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보드 필르머 정필규가 여름방학을 마치고 새로운 비디오 “Love Letter”를 가지고 돌아왔다. 지난 2월 25일, 신도시 옥상에서 이 일본 감성 충만한 비디오의 상영회가 열렸는데, 최근 많은 주목을 받은 필르머인만큼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겨울바람은 매서웠지만, “Love Letter”를 온전히 느끼기엔 더없이 좋은 온도였다.
필르머 정필규 코멘터리
초기 구상과정
“Love Letter”는 전작 “여름방학”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름방학”의 겨울 버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일찍이 했지만, 단순히 ‘겨울방학’이라는 주제로 이어가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제가 겨울이라는 계절에 느끼는 감정은 ‘설렘’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차가운 공기 덕분에 오히려 따뜻함을 이야기합니다. 추운 겨울,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우리는 따뜻한 체온을 가진 인간이라는 걸 새삼 느끼고, 그 무언가 따뜻한 존재를 실감하며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겨울의 모습이었고, “여름방학”에 이어지는 시리즈물로서 적절한 테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떠올린 건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입니다. 겨울을 이야기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상징적인 영화고, 무엇보다 러브레터는 설렘이라는 주제에 아주 적절하게 부합하는 제목이었습니다. 설렘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서로 떼어놓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했고요.
초기 구상은 3~4분 분량의 “눈의 꽃” 한 곡을 가지고 완성하려고 했습니다만, 촬영을 계속 진행하던 도중 시사회라든지 이벤트를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볼륨을 키웠습니다.
제주도
영상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공항, 비행기, 해안도로, 설산 등은 제주도에서 촬영된 것입니다. 제주도 여행의 목적의 반은 사실 촬영이었습니다. “Love Letter”에는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레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갔던 제주도를 떠올렸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아직 외국자본이나 게스트하우스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제 기억 속 이미지는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텅 빈 들판에 친척 집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런 기억이 문득 떠올라서 제주도행을 택했습니다. 당시 하던 일을 막 그만둔 상태였고,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한 것 같습니다. 막상 도착하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어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겨울철 휴양지라는 묘한 감성이 나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라산에도 눈이 오는 주간이어서 눈도 마음껏 찍을 수 있었고요.
음악
음악을 선정하는 기준은 “여름방학”과 비슷한데, 일본 쇼와시대 노래 위주로 골랐습니다. 보시는 분들이 그 시대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길 바랐습니다.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곡을 쓰고 싶기도 했지만,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눈의 꽃” 같은 경우는 워낙 어린 시절부터 나카시마 미카의 팬이기도 했고, 이만큼 겨울의 분위기를 담을 수 있는 곡은 없겠다는 생각에 선정했습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어서 ‘괜찮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스케이트보딩과 어우러지는 의외성에서 오는 재미라던가, 보는 사람이 가사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곡인 것 같아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두 번째 파트에 들어갈 곡을 고르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원래는 신스팝과 힙합을 한 곡씩 골랐습니다. 여름방학과 조금 다른 부분도 보이면 재밌을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도저히 맘에 들지 않아 시사회 전날 철야로 갈아엎어 지금의 영상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두 번째 파트는 크레딧과 더불어 가장 애착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상 코멘터리
“여름방학”에서도 그랬듯, 스케이트 클립 외 등장하는 장면은 어느 정도 내러티브를 부여했습니다. 누군가를 그리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는 일과 답장을 기다리는 과정만큼 상대방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시간도 없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영상에서는 상대방을 기다리는-생각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을 촬영하지 않은 화면은 그 인물의 시선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시선 같다고나 할까.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작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 장면들이 스케이트 클립과 어우러져서 관객에게 각자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스케이트 클립도 종전의 작업보다는 전체적인 촬영이나 앵글에 있어 많이 신경을 쓴 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좀 더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담이지만, 스케이트보딩은 사랑이라는 감정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반우스갯소리로 보드를 연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미워지기도 하고, 이제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멀리 달아납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번 작업을 하면서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스케이트보드 필름 “Love Letter” 인터뷰
가장 공들인 부분
어느 하나 공들이지 않은 구석이 없다. 촬영할 때부터 베스트 컷을 뽑으려고 노력했고, 계속 좋은 앵글을 찾았다. 전체적으로 역동감이 느껴지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BGM을 고르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는데, 두 번째 파트에 어울리는 노래를 찾기 어려웠다. 고르는 곡마다 파트와 어울리지 않아서 몇 번이나 바꿨다.
“여름방학”과의 관련성
“여름방학”을 완성하자마자 바로 다음 걸 구상했다. “여름방학”과 이어지는 시리즈물을 만들고 싶었다. ‘여름’에 이어 ‘겨울’ 콘셉트로 스케이트보드 필름을 내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니까. 그 당시 같이 보드 타는 형들이 이제 “겨울방학”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했는데, 겨울방학도 나쁜 이름은 아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올겨울에 무조건 비디오를 내자는 생각에 “여름방학”을 내고 나서 곧바로 스케이트보드 촬영에 들어갔다.
눈의 꽃
원래는 마지막 파트 BGM인 나카시마 미카의 “눈의 꽃” 하나로 스케이트 비디오를 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러브레터라는 상징적인 소재를 가지고 고작 4분짜리 영상에 다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시사회를 열고 싶기도 해서 분량을 늘리기로 마음먹었다. 욕심부린 거지. 그게 화근이었다. 씨발, 왜 그런 생각을 해서. 하하.
안양 스케이터
병문이 형은 이전부터 많이 찍었다. 워낙 스타일도 좋고 멋진 사람이다. 굳이 이 영상이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나는 다양한 로컬 스케이터를 찍고 싶었다.
이와이 슌지의 원작 소설
소설은 읽어본 적 없다. 영화만 봤다.
