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몇년 간 SNS의 급물살이 온 세상을 휘몰아친 가운데, 그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실물 텍스트에 대한 많은 이들의 간절한 욕망 역시 십분 느껴지는 요즘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힘입어 더욱 거세진 텍스트 붐은 지난달 열린 서울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16’에서도 그 기세를 증명했다. 3일간 페어를 찾은 인파만 2만 3천여 명. 수많은 참가 부스 위 무수히 진열된 책들. 어디부터 눈을 둬야 할지 모를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출판문들을 이동식 책 교환 커뮤니티 ‘부/끄/부/끄’를 함께하는 두 동료와 파헤쳐봤다. 어깨와 어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발굴한 보물들을 함께해 보자.
김용식
SENANDUNG DI BATAS MIMPI / Diskoria
언리미티드 에디션 참가팀이 발표되면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에서 온 팀이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만큼, 세계 곳곳의 출판사가 모인 행사장에 익숙한 언어와 그래픽으로 꾸민 인니 출판사 부스를 만나면 퍽 반갑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올해에는 자카르타 소재의 독립 출판사 비나땅 프레스!(Binatang Press!)가 자리를 빛냈다. 부스에 계신 출판사 관계자님과 짧은 수다 끝에 가장 눈에 띄는 몇 권을 구매하였고,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하고 싶은 단 한 권이 있다면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받던 자국의 올드스쿨 뮤직을 다시 트렌드의 궤도에 올린 DJ 듀오, 디스코리아(Diskoria)의 ‘Senandung di Batas Mimpi’다. 화려한 표지 안에는 디스코리아가 직접 발굴 및 엄선한 인도네시아 클래식 디스코 명곡 100선의 아트워크가 그에 못지않게 인상적인 비주얼을 뽐내며, 모든 곡을 들어볼 수 있는 6시간 45분 길이의 믹스셋 QR 코드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Senandung di Batas Mimpi’는 디스코리아가 무대에서 종종 ‘필살기’로 활용하는 디스코 영웅 하리 디아(Harie Dea)의 트랙으로, ‘꿈의 가장자리에서 흥얼거리다’라는 뜻이다.
뫼비우스 콜렉션 / 란탄
얼마 전 성수동 S-FACTORY의 서울웹툰아카데미에서 열린 ‘하고 싶은 만화전’에 다녀왔다. 지난 몇 년간 주위에 웹툰 작가를 꿈꾸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만화 학원이 자주 눈에 띄는 등 웹툰 산업의 성장을 피부로 느낄 기회가 잦았는데, ‘하고 싶은 만화전’도 넓어진 만화계의 저변을 실감하게 하는 이벤트였다. 플랫폼의 장악력이 강해질수록, 정말 좋은 것들은 그 변두리에서 발견되기 마련이다. 올해 언리미티드 에디션 행사에서 가장 기분 좋은 발견이었던 란탄 작가의 ‘뫼비우스 콜렉션’이 바로 그렇다. 연례 가장 큰 독립 출판 행사인 ‘뫼비우스 콜렉션’에서 이유 모를 소외감을 느낀 뒤 창작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동료를 찾아 나서는 독립 만화 작가 ‘소심’의 이야기는 ‘크루’, ‘집단’, ‘컬렉티브’가 난무하는 작금의 문화계에서 누구나 느껴보았을 은밀한 욕망, 또는 허무감을 건드린다. 단순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서 그쳤다면 웃고 지나쳤겠으나, 독창적인 결말이 쌉쌀한 여운을 남긴다. 진짜 ‘부끄부끄’한 사람들만 모인 ‘집단’의 일원으로서 강력하게 추천.
Una Piscina Geopolítica / Handshake
스페인의 출판사 겸 디자인 스튜디오 핸드쉐이크(Handshake)에서 출판한 책으로, 반투명 폴더의 한쪽에는 리서치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다른 한쪽에는 그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의 기록이 담겨 있다. ‘수영장’을 주제로 물 부족 국가인 스페인의 공공수영장 20,000곳을 조사한 후 그 지정학적, 철학적 의미를 파헤쳤다고. 방대한 자료와 시각적 분류 체계에 압도되는 전반부와 퍼포먼스의 인상적인 형식까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완성도와 출판사 관계자분의 스토리텔링에 넘어가 바로 지갑을 열어버렸다. 하지만 구매 후 몇 분 뒤 부스로 돌아가 보니 매진되어 있던 점을 미루어 보아, 후회하지 않을 지출이 분명하다.
