬리스트 앨리스 글래스가 함께 2006년 토론토에서 결성한 밴드다. 이들의 음악은 간혹 위치 하우스(Witch House)로 분류되긴 하지만 하나의 장르로 규정할 수 없다. 칩튠(Chiptune), 글리치(Glitch), 펑크(Punk) 등 다양한 장르가 혼재되어 있으며, 불협화음으로 느껴질 법한 ‘카오스’와 같은 사운드를 통해 전자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받는다.

이든 캐스의 8비트 신디사이저와 앨리스 글래스의 해독하기 어려운 분노로 가득 찬(귀신 들린 듯한) 보컬이 완벽하게 결합한 사운드는 열렬한 광신도를 양산했고 전자음악계에 한 획을 그었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 크리스탈 캐슬을 “Baptism” 뮤직비디오로 처음 접했고 압도적인 영상미와 사운드에 매료되어 단숨에 팬이 되었다.

이번 피쳐에서는 앨리스 글래스가 크리스탈 캐슬을 탈퇴하기 전까지 밴드가 구축한 혼란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유산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굳이 특정 시기까지를 다루는 이유는 앨리스 글래스의 탈퇴로 인해 크리스탈 캐슬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든 캐스의 천재적인 프로듀싱이 빛을 발한 건 앨리스 글래스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니 말이다.


영국 인기 드라마 Skins 속 “Alice Practice” 공연 장면

크리스탈 캐슬의 시작(2003-2008)

다양한 펑크와 실험적인 음악 프로젝트에 참여해 온 이든 캐스는 앨리스 글래스의 신비롭고 독특한 보컬을 처음 듣고 그녀가 전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함께 열어갈 동료임을 확신했다. 이든 캐스는 2003년부터 작업한 앨범의 보컬을 맡아 달라고 앨리스 글래스에게 제안했고, 이들은 곧 비공개 녹음을 시작했다. 이 작업의 결과물은 2005년, 이든 캐스가 밴드 이름인 ‘Crystal Castles’로 마이스페이스(Myspace)에 업로드하면서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참고로 밴드명 ‘Crystal Castles’은 1985년작 미국 애니메이션 “The Secret of the Sword”에서 캐릭터 ‘She-Ra’의 장난감 성 광고 CM송 가사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고 한다.

마이스페이스에 업로드한 곡 “Magic Spells”, “Untrust Us”, “Alice Practice”는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며 점차 유명해졌다. 수수께끼 같은 듀오는 음악만 공개할 뿐 미디어를 기피하고, 온라인을 통한 개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실명과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스크를 쓰거나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등 극도의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하며 초기 팬을 열광시키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

특히 “Alice Practice”는 크리스탈 캐슬 초기 커리어의 상징적인 트랙이다. 이 곡은 강렬한 신디사이저와 왜곡된 보컬이 어우러져, 일렉트로니카와 글리치 요소가 강렬하게 혼합된 공격적인 사운드를 보여준다. 후에 “Alice Practice”는 영국의 인기 드라마 “스킨스(Skins)”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크리스탈 캐슬이 직접 연주하는 장면이 드라마에 삽입되면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해당 곡이 탄생한 데에는 독특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밴드 초기, 앨리스 글래스가 스튜디오 세션에서 프로듀서 이든 캐스가 만든 루프를 사용해 마이크를 테스트하던 중, 음향 기술자가 실수로 녹음 버튼을 누르며 우연히 녹음된 사운드를 그대로 사용한 것. 하지만 훗날 앨리스 글래스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며, 자신이 밴드에 기여한 바를 축소하려는 모함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규 1집 [Crystal Castles]

“Alice Practice”의 예상치 못한 성공은 2006년, 크리스탈 캐슬의 첫 EP [Alice Practice]의 발매로 이어졌다. 이 EP는 500장 한정으로 출시되었으며, 단 3일 만에 매진됐다. 그 후 2008년 밴드는 첫 정규 앨범 [Crystal Castles]을 발매했다. 크리스탈 캐슬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혁신적인 에너지와 사운드로 비평가와 대중 모두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첫 정규 앨범에는 “Alice Practice”를 비롯해 “Crimewave”, “Courtship Dating”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노이즈가 가미된 8비트 사운드와 앨리스 글래스의 분노에 찬 비명 같은 보컬이 거칠게 어우러진 사운드를 보여준다.

