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Lynch의 편린들

2025년이 밝아온 지 1주일밖에 되지 않았던 화요일. 남부 캘리포니아 일대 전역을 덮친 대규모 산불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안긴 이 자연재해는 문화예술계에도 뼈아픈 손실로 다가왔다. 앤디 워홀(Andy Warhol), 키스 해링(Keith Haring),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작품, 현대 음악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악보들, 프로듀서 매드립(Madlib)이 일생을 바쳐 수집한 시퀸서와 레코드들까지.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선셋 대로 역시 화마의 산발적인 발생지가 되어 그들이 자랑하던 영화적 유산을 모두 불태웠다.

미국 시간으로 1월 16일 린치의 가족들이 그의 부고 소식을 페이스북에 알렸다.

그리고 이 산불의 연기는 간접적이지만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우리에게서 떠나보내게 했다. 할리우드와 선셋 대로의 진입로 북측 길목에 있는 도로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를 영화사 최고의 걸작의 제목으로 탈바꿈한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가 화재 발생 9일 만에 지난해부터 악화된 폐기종의 여파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죽음이 가슴 아픈 이유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9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신작 “배심원 #2(Juror #2)”을 내놓을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는 건강하고, 마찬가지로 같은 해 태어나 3년 전 90세의 나이로 스스로 안락사를 결정했던 장 뤽 고다르(Jean-Luc Goddard)도 있다. 이런 거장들의 삶과 죽음을 반추해 볼 때 린치의 부고 소식은 너무 이른 죽음은 아니었나 하는 비애감으로 다가온다.

2005년 “인랜드 엠파이어(Inland Empire)” 이후 오랫동안 잠잠했던 그가 2017년 “트윈 픽스: 더 리턴 (Twin Peaks: The Return)”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린치의 새로운 변곡점이 시작되리라 기대한 이들이 많았다. 특히 시즌 3의 마지막 에피소드였던 “What Is Your Name?”은 팬들에게 엄청난 불안과 공포를 안겨준 동시에 앞으로 이 시리즈가 얼마나 더 분열적으로 확장될지 암시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린치는 넷플릭스와 “위스테리아(Wisteria)”라는 가제의 시리즈 제작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창작의 욕구를 불태워 왔다. 미쳐 완결 내지 못한 “트윈 픽스”와 그가 제작을 예고한 여러 프로젝트가 남아 있었기에 린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이 많을 테다. 10편의 장편 영화와 3편의 드라마 시리즈를 제작한 데이비드 린치의 필모그래피가 그의 명성에 비해 과작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린치안(Lynchian)’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을 이뤄 온 아티스트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13편의 린치의 대표작 외에 단편 영화, 뮤직비디오, 패션 필름, 웹 애니메이션 등 그가 남긴 여러 편린을 톺아보며 그의 생애를 기억하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정말 다행히도 한국에선 영화사 안다미로가 2002년 미국에서 DVD로 출시되었던 “데이비드 린치 단편선 (The Short Film of David Lynch)”을 정식으로 수입하여 티빙, 웨이브를 통해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몇 편의 작품은 해당 단편선에 수록된 작품이다.


The Alphabet(1968)

린치가 1967년 단돈 200달러로 제작한 첫 단편 “여섯 개의 형상들 (Six Men Getting Sick)”은 그가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에 재학하며 골몰했던 혼합 매체적 작업물에 대한 탐구가 담긴 짧은 실험 영화에 가깝다. 이후 첫 아내였던 페기 렌츠(Peggy Lentz)와 결혼한 린치는 그녀의 조카가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알파벳 노래를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두 번째 단편 영화 “더 알파벳”의 작업에 돌입했다. 두터운 남성의 기괴한 알파벳 송과 함께 린치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난해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고 이내 하얀 분칠을 한 페기 렌츠가 침대에 앉아 알파벳 팻말을 드는 실사 장면이 교차 편집된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의 교차점이라는 측면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적 세계의 태동을 감지할 수 있다. 하얀 침대보 위로 피를 토하는 결말에서 린치적 호러의 프로토타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더 알파벳”은 단편선에 수록된 작품이다).


