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불어닥친 90년대, 올드스쿨의 유행은 꽤 재미있는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형형색색의 나일론 재킷, 큼지막이 새겨진 투박한 로고가 다시금 빛을 발하는 모습은 반가움과 생경함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감상을 자아낸다. 이런 흐름과 함께 다양한 브랜드 또한 과거의 제품을 새로이 복각하고 있지만, 그 당시의 감성은 역시 묻어나는 세월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홍대입구역 5번 출구, 북적거리는 거리 반대편에 자리 잡은 빈티지 숍 나일론 맨(NYLON MAN)은 ‘진짜’ 옛날 것을 판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빈티지 의류와 빈티지 마니아 주인이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 옷보다는 문화를 팔고 싶다는 빈티지 숍, 나일론 맨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숍 소개를 부탁한다.
갑자기 얘기하려니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하하. 빈티지 숍을 시작하게 된 계기 정도는 말할 수 있는데, 일단 어린 시절부터 옷을 너무 좋아했고 의류 디자이너로 잠깐 일한 경험도 있다.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매일 찾아보지 않나. 그러다 보니 옷의 근원을 찾게 되더라. 나도 모르게 빈티지만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옷장을 열었는데 옷이 빈티지밖에 없던 거지.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는 옷이 많았다. 이런 취미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주면 어떨까,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빈티지 문화를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굳이 홍대, 그것도 외곽에 가게를 연 이유는?
홍대 분위기가 빈티지를 더 쉽게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아오기 편하고, 젊은 사람과 소통할 기회도 많아질 것 같아서 홍대에 가게를 열었다. 외곽에 자리 잡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빈티지는 뭔가 끌려 들어가는 매력이 있다.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게 멋있지 않나.
의류를 사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지금은 동대문이 의류 시장의 메카지만,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남대문이 굉장히 유명했다. 특히 의류 도매시장이 활발했지. 친형이 남대문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그때 특이한 옷을 많이 가져왔다. 벨벳 소재의 남성복 같은. 또 맨즈 논노를 비롯한 일본 잡지를 많이 가져왔는데, 당시에는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옷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물건 하나하나 직접 골라서 들이나?
물건 대부분을 이베이에서 구한다. 비싸도 그냥 산다. 안 팔리면 내가 입겠다는 심정으로 가져온다. 팔리건 안 팔리건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분명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믿음인데, 사주면 더 고맙고. 하하. 많이 남지는 않아도 그렇게 물건을 가져오는 편이 보람차다. 일본에 자주 가는 숍이 하나 있다. 조금 비싸더라도 하나씩 바잉을 한다. 분명 얘깃거리가 있거든. 나도 뭉텅이로 가져오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정작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하나도 안 나올 경우가 많다.
일본 외 다른 나라를 가는 경우도 있는지.
태국도 가고, 기회가 되면 미국까지 간다. 하하. 가끔 출처를 의심하는 분이 있는데, 직접 바잉할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국내 빈티지 숍이 굉장히 많지만, 파는 물건은 정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쉬운 점은 분명 있다. 좋은 제품을 더욱 세분화해서 잘 팔 수 있을 텐데. 고객이 많이 찾는 물건만 가져다 놓는 게 안타깝다. 한 예로 아메리칸 캐주얼 스타일이란 범주가 상당히 광범위한데, 한국에서는 일본의 전형적인 아메카지 스타일만을 떠올리지 않나. 나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서핑 스타일, 스트리트 스타일도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일론 맨을 통해서 문화적인 부분까지 소개하고 싶었다. 지금 역시 그러고 있고.
빈티지 의류를 취급하는 쇼핑몰 웹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많은 곳이 파격적인 세일을 진행하더라.
값싼 빈티지 더미에서 운 좋게 훌륭한 녀석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다. 짝으로 받아서 싸게 팔면 물론 편하지만, 전체적인 퀄리티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쇼핑몰을 보면 가끔 힘이 빠질 때도 있다. 어쨌든 나는 멋진 옷에 맞는 주인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으로 직접 바잉하고 있다.
