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서사에서 전해지는 음울한 매력은 문학과 영화, 게임 등 수많은 매체를 홀리곤 했다. 운석 충돌, 전염병 창궐, 대재앙 등으로 인한 지구 멸망의 예언은 언제나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포칼립스에 열광하는가. 왜 여전히 종말을 꿈꾸는가. 이번 기사에서는 세상의 종말을 보여주는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국적과 시대에 태어나 실사와 만화라는 상이한 매체를 입은 채 세상의 끝을 이야기한다. ‘멜랑콜리아(Melancholia)’와 ‘아키라(Akira)’ 그리고 ‘알파빌(Alphaville)’. 이들이 상상하는 종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함께 경험해보자.
멜랑콜리아 │ 라스 폰 트리에, 2011
“우아하고 우울하게 그러나 말끔하게”
‘멜랑콜리’라는 용어의 정확한 사전적 풀이는 모르더라도, 이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가 썩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멜랑콜리를 탐구하는 데 평생을 쏟았던 17세기 영국의 고전학자 로버트 버턴은 이렇게 말했다. “멜랑콜리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고 침침한 동굴 속에 가두어두며, 계속해서 공포심과 조바심 그리고 슬픔으로 괴롭힌다”.
400년 전의 학자가 말한 멜랑콜리는 현대에 쓰이는 멜랑콜리의 뜻과 상통한다. 이로 미루어보았을 때, 멜랑콜리란 인류의 기원과 함께 생겨난 정신학적 질병 혹은 기질 ━ 혹자는 멜랑콜리를 타고난 광기라고도 말했다 ━ 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 동시대 가장 뛰어난 시네아스트, 라스 폰 트리에는 자전적 이야기가 십분 담긴 영화 멜랑콜리아의 전면에 멜랑콜리를 등장시킨다. 우울증에 빠져 걸음조차 걷지 못하는 인물이 사는 세계에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충돌하면서 모든 것이 소멸하는, 우울한 멸망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는 지구에 어떠한 희망의 징조도 남겨두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하여 무(無)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세계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또 다른 내일을 위하여 나무를 심는 사람,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재건의 의지 등 그 흔한 희망의 불씨 따위 멜랑콜리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멜랑콜리아는 어떤 영화도 실현하지 못한 우아한 방식으로 세상의 멸망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오프닝 시퀀스를 살펴보자. 8분에 달하는 오프닝에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흘러나오고 유명 회화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미장센의 쇼트가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간다. 무기력하고 느릿한 비주얼과 위험하고 음울함을 연상시키는 사운드가 미묘하게 만나 형성하는 멜랑콜리아의 세계는 그 자체로 죽음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 지구가 충돌해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이다. 14세기부터 멜랑콜리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기질상의 문제, 천재들의 병, 그리고 점성술과 연관된 무엇. 여기서 멜랑콜리의 점성술적 원인이란 바로 토성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성은 정신과 사고의 행성으로 토성의 색과 열이 멜랑콜리의 주된 원인으로 손꼽히는 흑담즙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멜랑콜리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온갖 테크놀로지가 판치는 세상에서 점성술을 멜랑콜리와 연결 짓는 건 현대에 이르러 우스꽝스러운 사고일지도 모르겠으나 꽤 흥미가 가는 건 사실. 어쨌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 신비하고도 기묘한 토성과 멜랑콜리의 관계를 영화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바로 불길한 토성의 기운과 닮은 멜랑콜리를 거대한 행성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이름 또한 멜랑콜리아.
이처럼 영화는 4세기부터 시작된 멜랑콜리에 대한 항설과 신비로운 이야기를 작품에 인용하며 멜랑콜리를 개인의 내면에서 세계 전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즉 멜랑콜리를 앓는 영화 속 저스틴 혹은 현실 속 이름 모를 누군가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죽음의 기운을, 그리고 그 고통을 세상의 종말로 은유하며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는 멜랑콜리에 대한 두려움을 모든 이들의 평등한 죽음으로 말끔하게 종식한다. 멜랑콜리는 마치 죽음과 하나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영화에서 맞는 종말은 결코 만질 수 없고, 무(無)와 죽음의 약속처럼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불가능한 상태와의 결합인지도 모르겠다.
아키라 │ 오토모 가츠히로, 1988
“만화적 상상력이 그려낸 종말”
대다수의 아포칼립스 작품이 전염병이나 행성 충돌, 외계 생명의 침략 등 외부 요인에 의해 멸망으로 치닫는 이야기라면 지금부터 소개하는 아키라는 조금 다르다. 재패니메이션 역사의 시초라고 불리는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아키라는 작품의 배경인 네오 도쿄의 구성원, 테츠오라는 인물이 우연히 얻은 초인적인 힘 때문에 도시가 죽음에 이르는 서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체제를 유지하는 집단의 내부 구성원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영화는 3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에 박차를 가하는 네오 도쿄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네오 도쿄는 타락한 인간들의 이기심이 쌓아 올린 도시로, 정부와 반군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종교를 만들어 세상에 멸망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린다. 이처럼 네오 도쿄는 인간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버린 아키라가 다시 부활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죽음의 징후가 존재했다. 아키라를 불러내는 테츠오는 네오 도쿄를 파괴로 이끄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화약이며, 아키라는 도시를 죽음으로 단죄하는 심판자일 뿐이다.