한지은
아마추어 서울 7, 9, 12호 / Amateur Seoul
아마추어 서울(Amateur Seoul)은 인터넷을 떠돌다가 웹사이트에 방문했던 경험이 있어 어렴풋이 알고 있던 팀입니다.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책 실물은 처음 만나보게 되었는데 비정기적이지만 꽤 오랜 기간 재미있는 주제를 풀어왔더군요. 꾸준함에 한번 놀라고, 발행한 지 꽤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주제들에 놀랐습니다. 공통된 주제는 서울을 산책하며 발견한 것들입니다. 7호의 세운기술서적에 관한 이야기, 9호의 이동성을 가진 가게에 관한 내용이 눈에 띄어 7호와 9호를 단박에 구매했고 설명도 재미있게 잘해 주셔서 절로 최근 나온 호에 대한 설명까지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발행한 12호— 도시의 경계들에는 과거에는 서울에 살던 팀 구성원들이 이제는 전부 서울을 외부로 흩어져 서울 외부에서 서울을 바라보고 오가는 입장이 되었다는 배경이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서울 안팎의 지도의 경계를 직접 답사하고 이후에 책이라는 물성으로 옮겨올 때 사진 레이아웃과 조판에서도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북페어에 가서 책을 살펴볼 때, 정성껏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지만 구매할 여력이 없어 곤란한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이번엔 그럴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3권이나 구매했네요. 너무 쉽게 영업당하신 거 아니냐고 하셨지만 별수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와 예전에 스쳐 지나쳤던 웹사이트를 다시 찾아가 보니, 구매하지 못한 다른 호들도 궁금해졌습니다. 공부하다 보니 ‘아마추어(Amateur)’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볍고 한정된 형식 안에서도 콘텐츠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책들이라, 팀 이름이 참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다쉬브 Vol. 1, Vol.2 / d’archive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국내 서점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나 독특한 형태의 책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실험적인 형태나 소량 출판된 책들은 매력적이지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다 보면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직관적으로 선택한 책들을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어요. 이번에 제가 구매한 책들도 돌아보니, 실험적이거나 한정판인 책들보다는 평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꾸준히 작업을 이어온 팀들이 준비한 읽을거리 중심의 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낯설고 생경한 책을 구매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예기치 못한 발견을 할 수 있는 점도 북페어가 주는 매력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두번째로 구매한 책은 ‘다쉬브(d’archive)’라는 한국의 사진을 다양한 맥락에서 아카이브하는 팀의 책입니다. 저는 평소에 사진집을 잘 구매하지 않거든요. 시집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간혹 구매하기도 하는데, 만들어진 배경이나 스토리가 잘 전달되어 오는 경우인 거 같아요. 이 책은 일제강점기 때에 한국에서 열렸던 박람회에 관한 책인데, 외면하기 쉬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건축물’이라는 소재로 포커싱해 소개하는 점이 인상 깊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건물의 독특한 형태들이 아름다워요. 여쭤보니 박람회가 끝난 이후에는 바로 건물을 허물었다는데, 지금으로 비유하면 팝업스토어와도 같다는 생각도 들고… 흥미롭습니다. 가격도 합리적이라 동상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의 역사를 아카이브한 책도 같이 샀습니다.
아아좋아 / The Goodwiller
다음은 더 굿윌러(The Goodwiller)라는 팀이 2024년에 발행한 책 ‘아아좋아’입니다. 이들은 2019년부터 여행을 다니며 헌 옷이나 물건을 재가공해 판매하고, 이를 책으로 아카이브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제가 구매한 4호는 이들이 서울에서 경험한 것들을 담은 책입니다. 방문 당시 지혜를 쌓고 나누는 공간인 ‘버드콜(Birdcall)’에서 워크숍을 진행했다고도 들었는데 직접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책에 그 일련의 과정도 담겨있더군요. 아는 얼굴도 등장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기록과 경험을 나누는 방식이 개인적이면서도 무겁지 않아 재미있게 넘겨볼 수 있어요. 책 제목인 ‘아아좋아’도 참 귀엽고요. 이번에는 동묘를 방문해 구매한 옷들에 실크스크린 작업을 더했다고 하는데, 아트워크를 구매한다는 생각하고 동묘스러운 느낌의 추리닝 한 장을 함께 샀습니다. 재미있게도 동묘에서 산 옷이라던 그 추리닝의 택을 확인해 보니 Made in Italy라고 적혀 있더군요…? 가끔 저희 세대가 노년이 되면 저절로 동묘로 발길을 향하게 될지 아니면 이태원, 성수, 홍대 합정 등으로 모이게 될지 궁금한데.. 당연히 후자겠지만 그때에도 탑골공원, 동묘의 독특한 문화가 희석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이군요… 그 외에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책들이 많았지만 3권을 소개하는 자리라 이만 줄이겠습니다. 놓친 책들 중에서는 다른 친구들이 산 책들도 있어서 나누어 보려고요.
장재혁
Relics Magazine / Mulu Office
나의 사랑 중국 음식을 필두로 부쩍이나 동양적인 것에 관심이 많이 가는 요즘이다. 이번 아트북페어에서 역시 베이징, 타이페이에서 온 개성 넘치는 부스가 내 호기심을 끌었다. 특히나 최근 구입한 인터넷 카페 사진집 이후 대만의 사진작가와 작업물에 퍽 좋은 인상을 받았던 지라, 그리고 다소 삼삼한 표지 뒤에 오는 강렬한 사진의 향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지라, 모든 대만 부스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그리고 여러 대만 부스 중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이들이 바로 물루 오피스(Mulu Office)였다.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진 그들의 테이블 위 개성 넘치는 출판물 속에서도 마치 박물관 팜플렛을 보는 듯한, 그래서 왠지 모르게 더 눈길이 자꾸만 머물던 이 사진집(본인들은 매거진이라 칭하는)을 집어 들게 됐다. 청록색 배경을 두고 고고하게 서 있는 흰 자기 화병이 박물관의 정적처럼 고요하게 다가오는 표지.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니 아뿔싸 이번에도 크게 한 방 먹었다.
