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서 성공을 찾는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Failed Utopia’

굵직한 브랜드의 팀 라이더와 스폰, 해외 투어, 거기서 이어지는 멋들어진 스케이트 파트까지. 이민혁은 스케이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다양한 활동을 척척 이루며, 그 전성기를 계속해 갱신해 나가고 있다.

이렇듯 무수한 활동으로 스케이트보드 신(Scene) 내 진한 족적을 남겨온 그가 작년 자신의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런칭했다. 페일드 유토피아(Failed Utopia), 스케이터로서 탄탄한 커리어로 성공 가도를 달려온 친구이기에 그 이름이 괜히 더 의뭉스레 느껴진다.

실패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내고, 그 과정을 사랑하자는 이민혁, 브랜드로 전하는 메시지 말고도 할 말이 많아 보였던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 대답은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간단한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세이버(Savour Skate) 팀 라이더이자 페일드 유토피아(FAILED UTOPIA)라는 브랜드를 하고 있는 만 25세 이민혁이라고 한다. 

페일드 유토피아는 혼자 진행하고 있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브랜드라 지금은 여러 사람과의 협업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우린 누구에게나 열려있거든.

오랜 시간 보드 타는 모습을 봐왔지만, 브랜드를 전개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렸을 때는 팔라스 스케이트보드(Palace Skateboards)나 퍼킹어썸(FUCKING AWESOME), CALL ME 917, 리무진(RIMOUSINE)과 같은 스케이트보드 브랜드의 비디오를 보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프로처럼 보드를 잘 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팀에 들어가 스폰을 받으며 활동하다 보니 한국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있는 팀을 꾸리고 싶었고, 그런 걸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브랜드를 해보고 싶었다. 그저 생각으로만 머물다 필르머이자 디제이로 활동 중인 김찬영이란 친구를 만나고 필르밍을 비롯한 여러 도움을 받으며 페일드 유토피아를 시작하게 됐다.

ph. 이주상

페일드 유토피아란 네이밍은 어떻게 탄생했나?

브랜드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떠오르는 이름이 없더라. 고양이나 강아지 이름은 잘 짓는데 브랜드 이름을 정하려고 하니까 쉽지 않더라고. 하하.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 보자고 생각했다. 과거의 건축 양식인 브루탈리즘(Brutalism)이나 러시안 두머 믹스(Russian Doomer Mix) 영상에 나오는 이미지같이 거친 노출 시멘트와 회색빛의 삭막한 도시 전경이 떠올랐고 그 느낌과 잘 맞는 페일드 유토피아란 이름이 탄생한 거다. 당시 후보군 중 하나였던 유토피아와 상반되는 이미지라서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브랜드 이름을 듣고 거북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반응을 보니까 더 바꾸기 싫어졌다. 언젠가 페일드 유토피아란 이름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언젠가는 이 이름이 멋있게 들릴 날이 올 수도 있겠지. ‘Fail’이란 단어 자체도 마음에 든다. 스케이터라면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지 않나. 우리 모두 실패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예상외로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브랜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지.

스케이트보드 기술을 연습할 때, 수백수천 번 실패하다가 원하는 기술을 딱 한 번 탔을 때 느끼는 쾌감도 있을 테고, 막상 탔는데 자신이 원했던 느낌과 달라서 만족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결국은 실패 속에서 얻어지는 경험들이다. 사람들이 실패라는 단어를 싫어하는데, 모든 것은 실패 속에서 이뤄진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과정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상향에 가까워져도 본인이 상상했던 것과 다르면 허탈감을 느끼기도 하니까.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건 부정 속에서 긍정을 찾자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스케이터 이민혁이 느꼈던 허탈감은 무엇이었나?

스케이트 팀에 소속되어 공식적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상향이 되고자 했었다. 좋아하는 스케이터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 하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었지. 그러다 보니 스케이트 신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그 이상향과 가깝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많고, 우쭐할 때도 많았다. 근데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더라. 오히려 그 길 뒤에 가려진 복잡한 갈래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큰 허탈감을 느꼈다. 스케이트 비디오를 찍으러 스팟에 가도 의무감과 책임감에서 나오는 스트레스와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에 대한 짜증만 커졌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닌, 진짜 내 스타일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디자인적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

처음 출시한 페일드 유토피아 레터링 디자인은 당시 내가 꽂혔던 삼각형을 아이디어 삼아 만들었다. 삼각형이라는 게 모든 평면 도형의 시작이자, 기본 단위잖아. 그런 의미가 좋았다. 사실, 영감이랄 것도 없는 게 예전에 그려놨던 그림을 디자인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미술이나 디자인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일단은 느낌대로 그려보고,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다는 느낌으로 심폐 소생하는 거지. 