당시 주류 팝 음악이 오토튠을 사용해 보컬의 결점을 가리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면, 앨리스 글래스는 오토튠을 통해 결점을 숨기는 대신, 과격한 보컬 스타일을 글리치적인 요소와 함께 증폭시키는 등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


정규 2집 [Crystal Castles (II)]

2집 앨범과 함께 진화한 사운드(2009-2012)

성공적인 데뷔 앨범 이후, 크리스탈 캐슬은 장르 팬의 열렬한 지지 속에 영향력을 점차 확대했다. 그리고 2010년, 그들은 두 번째 앨범 [Crystal Castles (II)]를 발매하며 한층 진화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첫 번째 정규 앨범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사운드가 특징이었다면, 두 번째 앨범은 슈게이징 요소 등을 도입하여 초기 스타일을 확장하면서 절제된 깊이를 보여주었다. 여전히 ‘크리스탈 캐슬스러운’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트랙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는 등 크리스탈 캐슬 앨범 중 가장 사랑받은 앨범이라 할 수 있다.

2집은 앨범 아트로도 화제가 되었다. 얼핏 소녀로 보이는 해당 이미지의 주인공은 실제 소년으로, 증조할머니의 묘소를 방문한 모습을 촬영했다. 기묘한 앨범 커버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추측을 불러일으켰고 크리스탈 캐슬만의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제대로 담은 앨범 커버다.

대부분의 [Crystal Castles (II)]의 수록곡은 아이슬란드의 난방이 안 되는 버려진 교회에서 한겨울에 녹음됐다. 음반 녹음 장소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곳이지만 이들에게는 앨범의 분위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 이외에도 온타리오 북부에 위치한 오두막, 디트로이트에 버려진 약국 뒤 차고, 런던에 위치한 스튜디오 등 이들의 음악만큼이나 이색적인 장소에서 녹음된 트랙이 앨범을 채웠다.

대표곡으로는 “Celestica”, 밴드 더 큐어(The Cure)의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가 보컬로 참여한 “Not in Love”, 그리고 “Baptism”이 있다.

“Baptism”과 같은 경우 크리스탈 캐슬의 공연에서 큰 호응을 얻는 곡으로, 그들의 시그니처 트랙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것처럼, “Baptism”은 비주얼적으로도 강렬한 펑크 에너지를 보여주는 등 전자음악 신(Scene)에서 크리스탈 캐슬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각인시킨 트랙이다.


음악만큼 과격한 라이브 공연

크리스탈 캐슬이 팬을 열광시킨 데에는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이들의 과격한 라이브 공연도 한 몫했을 테다. 앨리스 글래스의 절규하는 듯한 보컬은 관객을 극도의 흥분 상태로 몰아넣고, 그녀가 스테이지 다이브를 할 때마다 관객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앨리스 글래스는 심지어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상태에서도 폭발적인 라이브 퍼포먼스를 펼치는 등 팬들의 호응에 부응하는 무대를 펼쳤다.

그러나 밴드의 공연은 종종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활동 초기, 영국 런던의 한 레코드 가게에서 공연 당시 넘쳐나는 관객으로 인해 선반이 부서지고 쓰레기통이 뒤집어지는 난동이 벌어졌는데, 앨리스 글래스 역시 관객, 보안요원과 직접 주먹다짐을 벌인 것. LA에서 열린 한 콘서트 애프터 파티에서는 상황이 폭동 수준에 이르러, 경찰이 헬리콥터를 동원해 파티 참석자를 해산시키는 일까지 발생했다.

팬이나 보안요원에게 먼저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벌어지는 등 상식을 벗어난 행동들을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사운드에 걸맞은 폭력적인 퍼포먼스(?)는 오히려 크리스탈 캐슬의 상징이 되었다. ‘Crystal Castles fights’라는 모음집이 있을 정도로, 이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공연으로도 항상 화제의 중심에 섰다.