너저분하게 흩어진 볼펜, 오랜 세월을 증명하는 참가자 목걸이 한 무더기와 무수히 쌓인 책들을 지나자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형형 색색의 물건들이 고급 포장지에 싸여 큼지막하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강렬하다. 휘황찬란한 색들에 빠져 도통 이게 무슨 사진집인지 골몰하고 있으니, 주인장이 나지막이 설명을 시작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침내 의문스러운 사진들에 퍼즐이 맞춰졌다. ‘Relics Magazine’은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주인장의 친구의 아버지, 니 주이 흥(Ni Jui Hung)을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추적한 결과물로, 정신없는 연구로 어질러진 그의 책상과 다수의 학회를 다녀왔음을 증명하는 확인증 그리고 교수들에게 의례 주어지는 다수의 명패와 알 수 없는 상징물들이 사진집을 채운다. 강의실 혹은 교수의 모습은 정작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모든 흔적이 그가 교수임을 말해준다. 총 3권이 출판물로 구성된 Relics Magazine은 설명한 사진집 외에도 고급 명패만을 모은 부록과 이를 먹 일러스트로 구현한 또 하나의 출판물로 구성됐다(이 출판물에는 니 주이 흥의 모습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꽤나 귀엽다!). 알찬 구성. 자꾸만 나도 모르게 대만으로 눈길이 가는 요즘, Relics Magazine은 분명 대만행 비행기 발권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만 같다.
Three moments of a script that never was written but might have happend / Te Editions
이번에는 베이징이다. 노란색 표지와 강렬한 불꽃이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던 테 에디션스(Te Editions) 부스의 사진집 ‘Minnan Exit’이 필자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허나 창의성이 십분 발휘된 다른 출판물 역시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사진집에서 눈을 돌려 다른 결과물을 열어보기로 했다(이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으며 사진집도 어찌저찌 확보했다). 다음으로 손에 잡힌 결과물은 ‘Three moments of a script that never was written but might have happend’였다. 책을 펼치고 나서는 중국어와 영어로 구성된 텍스트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사진의 향연이 펼쳐져 그 의도를 파악하는데 애를 먹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묘한 끌림이 있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테 에디션스 운영진의 친절한 설명이 알맞은 타이밍에 치고 들어왔다. 쉽게 말해 중국 아티스트 후 웨이(Hu Wei)가 자신의 영상 작업물 세 편을 아카이브한 책이라 보면 되는데 그 작업물은 다음과 같다.
“Long Time Between Sunsets and Underground Waves”
“The Almost Perfect Crime”
“The Rumbling”
책은 비디오 내레이션 스크립트를 가로로 병치한 첫 번째 파트와 비디오와 연관된 사실적 자료, 연구 및 기록을 포함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얽힌 두 번째 파트로 나뉜다. 특히 두 번째 파트는 ‘Fabrication(가짜)’, ‘Anonymity(익명성)’, ‘Boundary(경계)’라는 카워드에 따라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후 웨이의 창작 과정을 콜라주로 표현했다. 책 전체로 보면 일종의 대본과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영상 작업물을 보면 책의 이해가 더욱 쉬울까 싶어 인터넷을 뒤졌지만 아쉽게도 온라인상에서 이 작업물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운영진의 설명에 따르면 그중 한편은 중국에 침입한 외국인 스파이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이 이야기가 구매 욕구를 당겼다). 비록 아직까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지만 이것이 바로 아트북페어의 묘미가 아닐지?
LIFE GUARD / Kozel n Ants
사실 이 책은 바로 옆 사무실에 앉은 비전 에이전시의 박정현 팀장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집이자 일종의 아카이브다. 숨 막히는 삼복더위에도, 입술이 부르트는 추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 수영 마치고 출근하는 루틴을 지켜온 지독한 부지런함의 대명사. 그가 어느 날 ‘라이프 가드’에 도전할 거라며 폭탄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도전의 결과물이다. 다시금 학생의 자세로 돌아간 듯한 이론 수업과 끊임없는 영법 훈련 그리고 조금 웃긴(?) 셀카가 함께하는 응급 치료법까지. 수영장 안과 밖에서 기술을 익히고 지식을 습득하는 그의 모습이 퍽 진지하다. 라이프 가드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며 약간 실망한 듯 모습을 종종 지켜봤기에 더욱 이입이 되는 걸까. 나이가 먹어갈수록 무언가에 도전할 기회는 현저히 줄어든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쫄깃해지는 그 기분. 소름 끼치게 피하고 싶지만 묘하게 끌리는 그 미묘한 감정, 인생에 몇 번 없을 이 기회는 돌아보면 분명 소중한 순간으로 남기 마련이다. 지난 5월, 본인 역시 링 위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무언가 동질감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과연 그는 라이프 가드에 합격했을까?
이미치 출처 | Unlimited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