곧 출시되는 티셔츠도 그렇게 디자인한 건가.

맞다. 모나미 볼펜 한 자루로 그린 디자인이다. 이번에도 시간 때우려고 노트 위에 끼적거린 그림을 디자인으로 승화한 거다. 모나미 볼펜이 보급형 볼펜의 대명사잖아? 잉크 찌꺼기도 많이 묻어 나오고. 근데, 난 그런 거친 느낌이 좋더라. 그래서 그 질감을 최대한 살려 스캔한 뒤 티셔츠 위에 올려봤다.

뤄썸(RVVSM), 세이버 스케이트샵(Savour Skateshop)과 같은 로컬 스케이트보드 숍에서 일하며, 다채로운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접했다. 이런 경험이 지금의 브랜드 운영에도 도움이 되고 있나?

뤄썸은 스케이트보드뿐 아니라 음악,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내 취향을 단단히 해줬다. 세이버 스케이트샵에서는 스케이트보드에 관한 지식과 정보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지. 두 숍에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평소 좋아하는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이야기해줄 수 있나.

클로즈도어(CLOSEDOOR), 크러스티(Crusty)와 같은 국내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좋아한다. 페일드 유토피아와 같은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브랜드들. 앞서 말한 두 브랜드는 우리보다 더 일찍 시작했고, 그들의 행보에서 배울 점 또한 많다. 해외 브랜드로는 리모진(Limosine)이 디자인도 잘 뽑고 멋있다. 퍽킹어썸(Fucking Awesome), 하키(HOCKEY)도 예전부터 좋아했고. 패션(PASSION), 몸(MÔMES)은 근래 계속 눈이 간다. 특히, 몸은 프랑스 파리를 베이스로 하고 있는데 아이폰 클립 믹스로 화제가 됐다. 시대가 달라져서 그런지, 예전처럼 스케일이 크거나 엄청난 걸 준비하며 브랜드를 키우는 게 정답은 아니구나 싶었다.

의류는 어떤 방식으로 제작 중인가?

초반에는 욕심을 좀 많이 냈다. 티셔츠 원단을 따로 구하고 도안판까지 따로 주문해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제작했다. 처음 나오는 옷이니까 내 손으로 직접 해보고 싶기도 했거든. 시도는 좋았지만,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다 보니 손실이 너무 크더라. 지금은 티셔츠 전문 제작 업체에 맡겨 소량 생산 중이다. 자금이 모이고 규모가 커지기 전까진 지금의 소규모 제작 방식을 유지할 것 같다.

티셔츠, 크루넥 등 상의에 집중된 제품군을 출시하고 있는데, 추후 제작하고 싶은 제품이 있나.

스케이트보드 데크. 단, 이것만은 확실하게 준비해서 제작하고 싶다. 스케이트보드를 너무 좋아하고, 그 장비 또한 꼼꼼하게 따지는 사람으로서 데크는 신중하게 진행하려고 한다. 만약, 페일드 유토피아에서 데크가 나온다면, 앞으로 그것만 탈 생각이다. 

수많은 브랜드 사이 페일드 유토피아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협업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도 어떻게든 살려낼 기회를 주는 게 페일드 유토피아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닐까? ‘어떻게든 해낸다’, ‘어떻게든 길은 있다’. 이 두 문장으로 우리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페일드 유토피아의 풀랭스 비디오도 만나볼 수 있을까.

