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감각을 몽환적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Teng Yung Han

“당신 없이는 못 살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가장 익숙하고 농후한 이 거짓말은 때로는 가장 순수한 진심의 말이 되기도 한다. 패티김이 “그대 없이는 못 살아”라는 노래로 태양이 돌고 있는 한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듯, 이 대사에 관한 여러 변형 기출이 있지만 드라마, 영화, 음악을 넘나들며 오랜 세월 사랑을 전하는 클리셰 중의 클리셰 같은 말로 자리해 왔다. 이런 사탕발린 멘트가 종국에는 거짓으로 드러날지라도, 당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애정 어린 말이니 어느 쪽이든 ‘당신’의 입장으로선 손해보지 않은 따뜻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본 한 전시의 타이틀은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이젠 당신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과감히 선포한다. 그리고 날린 ‘안녕’이라는 최후의 통첩까지.

오는 23일까지 용산구 후암동 언덕에 위치한 전시장 마이크로 서비스(Micro Service)에서 진행되는 대만 출신 아티스트 한텡융(Teng Yung Han)의 전시 ‘Finally, I Could Live Without You: 안녕’의 이야기다. 어릴 적 상상 속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작품 세계를 키워온 한텡융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영혼, 꿈 같이 몽환적인 풍경, 의인화된 동물과 식물을 그만의 유순한 스타일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페인팅, 드로잉, 세라믹 등 20여 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며 이중 다수가 첫 서울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됐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다채로운 페르소나에 어떤 자아가 담겼는지,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강단 있는 타이틀과는 정반대의 솜사탕 같은 그림을 그려내는 그의 이야기를 함께해 보자.


만나서 반갑다. 한국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대만에서 온 한텡융이라고 한다. 한이라고 불러도 좋다. 23일까지 마이크로 서비스에서 전시를 열고 있고, 한국에서의 첫 전시라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이번 진행되는 전시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나. 타이틀 ‘Finally, I Could Live Without You: 안녕’이 약간 우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내 갤러리 파트너는 전시 타이틀을 처음 듣고 내가 이별을 겪은 줄 알았다고 하더라. 사실 이 문장은 연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소중한 어떤 것이든 결국에는 상실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니까. 만남과 이별은 음과 양처럼 현실의 두 얼굴 아닌가. 이별이라는 단어가 슬프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이걸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언젠가는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모두가 그런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이번 전시에 담았다.

두 캐릭터가 아련하게 보이는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순수하면서도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A Starry Night’은 어떤 작품인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본능적인 작품이다. 이번 유화 작품들은 예비 스케치를 전혀 하지 않고 완성했다. 그저 흐름을 따라가며 어디로 이끌어지는지 관찰하고 발견했다. ‘A Starry Night’ 역시 추가적인 수정이나 다듬는 과정 없이 한 번에 그렸다. 내가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며 작업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창문 수리 기사님의 말소리, 매미가 부드럽게 우는 소리가 어우러졌는데 듣고 있자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우울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으니까. 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이번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은 전시를 위해 제작됐다고 들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설정한 테마가 있는지.

2년 전 개인전을 위해 뉴욕에 갔을 때 친구와 묘지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다. 서양에서는 묘지가 어둡거나 금기시되는 장소라기보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곳이다.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는데, 나는 그 넓은 묘지에서 유일한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햇살은 눈부시게 밝아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고, 그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육체가 없을지언정 사람들 간의 유대는 단절되지 않았고, 그게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이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 무덤 옆에 웅크리고 울었다. 눈앞에 솔방울이 아름답게 흩어져 있던 게 기억난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 감정을 처리하고 다른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게 바로 이번 전시 ‘Finally, I Could Live Without You: 안녕’의 작품들이다.

파스텔컬러를 주된 색채로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장면들 그리고 환상 속 캐릭터들이 작품에 주로 등장한다. 그림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난 기억력이 정말 나쁜 사람이다. 내가 본 영화나 읽은 책, 들었던 음악을 기억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예 처음 본 것으로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들이 다시 내 마음속에 떠오르거나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에 다른 형태로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순간이 정말 많지 않나. 슬픔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반대로 아름다움이 추할 수도 있고. 옭고 그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삶을 찬미하고 진실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다.

도교(Taoist) 철학을 바탕으로 추상화된 캐릭터를 탄생시킨다는 도록 설명이 재밌다. 이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도(Dao)’는 내 생각 속에 있고, 캐릭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상징 같은 존재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선, 색감, 감각, 풍경의 조각 혹은 그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그냥 뭔가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만들어 낸 캐릭터들끼리의 상호작용도 있을 것 같은데, 캐릭터들 간의 이야기가 있다면?