The Grandmother(1970)

“더 알파벳” 이후 제대로 된 중편 영화를 작업하기로 마음먹은 린치는 LA에 있는 미국영화연구소(AFI)에 “그랜마더”의 시나리오를 보내고 제작비로 5,000달러를 지원받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신경질적인 어머니의 밑에서 나고 자란 한 아이는 야뇨증으로 매일 학대당한다. 아이는 씨앗을 심고 괴기하게 생긴 나무에서 할머니가 열린다. 땅에서 잉태된 한 가정의 모습을 애니메이션과 스톱 모션으로 풀어낸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부터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에 이르기까지 린치의 세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뒤틀린 관계를 마주하게 된다. “더 알파벳”이 그의 영화 세계의 씨앗이었다면, “그랜마더”는 그 싹이 움트고 있음을 알리는 태동에 가깝다. “이레이저 헤드”가 예기치 않게 자녀를 갖게 된 사내의 망상을 마주했다면, “그랜마더”는 그 역의 시선으로 자신을 원치 않는 부모를 마주한 자녀의 환각이라 할 수 있다. “그랜마더”로 AFI의 마음을 사로잡은 린치는 곧장 “이레이저 헤드”의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랜마더” 역시 단편선에 수록된 작품이다.


The Cowboy and The Frenchman(1988)

“사구(Dune)”의 실패 후 “블루 벨벳(Blue Velvet)”으로 화려한 부활에 성공한 린치는 2년 뒤 프랑스의 르 피가로 지의 잡지 부문 10주년을 맞이해 기획된 프랑스의 텔레비전 시리즈 “…의 눈에 비친 프랑스 (The French as Seen By…)”에 단편 제작을 의뢰받는다. 장 뤽 고다르, 베르너 헤어조그(Werner Herzog),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등이 함께한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프랑스인에 대한 하나의 슬랩스틱 우화를 만들었다. 카우보이 역에 낙점된 해리 딘 스탠튼(Harry Dean Stanton)은 이후 “광란의 사랑”부터 “인랜드 엠파이어”에 이르기까지 7편의 작품에 린치와 함께하는 인연이 된다. 린치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다큐멘터리 “해리 딘 스탠튼의 초상 (Harry Dean Stanton: Partly Fiction)” 속 해리 딘이 “Everybody’s Talkin”을 노래하는 장면에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공교롭게도 이 단편 속에서도 해리 딘은 미국의 민요인 “Home on the Range”를 부르고 있다. 영화는 현재 MUBI와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서만 관람 가능하다.


놀랍게도 이것 역시 그의 작업물 중 일부였다.

Dumbland Series (2002)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21세기 최고의 영화를 만든 린치는 곧장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반기며 데이비드 린치 닷컴이라는 웹사이트(해당 웹사이트는 현재는 폐쇄된 상태)를 열었다. 온라인 왕국의 개국 기념으로 린치는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들 정도로 조악한 수준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시리즈 “덤랜드”를 무료로 공개했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쇼크웨이브(Shockwave) 측에서 팀 버튼(Tim Burton)과 린치에게 제안했던 프로젝트로, 린치는 그 대가로 쇼크웨이브의 주식 상장 시 지분의 일부를 받기로 했다고. 폭력과 분뇨가 가득한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총 8화로 이뤄져 있다. 언뜻 유치해 보이는 이 시리즈는 실은 “광란의 사랑”과 “블루 벨벳”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린치의 ‘과잉된 폭력’의 미학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린치 특유의 고약한 블랙 코미디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덤랜드 시리즈”도 단편선에 수록되어 있다.


Rabbits(2002)

“덤랜드”와 더불어 데이비드 린치 닷컴에 2002년 공개된 또 다른 단편 시리즈는 “래빗”이었다. 위치가 하나도 변하지 않는 세트장에 등장하는 수컷 토끼 잭과 암컷 토끼인 수지와 제인이 주인공이다. 린치는 이 시리즈를 전형적인 미국적 시트콤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딘가 뒤틀린 듯한 대사와 맥락과 불화하는 웃음소리가 호러 영화처럼 다가온다. 이런 기묘함은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David Foster Wallace)가 영화 잡지 프리미어에 기고한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답사기인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에 나오는 ‘지극히 린치적인 것’과 공명하는 지점이다. 그는 린치적인 것이란 학술적으로는 “굉장한 무시무시함과 굉장한 평범함이, 후자가 전자를 늘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로 뒤섞이는 특정한 아이러니”라고 지칭하지만, 결국에는 직접 그 이물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여담으로 각 토끼는 나오미 왓츠(Naomi Watts), 로라 해링(Laura Harring), 스콧 코피(Scott Coffey)가 직접 토끼 탈을 쓰고 연기했으며, 촬영본 일부는 “인랜드 엠파이어”에 활용되었다.