물론이지. 하지만, 데드라인에 쫓겨 스트레스받으며 만들고 싶지는 않다. 막상, 촬영이 시작됐을 때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를 견딜 준비가 됐을 때, 그때 시작하고 싶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비디오를 제작한다면, 필르밍은 누가 맡아줬으면 하는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필르머 전부. 하하. 스케이트보드 비디오를 보면 메인 필르머가 있지만, 크레딧엔 수많은 에디셔널 필르머가 등장한다. 비유하자면, 주연과 조연이 나눠진 느낌이랄까. 그런데 어떤 브랜드의 에디셔널 필르머는 또 다른 브랜드의 메인 필르머이기도 하다. 누가 주인공이 아닌, 다 같이 모여서 만드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만, 산도 한번 가보고, 티격태격 싸워도 보고, 그 안에서 다시 뭉치는 과정도 배워보는 게 좋지 않을까?

스케이트 필름이나 데크가 스케이트 브랜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나.

누군가 우리에게 ‘페일드 유토피아는 데크와 스케이트 필름이 없기 때문에 스케이트보드 브랜드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면 할 말은 없다. 나 역시 예전에는 스케이트 브랜드가 당연히 갖춰야 할 필수요건으로 브랜드 데크와 스케이트 필름을 꼽았거든. 근데, 10여 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뀌었다. 스케이트 브랜드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명확한 답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스케이트 브랜드의 코어는 과연 뭘까?

스케이터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담겨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로써의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가장 감명 깊게 본 스케이트 필름은?

에일리언 워크숍(Alien Workshop)의 “Mindfield”는 내 올타임 페이버릿이다. 개인적으로 이 비디오를 이길 만한 풀랭스를 아직 찾지 못했다. 벌써 수십 번은 봤을걸. 너무 많이 봐서 질릴 정도다. 가끔 과거의 필름을 보다 보면, 요즘 나오는 풀랭스보다 더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시대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보고 영감을 받아 지금의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뿌리는 오래된 것에 있다. 과거에 각광받지 못했던 풀랭스 영상이 더 재미있고, 멋있게 보인다.

페일드 유토피아를 전 세계 어디서든 팔 수 있다면, 어느 곳에 입점되었으면 좋겠나.

스케이트 숍이라면 어디든 환영이다. 롱보드만 파는 말도 안 되는 숍이면 고민 좀 해봐야겠지만, 어쨌거나 페일드 유토피아에 관심이 있고, 지지한다는 의미니까. 최근 태국에 다녀와서 그런지 동남아 쪽에 진출해 보고 싶다. 방콕 도심 외곽 후미진 스케이트 파크에서 다 헐어가는 보드 하나 가지고 서너 명이 돌려 타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친구들이 나보다 더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고 열정적인 것 같더라고. 보드를 마음껏 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멋진 친구들을 발굴해 내는 재미를 찾고 싶다.

브랜드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한국 스케이트보드 신이 세계 무대의 한편을 차지하는 것. 비단, 페일드 유토피아만이 아닌 한국의 모든 브랜드가 한데 뭉쳐 이루길 바란다. 우리라고 트래셔 매거진(Thrasher Magazine)에 못 올라갈 이유는 없잖아? 한국에서 경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좁은 땅덩이에서 서로 반목하고, 상대를 밟고 올라가 뭘 하겠는가. 그런 행동 자체가 구린 것 같다. 한국 스케이트보드가 다른 나라 스케이터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과정을 함께 만들어갔으면 한다.

어렸을 때부터 또래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굵직한 스케이트 브랜드 팀 라이더로 활동했었다. 지금까지의 스케이터 생활을 돌이켜 본다면.

전 세계 스케이트 신이 유행에 민감해진 만큼, 식는 것도 빨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풀랭스 비디오가 나오면 1년이 넘도록 두고두고 회자됐었지만, 요즘에는 2~3개월이면 관심이 확 꺼진달까. 땅바닥에 구르고 길거리에서 쫓겨나면서 힘들게 만든 비디오일 텐데, 이런 것들이 쉽게 잊혀져 안타깝다. 스케이터 역시 그렇다. 확 뜨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90년대 활동했던 스케이터가 지금 전설로 칭송받는 것처럼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타고 있는 어린 친구들이 언젠가 그 길을 걷게 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5년 뒤 이민혁과 페일드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

5년 뒤에도 페일드 유토피아를 운영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이지. 그때까지 이 열정이 식지 않길.

Failed Utopia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Editor │오욱석, 윤태현
Photographer | 이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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