이처럼 아키라는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파괴한 세상에서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는 종말의 이야기다. 아키라가 만들어진지 30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이 여전히 디스토피아 영화의 클래식 격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바로 실사 영화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실현되어 어느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스타일을 독보적으로 구축해냈다는 점이다. 아키라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을 통해 화려하고 정교한 배경화면, 이와 대비되는 단순한 캐릭터의 움직임과 정지영상을 부각하며 새로운 연출 기법을 선보였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의 압권은 영화의 후반부. 재건 중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테츠오가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거대하고 역겨운 아기의 형상을 한 존재로 변해가는 장면이다. 절제된 움직임, 프레임 간의 매끄럽지 못한 연결은 당시 80년대 재패니메이션의 허술함과 단점이 드러난다기보다는 외려 영화의 역동성과 만나 극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아키라는 연속적 이미지는 과감히 생략하고, 비상식적 앵글을 통해 기습적으로 화면을 분할하며, 실재를 초현실적인 추상적 피사체로 형성해낸다.’ ━ 최은미, 중앙대학교, ‘아키라’의 매체전이과정에 따른 서사구조 비교분석, 2008 ━ 이 영화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하드코어 재패니메이션 이라는 장르 구축 그리고 작품 전체에 짙게 깔린 패배주의적 관점을 통한 아나키스트 세상을 향한 동경,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알파빌 │ 장 뤽 고다르, 1965
“사랑의 죽음”
장 뤽 고다르의 SF 영화를 상상해보자. 시처럼 흘러가는 대사, 뜬금없이 뛰쳐나온 점프 컷, 세상을 모방하며 보란 듯이 연기하는 배우. 고다르의 누벨바그 카메라는 그의 유일한 SF 영화인 알파빌에서도 예외 없이 빛난다.
‘알파빌’은 어느 미래, 알파 60이라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국가 ━ 혹은 도시 ━ 를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은 알파 60에 의해 오로지 이성과 논리로만 사고한다. 그들은 궁금한 것도 없고, 따라서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는다. 알파빌에서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 불문율이다. 왜냐고?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과거와 미래까지 추적하는 슈퍼컴퓨터 알파 60의 회로와 체계로도 풀 수 없는 그것. 바로 ‘감정’이다.
영화에서 특별하고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괴수의 습격도, 죽은 자의 부활도, 끝을 모르고 퍼지는 전염병도, 행성 충돌도, 전쟁도 없다.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은 일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일상을 살아간다. 차이점은 그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거다.
그렇다. 과연 누벨바그의 시인 고다르답게 그는 세상의 종말을 그 무엇도 아닌 감정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극단적인 예를 살펴보자. 그들의 세계 알파빌에서 감정을 느낀 사람은 그 즉시 사형에 처해진다. 그 방법 또한 독특하다. 수영장의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다이버들의 칼에 찔리거나, 영문도 모른 채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한 다음 의자에 전기를 흘려보내서 처단한다. 어쨌든 그들은 감정을 느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는 것이다. 병으로 사별한 아내에게 그리움을 느꼈다거나, 누군가를 연민했다는 죄목으로.
알파빌은 무엇보다 배우이자 고다르의 아내, 안나 카리나와 그녀가 맡은 나타샤라는 인물을 위한 작품이다. ━ 사실 고다르의 영화 대부분은 안나 카리나를 위한 헌정작이다 ━ 나타샤는 통제된 알파빌의 핵심 인물인 폰 브라운 박사의 딸이며, ‘양심’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시를 읽지 못한다. 이처럼 알파빌의 다른 구성원들과 다름없이 철저하게 알파 60의 명령대로 논리적인 삶을 살아가던 나타샤는 미래에서 온 한 남자, 레미 코숑을 만난 뒤 감정을 인지한다. 알파빌의 사람들에게 얻어맞는 레미 코숑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사람들의 말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녀는 곧 시를 이해한다. 시를 읽고,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이 태어난 곳에 향수를 느낀다. 무엇보다 사랑을 느낀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알파빌을 지배하던 알파 60은 마침내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알파빌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나타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SF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낭만적이다. 나타샤가 힘겹게 내뱉는 한 문장.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미소. 그리고 끝. 세상의 종말과 종말 이후의 사랑. 고다르가 은유하는 사랑 이야기는, 죽음의 순간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커버 디자인 │ 박진우