훌륭한 빈티지와 그렇지 않은 때기를 나누는 기준이 뭔지 궁금하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니 단정짓긴 어렵다. 그래도 학습에서 나온 결론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게 좋은 물건이라는 거? 하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제품이 실제 가치 있는 물건이기도 하고. 물건의 가치가 정해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도 오랫동안 빈티지를 좋아하다 보니 좋은 게 결국, 비싸더라. 일본은 빈티지 시장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판매자와 구매자 대부분이 빈티지의 개념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다. 뭐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원단이나 프린팅이 주는 힘이겠지. 특이하고, 재미있고, 이야깃거리가 있는 제품 위주로 가격을 매긴다. 본의 아니게 그런 게 또 비싸고. 당시의 추억과 유행을 새겨 놓은 거라 어쩔 수 없다. 빈티지의 매력이지.
해외 빈티지 숍을 방문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을 진심으로 즐긴다는 게 느껴졌다. 대부분 오너의 개성, 취향에 맞게 물건을 가져온다. 해외 빈티지 숍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이렇게 장사를 하면, 가게 운영이 될까? 그런데 나도 그런 곳들을 동경하다가 내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돈보다는 일을 즐긴다. 문화를 파는 일, 한국에선 아직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는 문화 기반이 약하다. 어떤 브랜드에 열광하다가도 길거리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순간 시시해져 버리는 거지. 그렇게 없어지는 브랜드가 셀 수 없이 많다. 기반이 약하니 계속해서 유행을 따라가는 게 아쉬운 부분이지.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일론 맨이 한국에서 빈티지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을까.
그렇게 봐주면 고맙지. 어떤 문화를 팔고 동시에 생성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빈티지 쉼터 같은 곳. 하하. 손님이 가게에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거 새로 들어왔네?’라면서 사 입고 가는 숍이었으면 한다. 요즘 유행하는 패션보다는 문화를 이야기하고 싶다.
의류에 굉장히 해박한 것 같다.
좋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알게 됐다. 봉제방식은 디자이너 때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저 좋아서 디깅한 건데, 시간이 흐르니 지식이 쌓인 거지. 빈티지 마니아는 똑같다. 어떤 게 좋은 건지 귀신같이 알아낸다. 하하. 최근엔 인터넷이 활성화돼서 많은 사람과 공유하며 알아가기도 한다. 예전엔 해외 사이트를 중점적으로 뒤졌는데, 최근엔 국내에서도 많은 정보를 나누니까 이전보다 수월해진 것도 있다.
손님에게 티셔츠 봉제 방식과 제작 공정을 설명해주는 게 인상 깊었다.
사실 몰라도 되는 거다. 근데 왠지 소개를 해줘야 할 것 같고, 그래야 그 옷의 값어치를 알아줄 것 같아서, 옷을 샀을 때 장롱 속에만 머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다.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 숍을 다시 찾게 되지 않을까. 옷 자체를 즐겨줬으면 좋겠다. 어떤 옷을 샀을 때, 구멍이 나 있거나 때가 묻은 상태여도 그 또한 멋스러울 수 있지 않나. 일본은 그게 통용되더라. 일본에 ‘베르베르 진(Ber Ber Jin)‘이라는 빈티지 숍이 있다. 정말 큰 규모의 숍인데, 90년대 스트리트 브랜드부터 아주 오래전 40, 50년대 제품도 판다. 가격이 어마어마한데도 많은 손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가더라. 한국에서는 아직 꿈도 못 꿀 일이지만, 그런 걸 소개해주지 않으면 이 가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옷의 역사, 옷에 담긴 이야기를 알려준다는 게 참 멋진 마인드 같다. 귀찮을 때도 있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문화니까. 난 옷과 이야기를 파는 사람이고,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사실, 내가 파는 빈티지 제품을 찾고 가져오는 일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일단 보기에 멋져야 하고, 봉제방식과 프린팅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시너지가 정말 굉장하다. 다양한 정보를 알아갔을 때,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부심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고객들도 빈티지를 즐기게 되는 거지.
빈티지 구매 시 유의할 점은?
똑같은 프린팅이지만, 알고 보면 당시의 것이 아닌 복각 제품일 수도 있다. 라벨이나 봉제방식을 알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빈티지 제품을 자주 구매하고 입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 하하.
나일론 맨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빈티지를 파는 숍을 본 적이 있다면.