정규 3집 [(III)]

3번째 정규 앨범과 앨리스 글래스의 탈퇴(2012-2014)

2012년 크리스탈 캐슬은 세 번째 앨범 [(III)]를 발매했다. 전작에 비해서 사운드가 강렬하지는 않지만 “Plague”, “Kerosene”과 “Sad Eyes”와 같은 트랙들을 필두로 역시나 대중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정규 3집 제작을 위해 이든 캐스는 기존의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모든 장비를 교체했는데, 스튜디오에서 컴퓨터, 디지털 장비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등 전적으로 아날로그 장비를 활용해 작업을 완성했다. 이 덕분인지, 전작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빈티지한 느낌의 앨범이 탄생, 결과적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을 통한 특유의 텍스처가 느껴지는 앨범이 발매됐다. 피치포크 평점도 8점대로 호평을 받은 편.

3집 앨범 아트 원본

3집 앨범 아트 또한 독보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앨범 아트의 원본은 사진작가 사무엘 아란다(Samuel Aranda)의 작품이며 해당 작품에 효과를 넣어 재가공했다. 2011년 10월 15일 예멘 사나에서 거리 시위 도중 최루탄에 노출된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포착한 사진이다.

전작들과의 차별점은 사회적 불평등, 인권 침해, 개인의 고통 등 깊이 있는 주제를 가사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1집과 2집에 비해 사운드적인 임팩트는 덜하지만, 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현대의 암울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오히려 종말론적인 느낌을 가감 없이 담은 앨범이라 할 수 있다.

3집의 호평과 함께 다양한 페스티벌에 무대에 오르던 와중 2014년 10월, 앨리스 글래스는 개인적인 이유와 솔로 커리어를 위해 크리스탈 캐슬을 떠난다고 돌연 발표했다. 많은 팬이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그녀의 탈퇴는 크리스탈 캐슬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듯 보였다. 단 3장의 정규 앨범만을 남기고 떠난 앨리스 글래스, 크리스탈 캐슬이 계속 유지될지 아니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에 대한 무수한 추측만 남았다.


크리스탈 캐슬 내한 공연(2017)

크리스탈 캐슬이 2017년 서울을 찾았다. 홍대에 위치한 ‘무브홀’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는데, 앨리스 글래스가 탈퇴한 후 새로운 멤버인 에디스 프란시스(Edith Frances)가 모습을 보여 팬들은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앨리스 글래스 탈퇴와 관련된 논란

크리스탈 캐슬은 과거부터 수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가장 논란인 것은 역시나 앨리스 글래스의 탈퇴 사유였다. 2017년, 앨리스 글래스는 이든 캐스가 자신을 성적,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이유로 탈퇴했다고 밝히며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또한 이든 캐스가 앨리스 글래스의 밴드에 대한 기여도를 폄하하며 앨리스 글래스가 강하게 반발하는 등 크리스탈 캐슬을 둘러싼 논란은 팬의 실망감으로 이어졌고 음악 업계에 도사리고 있던 학대와 착취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그녀의 탈퇴는 이미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2013 롤라팔루자(Lollapalooza)’에서 “Crime Wave”를 시작하기 전, 앨리스는 여러 레이어의 보컬 변조를 통해 뚜렷하게 들리지 않는 상태로 관중을 향해 “거짓말, 거짓말, 모든 것이 잔인하고 모든 것이 거짓이고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라고 읊조렸다.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 이미 탈퇴를 암시한 것이 아닐지 추측된다.


혼란하고도 아름다운 유산

앨리스 글래스의 탈퇴 후 이든 캐스는 크리스탈 캐슬을 유지하며, 새로운 보컬리스트로 에디스 프란시스(Edith Frances)를 영입했다. 그 후 네 번째 앨범 [Amnesty (I)]를 2016년에 발매했지만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새로 영입한 보컬리스트 역시 스타일적으로 앨리스 글래스의 분위기를 띠려 노력했으나, 역시나 원조의 아우라는 따라갈 수 없다는 평.

마이스페이스에서부터 시작해 전자 음악 신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크리스탈 캐슬. 펑크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8비트 신디사이저와 글리치한 로우파이 미학이 결합한 독보적인 스타일은 전자음악 신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아도 충분하다.

획기적인 사운드, 사운드를 적절하게 시각화한 혼돈 자체인 뮤직비디오, 광기에 휩싸인 강렬한 라이브, 이면에 담긴 철학까지 크리스탈 캐슬이 세상에 내놓은 업적은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Crystal Castles 공식 유튜브 채널


이미지 출처 ㅣ Crystal Castles, NME, Supercolorsuper, Samuel Ar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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