Lady Blue Shanghai(2010)

이미 구찌(GUCCI), 입생로랑(YSL),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등의 대형 패션 브랜드와의 작업을 선보인 바 있던 작업했던 린치에게 2010년 디올(Dior)이 접근했다. 디올이 요구한 사항은 단 세 가지. 디올의 핸드백과 동방명주탑 그리고 상하이의 예스러움을 담아달라는 것이었다. 린치는 마리옹 꼬띠아르(Marion Cotillard)를 주연으로 16분 분량의 패션 필름 제작에 착수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체크인한 호텔 방에서 갑자기 디올 핸드백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과거인지 환각인지 모를 중국인 연인과 사랑을 떠올리다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 환각과 회상이라는 린치의 주된 방법론도 눈에 들어오지만, 무엇보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사용했던 저해상도의 디지털카메라 촬영법이 한눈에 린치의 인장임을 드러낸다. 2022년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도 린치는 디지털카메라의 이점을 가벼움과 긴 촬영 시간의 확보로 꼽은 적이 있다.


Fire (PoZar)(2015)

2002년 데이비드 린치 닷컴을 개설한 데 이어 린치는 2018년 데이비드 린치 극장(DAVID LYNCH THEATER)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다. 2020년 5월 11일 코로나가 한창일 때 그가 올린 첫 영상은 오늘의 날씨였다. 10일간 꾸준히 오늘의 날씨를 중계하던 린치는 마침내 2015년에 제작하고 공개하지 않았던 단편 애니메이션 “파이어 (포자르)”를 공개한다. Moby의 “Shot In The Back Of The Head”의 뮤직비디오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등 꾸준히 애니메이션과 끈을 놓지 않았지만, “파이어 (포자르)”에선 초기 단편 시절 린치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불의 이미지가 스크린 전반에 희망과 절망 두 가지 모두 안긴다.


Will There Be Anything Else?(2024)

이것을 과연 린치의 마지막 단편으로 여겨야 할 것인가 꽤 고민이 되는 결정이지만, 린치의 유튜브 채널에 마지막으로 게시된 그의 작업물은 “Will There Be Anything Else?”다. 크리스타벨(Chrystabell)과 함께 작업한 앨범 “Cellophane Memories”의 홍보용 티저로 제작된 이 짧은 영상은 다시금 그의 고약한 유머와 다재다능함을 기억하게 만든다. 영상에 사용된 푸티지는 고전 할리우드 저예산 영화를 만들던 에드가 G.울머 (Edgar G. Ulmer)의 1945년도 작품인 “우회 (Detour)”다. 그가 직접 더빙하고 대본을 썼다고 밝힌 이 짧은 영상은 주로 자신의 앨범 홍보를 다루고 있지만, 말미에 등장하는 포토샵 프로그램 속 개미의 탭댄스에서 린치의 미세한 향기를 느끼려고 한다. 린치가 얼마나 다음 행보를 열망했는지 전해지는 이 영상은 필자를 비롯한 ‘린치언’에게 짙은 아쉬움과 애도의 감정을 남긴다.


린치가 3년간 중계한 일기예보 중 2022년 2월 25일의 영상을 좋아한다. 이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채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날이었다. 린치는 이 날 마치 커뮤니티의 꾸준글처럼 이어오던 일기예보를 접고 푸틴을 향해 “더 이상 이런 불합리한 일은 없어야만 한다(There’s no room for this kind of absurdity anymore)”라고 강하게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바라본 린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괴짜라고 주변에서 떠들어대도 자신은 전혀 괘념치 않아 하는 모습. 그는 린치의 이런 면모가 “물리적인 품위”를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적이고 소탈하지만 독특한 그가 인류의 비극 앞에선 품위를 지켜내는 모습도 이와 같다. 그의 무구한 예술적 업적만큼이나 얼마나 린치가 괴짜로서의 기품을 갖추었는지를 떠올려 본다.


이미지 출처 | IMDB, MUBI, The Guardian,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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