러브레터
이번 영상을 만들면서 영화 “러브레터”를 계속 돌려 봤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괜히 설레지 않나? 추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그 묘한 감정을 관객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대충 이런 거다. 집에서 움츠리고 있다가 약속이 생겨서 옷을 차려입고, 집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찬 공기 같은 것. 겨울은 언제나 날 설레게 한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고. 하하. ‘설렘’이 이번 영상의 주제고, 그걸 상징적으로 드러낸 단어가 ‘러브레터’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내레이션
이번 영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해서 삽입했다. 사실, 너무 유명한 영화라 굳이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내레이션에서 아이디어만 가져와 한국어로 된 대사를 만들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흘러갈 것 같아서 그대로 뒀다. 한국어로 직접적인 전달을 하는 것보다도 낯선 언어 안에 담긴 감정을 느꼈으면 했다.
시사회 @신도시
옥상에서 옆 건물 벽에 프로젝터 빔을 쏘는 방식으로 상영했다. 드럼통에 불도 때우고, 맥주도 마시며 다들 즐겁게 본 것 같아서 나도 재밌었다. 더 난장판으로 놀았어야 했는데 조금 약했다. 하하.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다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했다. 상영도 30분 미뤄지고, 난 계속 정신없었지. 상영 후에는 신도시 안에서 술 먹고 진탕 놀았다. 그런데 시사회에 온 친구들이 테이블 유리도 깨 먹고 의자를 바깥에 던졌다더라. ‘아, 다신 이곳에서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사과는 드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잘 모르겠다.
러브레터의 수신인
특정한 이를 염두에 두고 만든 영상이 아니다. 그냥 살아오면서 느낀 감정,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다.
여름, 겨울. 그리고
글쎄. 계절 시리즈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점에 둔 것은 일본 쇼와시대다. 이 지점에 관해 더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남아있지만, 계절과 연관 지어서 나올 것 같지는 않다.
다큐멘터리 필름
구상하는 게 하나 있다. 사토 신지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 확실한 건 아닌데 오는 4월에 일본 갈 때 한번 찍어볼까 생각 중이다.
일본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꿈이 만화가였다. 천재가 아니면 만화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일본 만화를 접하며 자연스레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몸도 약하고 입원도 잦아서 매일 책만 읽었다. 만화도 많이 봤지만, 나중에는 일본 사소설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같이 유명한 일본 작가들이 쓴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일본 소설
같은 아시아 문화권 안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일본만의 특유한 분위기가 좋았다. 활자에서 나오는 낯선 풍경을 즐겼다. 한국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그 느낌이 좋아 무작정 읽었던 것 같다.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친구 놈 말마따나 머릿속이 정돈되는 느낌이 든다. 차곡차곡 하나씩 정리되는 기분이 좋다.
오타쿠
일본 문화를 좋아하지만, 일부러 그런 캐릭터를 만든 건 아니다. 오히려 틀에 갇히는 것 같아서 다음에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생각도 있다.
여자주인공
누굴 섭외할지 존나 고민했다. “여름방학”을 만들 때 도와준 다운이도 좋은 피사체였지만, 너무 비슷한 영상이 될 것 같아 피했다. 전형적인 쇼와시대의 청순 발랄한, 마쓰다 세이코 같은 주인공이 무난하게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찾기가 어디 쉬운가. 실제로는 정반대의 주인공이 만들어졌다. 오히려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캐릭터가 연기한다면 더 독특한 분위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지우와 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잘 나온 것 같다. 만족한다.
전철, 조용한 주택가, 자전거.
일본에서 찍은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 사실, 한남역 근처에서 하루 만에 모든 촬영이 이루어졌다. 지상으로 들어오는 전철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마침 한남역이 지상철 구간이어서 더 생각해보지도 않고 바로 촬영했다. 근처에서 주인 없는 자전거를 발견한 것도 행운이었다. 잠시 빌려 썼지. 하하. 그외에는 내가 제주도에 갔을 때 개인적으로 담은 클립들이다.
내러티브
기다림이다. 구체적인 건 보는 사람마다 알아서 받아들이길 바랐다. 자신의 경험을 뒤돌아보며 공감하는 거지.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만 설정했다. 일단은 스케이트보드 비디오니까.
명장면
모든 파트가 중요하고, 어느 파트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남은 쇼와시대 노래
오카무라 야스유키의 “カルアミルク.” 이 노래는 전형적인 동경 러브 스토리 같다. 언젠가 꼭 쓰고 싶은 노랜데, 이번 영상에는 잘 안 붙더라. 아무래도 보컬 목소리에서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았다. 쇼와시대 노래에는 아련한 촌스러움이 묻어난다. 연인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 이를테면 깔루아 밀크라든지, 포르셰 같은 단어를 가사에 넣는 점이 재미있다.
풀 렝스 비디오
당연히 만들고 싶지. 그러나 쉽지 않다. 필르머에게도 부담이고, 스케이터에게도 부담이다. 각각의 스케이터에게서 완결된 파트를 뽑아야 하는데, 한국에서 이 작업을 완수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계속해서 스케이트 비디오를 내는 것. 한국 스케이트 신에서 꾸준히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 이 부분에 집중하고 싶다.
프랑수아 오사무
스케이트 필름을 꾸준히 내면서 이런 이름이 하나 필요하긴 했다. 사실, 프랑수아 오사무라는 이름은 VISLA에 필진으로 합류하면서 재미로 만든 건데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 이 두 양반은 어떤 청춘의 단면 그 자체인 것 같다. 자기 파괴, 그리고 뜨거운 정열. 다르지만, 같은 선에 있는 두 명의 이름을 합친 거다.
진행 ㅣ 권혁인 오욱석
글 ㅣ 권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