물론 나일론 맨이다. 하하. 분명 좋은 빈티지 제품을 파는 숍이 있긴 있을 거다. 내가 검색을 잘 안 해봐서 특정한 숍을 추천해주기는 어렵다.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90년대 스투시(Stussy)를 정말 좋아한다. 요즘 스투시도 멋있지만, 과거의 거친 폰트나 그라피티 그래픽처럼 강하게 끌리는 프린트를 선호한다. 누가 봐도 스케이트보드, 서핑 브랜드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시켜 버린다. 그냥 눈으로 봤을 때와 입었을 때 느낌도 다르다. 좀 더 쿨하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옛날 스투시는 정말 멋있다.
준비하거나 오픈했을 때의 고충이라면?
숍에 방문해 물어보지도 않고 설명도 안 들을 때는 조금 섭섭하지. 내가 좋아서 얘기하는 손님이 따로 있긴 한데, 무작정 ‘왜 이렇게 비싸요?’라는 말을 할 때는 조금 서운한 감정도 든다. 장사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수긍해야 하는 말이지만 역시 아쉽다.
빈티지 숍이라는 게, 아무래도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봐야 하는 일이지 않나.
스타일은 지금이나 그때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핏(Fit)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 예전보다 기계를 사용해 간편한 방식으로 만드니까. 만듦새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다. 최근 유니클로(UNIQLO), H&M 같은 스파 브랜드, 즉 패스트 패션이 득세하면서 옷을 쉽게 사고 버리지 않나. 오래 남아도 값어치를 하는 옷이 빈티지라고 생각한다. 어렵게 구하고 또 감사하게 입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다. 요즘 의류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감성이 있다.
빈티지 의류의 프린팅과 요새 브랜드의 프린팅에 어떤 차이점이 느껴지나?
요즘 다양한 브랜드에서 의류를 제작할 때 예전 프린팅을 다시 가져와 찍는 경우가 잦아졌다. 옛날 감성을 복원하려고 하는 거지. 핏 정도만 바뀔 뿐, 프린팅은 그대로 다시 찍던데. 하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꼭 빈티지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나?
나이키(Nike)도 좋아하고 트래셔(Trasher Magazine)도 좋아한다. 대체로 문화적인 뿌리가 남아있는 브랜드를 선호하는 편이다.
새로 전개하고 싶은 브랜드가 있는지.
이미 소개가 됐지만, 파타고니아(Patagonia)나 그라미치(Gramicci)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를 하고 싶다. 두 브랜드 모두 아웃도어를 지향하지만, 서핑이나 클라이밍 문화가 녹아있어 원초적인 디자인이 많다. 그걸 꾸준히 유지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지다. 특히 파타고니아는 예전에 나왔던 제품과 지금 디자인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평상시 착용하는 스트리트웨어와도 잘 어울리지 않나. 정말 탐이 나는데 이미 들어와 있어서 군침만 흘리고 있다. 하하.
물건을 진열하기 전 거치는 공정이 있다면?
제품 대부분을 소독하는데, 세탁은 쉽게 못 한다. 지금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는 게 좋은데, 그걸 훼손할까봐.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조심히 세탁해서 내놓는 편이다. 냄새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하하. 아, 조만간 때가 많이 묻은 제품을 위해 특별한 코너를 하나 제작할 예정이다. 원초적인 멋이랄까. 때가 묻었지만, 그것조차 멋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인테리어는 직접 했나?
인테리어는 내가 콘셉트를 잡고 업체와 진행했다. 슈프림(Supreme)과 상반되는 느낌으로. 하하. 야외에서 옷을 구경하거나 거리에서 옷을 고르는 느낌도 주고 싶었다. 신발장도 신경 썼다. 어떻게 하면 더 멋있게 보일까 계속 구상 중이다. 손님과 소통해서 같이 만들어나가는 숍이 되고 싶다.
온라인 숍은 운영할 계획이 없나?
방법을 잘 몰라서 머리만 싸매는 중이다. 어설프게 만들면 손님이 비싸다고 느낄 것 같아서. 빈티지라는 게 대부분 비슷해 보이지 않나. 웹 사이트에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사실, 가장 원하는 건 제품 사진만 웹에서 확인하고, 매장에 직접 와서 구입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어떤 가게가 되길 원하나.
장사도 장사지만, 자유롭게 옷도 구경하고 즐겁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서로 대화도 나누고, 궁극적으로는 빈티지 문화를 파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자유로운 가게? 하하. 친구, 친한 형처럼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다.
사진 l 오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