내 생각을 나도 모르겠는데 캐릭터가 생각하는 걸 어떻게 알겠나. 누군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이 좀 무섭게 느껴질 것 같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감정은 진짜다. 나는 이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캐릭터와 이야기하는 걸 즐기고, 이때 예기치 못한 상호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나를 웃게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거나 중요한 순간에 왜 입을 꾹 닫은 현자로 변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나. 나는 내 캐릭터에게서 배움을 얻고 이들을 존경한다. 그들을 사랑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진 못할 거다.

스토리텔리에도 재능이 있어 보인다. 동화를 만드는 일에도 소질이 있을 것 같은데, 도전해 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스토리텔링은 내게 어려운 영역이다. 만화나 그림책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과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경우가 많다. 이야기했듯이 내 기억력이 좋지 않은 데다, 연속성이 필요한 작업은 버겁다.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게 어렵기도 한데, 이게 꽤 답답하다. 반면에 그림, 페인팅을 통해서는 내 모든 감정과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상당히 실질적인 문제다. 연속적인 형태의 작업물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모든 형태의 창작은 매력적이니까. 서사를 전달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효과가 없을 때 종종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는데, 직관적일수록 보통 결과가 더 좋더라.

주로 어떤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로 그림을 활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번 전시 전까지 그림을 꽤 오래 쉬었었다. 그림은 내 직업이자 열정의 원천이기도 한데, 일련의 상업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리는 데 몰두하기도 하고, 창작을 잠시 중단하고 그 후에 오는 미지의 것을 즐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종종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하지. ‘Finally, I Could Live Without You: 안녕’를 준비하며 온전히 이 과정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정말 행복했다. 마치 미지의 것과 깊이 사랑에 빠진 것 같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림 외에도 세라믹 작업도 진행하고 있는데, 2D를 3D로 확장하게 된 계기가 있나.

원래는 세라믹으로 작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절친한 친구가 세라믹 스튜디오를 열어 한 번 해볼 생각 없냐고 묻더라. 내가 세라믹이라는 매체에 반하는 데는 그때의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그전까지는 작은 인형을 만드는 것을 즐겼지만, 세라믹은 또 다르더라.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고, 유약의 예측 불가능성이 나를 설레게 한다. 게다가, 3D 작업을 하며 창조와 영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점토를 빚을 때, 내 정신과 영혼의 일부를 그 안에 넣는 느낌이랄까. 신과 인간, 또는 인간과 그들이 만든 것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지 않나?

‘MY LOVELY CHAIRS’도 그렇고 ‘The Angel’s Riddle’도 그렇고 책/진 등의 출판물 제작에도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 맞게 본 걸까?

내가 가장 생산적인 시기에는 1년에 여러 개의 잡지를 만들 수 있었다. 마치 토해내는 것처럼. 그때는 생존 수단으로 창작에 크게 의존했던 것 같다. 내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바랐지만, 내 세계에 나를 가두고 단절된 채로 지냈다. 지금은 작업 속도를 늦추려 노력하고 있다. 자체 출판보다는 협업 출판을 선호하는 편인데, 창작자와 독자의 관점이 다르기도 하고, 독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DIY 정신은 여전히 ​​내게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가장 좋아하는 책을 한 권만 꼽는다면?

하나만 꼽기가 정말 힘들지만 굳이 고르자면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Sculpting in Time’. 몇 줄만 읽고도 계속해서 읽고 싶은 욕구가 들더라. 물론 그의 영화 “Stalker”도 정말 좋아한다.

정말 많은 일들을 해온 듯하다. 당신의 어린 시절이 문득 궁금해진다. 어떤 것에 빠져 시간을 보냈나.

학교에서는 행복하고 활기찬 아이였지만 사실은 슬프고 외롭기도 했다. 집에 와서는 TV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만화책을 읽었고, 그림책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외 시간은 온통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내 존재 자체가 그림에 소비된 느낌까지 들었다. 외동으로 자라서 이야기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부모님은 일로 바빠 정서적으로 기댈 곳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는데 이게 나와 꽤 독성이 강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빌어에 말하고 싶다. 마침내 당신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사실 아직 노력 중이다. 사랑은 잔인할 수 있으니까).

어른이 된 지금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일이 있다면?

진실, 선함, 아름다움.

샬롬 클럽(Shalom Club)이나 오피스 키코(Office Kiko) 등의 패션 브랜도와도 협업을 했었고, 카페트나 인형으로도 작업물이 선보여졌다. 옷이나 액세서리 외에 도전하고 싶은 매개체가 있나? 새롭게 캔버스 삼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알려달라.

의자를 좋아해서 의자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 어떤 가구든 재밌을 것 같다.

한텐융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


Photographer | 전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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